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27화
제10화. 마지막 관문 (1)
각개전투, 그리고 야외숙영.
어려운 훈련 두 개를 클리어한 훈련병들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다시 훈련소로 복귀하게 되었다.
생활관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백우호는 그대로 생활관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이 온기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아, 이제는 생활관이 내 방보다 더 정겹게 느껴지네."
기껏 해봐야 한 달 남짓? 그 정도밖에 없었을 텐데. 이미 몸은 훈련소의 생활관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이강진도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완벽히 적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강진은 다른 훈련병들에 비해 이곳 생활관에서 보낸 시간이 2배가량 많다. 그래서 더욱 빨리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얌전히 저녁을 먹고 취침을 취하면 된다.
그리고.
‘내일이 야간 행군인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훈련소 일정의 마지막이자 훈련 끝판왕!
다른 훈련들도 하나하나씩 그 면모를 살펴보면 괴롭지 않은 훈련이 없었다. PRI, 수류탄 훈련, 화생방, 각개전투, 그리고 야외 숙영 등.
하지만.
‘다른 훈련이 짧고 굵게 고통 받는 훈련이었다면, 야간 행군은 가늘고 길게 고통 받는 훈련이지.’
총 거리, 42km. 행군 시간만 11시간이 걸리는 고단한 훈련이다.
그저 걷기만 하는 훈련이 뭐가 어려운가?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행군은 평범한 걷기와 차원이 다르다.
야간 행군이라는 명칭답게 행군을 끝내기 전까지 잠을 잘 수가 없다. 오로지 걷고 또 걷는다. 이것이 야간 행군의 정의다.
솔직히 군용 차 많이 있는데 왜 행군을 해야 좋을지 의문을 가지는 군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위에서 하라는데 하는 수밖에 없다. 이유는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에라이 모르겠다. 오줌이나 싸고 와야지.’
화장실로 향하는 이강진.
행정반을 지나칠 때, 신경 쓰이는 말을 들었다.
"다음 주에 GOP, GP 갈 인원들 선별해야지?"
"네, 후보자들은 따로 뽑아뒀습니다."
GOP(General OutPost), 그리고 GP(Guard Post.).
최전방에서 철책을 지키는 육군 경계부대를 의미한다.
예전에 군 관련 다큐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선택받은 1퍼센트만이 GOP, GP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이곳에서 근무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말하는 군 간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강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입에서 바로 쌍욕을 내뱉었다.
대한민국의 1퍼센트가 특별히 선택받은 상위 1퍼센트가 아니라 하위 1퍼센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전방이다 보니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힘든 그런 곳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선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장소다. 하지만 그곳에서 군무한다는 건, 나름 각오를 굳혀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난 GOP, GP 출신은 아니었지.’
19사단 신병교육대에서는 GOP, 그리고 GP 인원을 선별하기 위한 특별 면접을 본다. 이 특별 면접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신병교육대 내에서 조교, 교관들이 따로 눈여겨봤던 훈련병들을 선별해 면접 기회를 주거나, 혹은 그곳에 근무하는 걸 희망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거나.
이강진은 과거에는 둘 중 어느 곳도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몰래 행정반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GOP, GP 지원은?"
"아직 안 받았습니다. 야간 행군 끝나고 주말에 받을 생각입니다."
"하긴. 어차피 마지막 주차 때 정신교육 실시하면서 GP, GOP 면접도 실행할 테니까. 주말에 받아도 늦진 않겠지."
한 명은 행보관의 목소리였다.
다른 한 명은 탄약반장이었다.
두 사람은 다음 주에 있을 최전방 면접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때, 중대장실의 문이 열렸다.
"행보관님. 인원 선별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직 안 했습니다. 이번 주 주말에 슬슬 면접 볼 인원 구별해둘까 하는데······."
"너무 A급은 그쪽으로 보내지 마세요. 저희가 데려갈 인원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데려갈 인원이라 함은······.
‘조교가 필요한 건가?’
신병교육대나 동원예비군 부대의 조교들은 항상 그 숫자가 부족하다.
조교라는 게 굉장히 힘든 직종이다. 하나 힘든 만큼 그에 따른 포상도 존재한다.
‘조교는 휴가를 많이 준다고 하던데.’
이강진이 알기론 그랬다.
신병교육대 조교 출신이었던 그의 친구가 했던 말이 있었다.
조교는 강약이 확실한 직종이라고.
빡셀 때에는 정말 빡세지만, 그만큼 풀어줄 때에는 잘 풀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휴가를 많이 받을 수 있다.
‘휴가라······.’
휴가를 자주 나갈 수 있다는 건 이강진에게 있어서 확실히 좋은 메리트다.
장시간 주식을 묵혀놓을 필요 없이 단타로 빠르게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시프 코인이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기 전까지 충분히 목돈을 모아놓은 후에 한 탕 제대로 하는 것이다.
힘든 만큼 좋은 점도 확실하게 있는 신병교육대 조교직.
때마침 중대장이 이강진의 이름을 거론했다.
"강진이 있지 않습니까?"
"125번 애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행보관은 훈련병들을 ‘애기’라 불렀다. 아무래도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다 보니 자기 눈에는 훈련병들이 햇병아리, 애기들로밖에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서 자주 저런 호칭을 사용했다.
"예. 강진이가 탐이 아주 많이 납니다."
"허허. 중대장님이 특정 훈련병을 대놓고 지목하시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 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강진을 현무중대 조교로 데려오고 싶다!
중대장의 속내는 그거였다.
탐을 안 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
"조만간 제가 강진이 불러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조교 할지, 말지. 이렇게 말입니다."
"안 할 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행보관의 물음에 중대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깔끔하게 포기할랍니다."
조교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중대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교가 하고 싶지도 않은 병사를 강제로 데려와 조교라는 두 글자가 적힌 방탄모를 씌워봤자 효과가 안 난다.
오히려 서로만 고통 받을 것이다.
중대장이 이강진의 의사 결정에 맡기겠다고 말한 이상, 선택권은 이강진의 것이 된다.
‘조만간 나를 불러서 의사를 물어볼 거라고 했지?’
거기서 대답만 하면 된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이강진의 앞으로 남은 군생활이 결정될 것이다.
중대장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아니, 벌써부터 섣불리 결정하지 말자. 천천히 생각 좀 해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겠지.’
휴가를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건 좋다. 하지만 그만큼 빡세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현무중대 조교들처럼 새로운 기수를 받게 되면, 그 기수가 퇴소하기 전까지는 개인정비 시간이라는 게 없어진다.
티비뿐만 아니라 신문 한 장 볼 시간도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원래 이강진은 자신이 가려던 부대를 가고 싶어 했었다.
그곳의 선임 병사들, 그리고 간부들의 성향과 취향을 다 꿰뚫고 있으니, 이 점을 잘만 활용하면 남은 군생활을 편하게 있다가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자기 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이강진은 자신 있었다.
‘이 한 번의 선택이 중요해!’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남았다.
아주 많이.
* * *
저녁 점호 시간에 조교들은 훈련병들에게 내일의 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일은 야간 행군할 거다."
훈련소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행군.
야간 행군을 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훈련병들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주간 행군 때에도 물집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는 주간 행군보다 더 힘든 녀석이 찾아왔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희소식이 하나 있었다.
3생활관으로 들어온 서기준 조교는 훈련병들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그 희소식을 전했다.
"얘들아."
"예!"
"이번 야간 행군만 어찌저찌 끝내면, 퇴소 전까지 큰 훈련 없이 정신교육만 받다가 퇴소할 수 있잖아. 신병교육대에서 받는 마지막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내일 한 번 다 같이 열심히 훈련 받아보자.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 훈련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상당했다.
벌써부터 훈련병들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야간 행군만 끝내면······.
그리고 신병교육대를 퇴소하게 되면······.
‘나도 이등병이 될 수 있어!’
‘가자! 이등병의 세계로!’
장정에서 훈련병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어느 순간 자신들도 작대기 하나 달아보는 게 소원이 되어버렸다.
사회에서는 이등병, 까짓것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훈련소에 오게 되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이등병도 대단해 보인다. 이것이 훈련소 효과였다.
하지만 그전에 야간 행군이라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한다.
"내일 일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하마. 아침에 점호 받고, 식사 하고. 오전에 정신교육 좀 받았다가 점심 먹고 생활관으로 복귀해서 오후 16시까지 오침을 취한다. 오침 끝나고 완전군장 싼 다음에 5시 반까지 연병장으로 집합한다. 그리고 정확히 오후 18시에 야간 행군 시작한다. 내가 방금 한 말, 다 기억했지?"
"예!"
"훈련 예정 시간은 11시간이다. 새벽 5시 정도에 끝날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둬라. 그리고 너희도 이제 훈련소 짬밥 어느 정도 먹었으니까 잘 알 텐데. 우리 대대장님이 싫어하는 게 뭔지 알지?"
훈련병들은 입을 모아 대대장이 가장 싫어하는 ‘그것’을 외쳤다.
"낙오입니다!"
"그래. 예전에 저기 옆쪽 청룡중대에서 야간 행군 하는데 낙오자만 20명인가 30명인가 나왔다고 하더라. 그래서 대대장님이 엄청 화를 낸 적이 있거든. 그게 불과 저번 달의 일이다. 이번에는 대대장님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 현무중대 지켜보고 계실 테니까 잘 기억해둬라."
"예!"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대대장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훈련병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기도 했다.
* * *
야간 행군 일정이 잡혀서일까.
훈련 당일 날 나온 아침, 점심 메뉴는 굉장히 호화스러웠다.
아침 최고의 메뉴라고 손꼽히는 비엔나소시지를 시작으로 점심에는 짜장면까지.
그야말로 올스타들의 집합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침까지 보장해줬다.
밥 먹자마자 조교가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후 1시 되기 전에 매트리스 깔고 다 누워라."
"예, 알겠습니다!"
매트리스를 깔고 위로 누운 백우호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배부르고 등 따스할 때 잠까지 자게 해주다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이강진이 바로 태클을 걸었다.
"천국은 개뿔."
오침 시간이 끝나고 나면, 천국으로 보였던 곳이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깨달을 것이다.
아, 내가 군대한테 또 속았구나!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