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26화
제9화. 야외 숙영 (2)
A형 텐트는 오랜만에 설치해보는 이강진.
사실 훈련소 때 말고는 A형 텐트를 설치해본 기억이 없었다.
자대에서는 A형 텐트가 아닌 24인용 군용 텐트를 친다. 혹한기, 유격, 혹은 ATT 전술훈련 등이 있을 때 24인용 군용 텐트를 치고서 그곳에서 야외 취침을 취하곤 했었다.
텐트 종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자신 있었다.
‘24인용도 설치했는데, 그거에 비하면, A형 텐트는 껌이지!’
게다가 경험도 있고 말이다.
야삽을 들고서 뒷면으로 쇠막대기의 뭉툭한 끝부분을 내려 쳤다.
쨍! 쨍! 쨍!
날카로운 금속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원래 야간에는 이런 소음을 내면 안 된다. 철주나 못을 박을 때에는 위에 타이어를 잘라 붙인 막대를 올려놓은 후에 가격한다. 소음은 적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우선 텐트부터 치고 봐야 한다.
"후우!"
큰 한숨을 내쉰 이강진.
겨울밤의 추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손등으로 땀방울들을 훔쳤다.
"다 됐다."
A형 텐트, 완성!
하나 백우호와 김철은 이강진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 했다고?"
"이게 끝이야? 텐트가 엄청 작은데?"
3명이서 자야 할 텐트다. 하나 크기 상으로 봤을 때에는 이건 무조건 1인용이다.
"설마 여기서 우리 셋이 자야 한다는 건 아니겠지?"
백우호는 이 말이 농담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나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냉정하다.
"군대에선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야."
이강진의 한 마디가 백우호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 * *
A형 텐트 밑에 비닐과 돼지갑바천, 그리고 모포를 몇 장 펼쳐서 깔았다.
시범삼아서 텐트 안에 들어가 누워보기로 한 김철.
"어때?"
소감을 묻는 이강진에게 김철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포복 훈련장에 그대로 드러누운 느낌이야."
작은 돌멩이 감촉 하나하나까지 아주 상세하게 다 등으로 느껴진다는 그런 뜻이었다.
이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외 숙영에선 그게 정상이야."
군대에서 푹신함을 바라면 사치다.
A형 텐트 설치를 끝마친 후에 모든 일이 마무리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강진은 야삽을 펴더니 A형 텐트를 중심으로 ‘ㄷ’ 형태로 지면을 파기 시작했다.
이강진의 뜬금없는 행동. 전우조 두 명은 이 행동이 가지는 의미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모르면 뭐다?
물어보면 된다.
"강진아. 뭐하는 거야?"
"이거?"
야삽으로 땅을 파낸 이강진은 퍼 올린 흙을 A형 텐트 끝자락에 털어냈다.
"배수로 깔 겸 바람도 막으려고."
"배수로?"
"조만간 행보관님이 배수로 작업 해두라고 말할 거야. 그전에 미리 해두면 편하지."
텐트를 치면 배수로는 무조건 까야 한다. 그래야 비가 올 경우에 텐트 안으로 물이 안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리는데 만약 배수로를 미리 파내지 않았다면······.
그날 잠은 다 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강진이 예언한대로 10분 뒤, 행보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훈련병들 사이를 누비면서 외쳤다.
"배수로 파는 거 잊지 마라! 괜히 비라도 왔다가 피 보기 싫으면 열심히 물골 파둬라!"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의 예언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정확도가 너무 높아서 이제는 경이로운 정도였다.
백우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를 더 물어봤다.
"그럼 이 다음에 우리, 바로 취침할 수 있는 거야?"
"아니."
한 차례 부정했다.
설마 또 훈련 받는 걸까? 불안감이 스칠 무렵, 이강진은 다른 것을 언급했다.
"부식 먹을 거야."
"좋은 소식이네!"
안 그래도 배가 출출하던 찰나였다.
이럴 때 떠오르는 부식이 있다.
"이럴 때 뜨끈~한 국물 있는 라면이 딱 좋은데."
얼큰한 라면 국물이 절로 떠오르는 백우호였다. 그때, 이강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나 못지않게 미래 예지 능력이 있나 보네."
"응? 설마 우리, 진짜로 라면 먹는 거야?"
"아니. 그거 비슷한 거 먹어."
"라면 비슷한 게 뭔데? 그런 게 있어?"
있다.
군대 보급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
"쌀국수 먹을 거야."
* * *
이강진은 아직도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다.
각개전투로 하루 종일 땀 흘리고, A형 텐트 다 설치한 다음에 오들오들 떨면서 덜 익은 쌀국수를 먹었던 기억이.
훈련병들은 보급 받은 쌀국수를 뜯은 채 정수기 앞에 섰다.
"앞 열부터 차례대로 나와서 물 받아간다. 실시!"
"실시!"
물을 받는 건 좋다.
그러나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이거, 면이 안 익는데?"
백우호가 아직도 굳어 있는 면 형태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말했다.
몇 분이 지났는데도 면발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물 자체가 뜨겁지 않다보니 면이 익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에는 다 방법이 있다.
젓가락으로 억지로 면발을 부수는 이강진. 면이 아니라 거의 과자 덩어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먹어야지, 뭐."
"······실화냐?"
"실화다."
덜 익은 쌀국수는 각개전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겨우 쌀국수를 목구멍 너머로 넘기는 데에 성공한 훈련병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다 먹은 훈련병들은 저녁 점호 따로 안 할 테니까 그대로 텐트에 들어가서 자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A형 텐트에 어떻게든 3명이, 그것도 가져온 완전군장 3개와 함께 부대끼면서 자야 한다.
등을 지면에 맞대고 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무조건 옆으로 누워서 자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세 명이서 텐트 안에 잘 수 있는 견적이 짜여진다.
이강진 조도 마찬가지였다.
"백우호, 이 녀석······ 덩치만 더럽게 커가지고!"
김철은 오른쪽에서 백우호의 등을 밀었다.
이강진과 김철이 구석에, 백우호가 가운데에. 이런 포지션으로 잠을 청하기로 했다.
완전군장은 배게 대신 사용하면 된다.
오랜만에 A형 텐트에서의 야외 숙영 탓일까. 이강진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고 있으면 어느 순간 한 명이 나머지 두 명 위로 올라가서 자고 있고. 그랬었는데.’
A형 텐트가 워낙 좁다보니 그런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와중에 백우호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야. 김철! 내가 덩치 크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아냐? 너무한 거 아니야?"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뒤척이지 좀 마!"
백우호와 김철의 투덕거림을 들은 걸까. 조교가 버럭 외쳤다.
"조용히 안 하냐! 안 잘 거면 잠 잘 오게 얼차려라도 빡세게 줄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 추운 야밤에 얼차려는 사양이다.
금세 입을 다무는 백우호와 김철.
그 사이, 이강진은 남들 몰래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대 침상이 그리워지는 날이 다 올 줄이야.’
이것이 군대 매직(Magic)이다.
* * *
각개전투 일정은 이틀로 짜여 있다.
야외 숙영이 끝난 다음에도 각개전투는 계속 된다.
첫째 날도 힘들지만, 하이라이트는 역시 둘째 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야외 숙영까지 했다. 피로가 풀릴 리가 있겠나. 오히려 없던 피로도 야외 숙영 때문에 생길 판이었다.
훈련병들의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 서클이 형성되어 있었다.
피곤한 상태에서 아침 점호가 시작되었다.
아침 점호는 중대장이 직접 맡았다.
"전체, 뒤로 돌앗!"
이제는 뒤로 돌기 동작이 충분히 숙달되어버린 훈련병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아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내며 있는 힘껏 외쳤다.
이후에 우리의 결의, 국군도수체조, 마지막으로 구보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식순은 다 진행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비닐에 감싸여진 식판을 들고 일렬로 나란히 줄을 섰다.
훈련이 빡세면 밥이라도 맛있어야 하건만.
콩나물국, 배추김치, 밥, 콩자반에 우유.
한숨이 절로 나오는 메뉴였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야 낫겠지.’
식사라기보다는 억지로 음식물을 배 안에 채워 넣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도 배라도 불러야 오전, 오후 훈련을 버틸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식사를 마치고 오전 9시에 칼 같이 맞춰서 단독군장 차림으로 집합했다.
훈련병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 좆같은 각개전투를 오늘도 해야 하다니!’
‘인생, 씨발! 군대, 씨발! 죄다 씨발이다!’
원한다면 자신의 이 신세에 시원스럽게 욕 한 사발을 퍼붓고 싶었다.
양말로 만든 보호대는 오늘은 차지 않았다. 어제 일을 통해서 양말로 만든 보호대가 더 이상 보호대 구실을 못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피멍 위에 더 큰 피멍이 생길 각오까지 마친 훈련병들 앞에 드디어 중대장이 등장했다.
"주목한다, 주목!"
"주목!"
"다들 이 중대장을 따라 산행한다. 알겠나!"
산행이라는 말에 이강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뜬금없이 웬 산행이지?’
이건 과거에 없던 일이었다.
이강진이 알고 있는 일대로라면, 오늘도 어제처럼 오전부터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를 이치면서 빡세게 교장 바닥을 굴렀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경사가 약간 있는 산행이었지만, 그래도 힘들다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산 능선을 따라 쭉 이동하면서 조교들은 훈련병들에게 뭔가를 교육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참호는 실제로 6.25 전투 당시에 사용된 참호로서······."
조교의 이론 설명을 듣고 또 산행. 그리고 또 교육을 듣고 산행.
그러다보니 어느새 훈련병들은 다시 각개전투 교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강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각개전투 훈련을 안 시키고 이렇게 농땡이를 부리는 걸까.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흠!"
헛기침을 하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은 중대장은 난데없이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줬다.
"각개전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다."
"······?!"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훈련병들은 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린 각개전투 2일차 훈련에 허망함마저 들었다.
중대장은 숨겨진 속사정을 이야기했다.
"어제 연대장님께서 너희들 훈련 받는 거 보고 아주 크게 칭찬을 하셨다. 연대장님 보는 앞에서 훈련 빡세게 받느라 고생 많았으니 대대장님께서 오늘은 대충 이론 교육만 하고 끝내라고 하셨다."
이 모든 공이 이강진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이강진의 활약이 악명이 자자한 각개전투 훈련까지 짬시킨 것이다!
훈련병들은 이강진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를 향해 무한한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과거에는 없었던 일.
이강진이 미래를 바꿨다!
‘별 일이 다 있네.’
그래도 이런 미래라면 언제든 대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