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36화
제12화. 또 왔다 (4)
1생활관에서 화장실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화장실로 향하던 길에 백우호는 이강진에게 조용히 물었다.
"야, 강진아. 아까 화장실 갔다 왔잖아? 근데 왜 갑자기 또 가자는 거야?"
"이유가 있어.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이강진은 혹시 모르니 백우호에게 조언을 해두기로 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마라."
"엥? 그게 무슨 소리야?"
"나중에 보면 알아."
앞서가던 김명찬이 화장실 팻말을 가리켰다.
"화장실은 저기야."
"고마워. 아직 막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화장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금세 까먹었는데. 역시 자대에 미리 온 동기가 있으니까 편하구나."
이강진은 일부러 힘을 주고서 김명찬의 등을 토닥여줬다.
신병놀이 때문에 이강진의 동기 연기를 해야 하는 김명찬이기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나 아직 이강진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화장실 같이 가자."
"나도?"
"어."
입구에서 기다리려는 김명찬을 화장실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안 그래도 김명찬도 화장실에 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행보관을 피해 다니느라 생활관에 계속 짱박혀 있다 보니 방광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래, 가자."
설마 별일이야 있겠나.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오는 김명찬.
그러나 김명찬이 발을 들인 곳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개미지옥······ 아니, 말년병장지옥이었다.
"헉······!"
소변기 창문틀 작업을 하고 있던 행정보급관과 딱 마주친 것이다.
"음? 이 녀석이 어딜 갔나 싶더니, 여기 있었군!"
행보관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농땡이 부리다가 결국 행보관에게 들킨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병도 왔구먼."
행보관의 관심이 어느새 이강진에게 쏠렸다.
이강진의 턴이다.
"충성! 일주하고 같이 화장실 왔습니다."
"뭐? 일주라고? 서일주 말하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김명찬은 이강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쉿!’이라고 조용히 외쳤지만, 행보관의 눈치가 어디 보통이랴.
"이강진."
"이병 이강진!"
"다시 말해봐라. 방금 이 녀석보고 ‘서일주’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같은 달에 자대 전입했으니까 저하고 동기라고 말했습니다! 그치, 일주야?"
"이, 이병 서일······ 주······."
일부러 아주 상세하게 김명찬의 만행을 보고했다.
한편, 김명찬은 죽을 맛이었다.
이강진이 일부러 김명찬을 엿 먹이려고 이런 일을 꾸몄다는 걸 그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화장실에서 행보관을 마주치게 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김명찬."
행보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농땡이 피운 것도 모자라서 신병놀이까지 하다가 딱 걸렸으니······.
김명찬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병 김명······."
"어쭈. 이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거지? 어디, 이등병 시절 떠오르게끔 내가 확실하게 교육시켜주랴?"
"병장! 김명찬!"
결국 김명찬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행보관에게 딱 걸렸는데, 신병놀이고 나발이고 그딴 걸 어떻게 신경 쓰나.
김명찬이 자신을 병장이라고 하자 백우호는 헛숨을 삼켰다.
"벼벼벼벼병장?!"
이강진도 백우호처럼 내심 놀라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면서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난 연기에 소질이 없구나.’
하나 행보관은 이강진의 어설프게 놀라는 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 오늘 잘 됐다. 말년이라고 봐주니까 아주 그냥 살판이 난 모양인데, 내가 오늘 네놈, 어떻게 해서든 영창 보낸다!"
"죄, 죄송합니다, 행보관님!"
"죄송하면 군생활 끝나냐? 망할 놈! 따라오기나 해!"
행보관은 김명찬의 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화장실을 나선 두 사람은 바로 행정반으로 직행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강진은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야······ 갑자기 왜 그래?"
백우호는 이런 이강진을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마 백우호는 모를 것이다.
이 통쾌함을!
* * *
평소에 행보관에게 제대로 찍혔던 김명찬 병장.
그는 신병놀이로 인해서 군생활이 늘어나는 마법을 몸소 체험할 뻔했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빌고 빌어서 겨우 영창만은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후폭풍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우선 가지고 있던 말년 휴가는 다 잘렸다. 안 그래도 부대 분위기 안 좋은 와중에 신병까지 골려먹으려고 했으니 가중 처벌을 받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서 전역할 때까지 김명찬 병장은 행보관의 노예 신분이 되기로 했다.
이제부터 행보관이 지시하는 작업을 무시하고 몰래 짱박히거나 할 경우에는 바로 중대장에게 말해서 영창 보내도록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을 당했다.
김명찬 병장은 어쩔 수 없이 행보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김명찬 병장의 신병놀이는 결국 최악의 엔딩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명찬 병장이 행보관에게 무릎 꿇고 비는 동안, 이강진과 백우호는 생활관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생활관의 문이 열리면서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황지웅 일병.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오, 신병이 둘이나 왔습니까? 안 그래도 혼자 막내생활 하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천만다행이지 말입니다."
‘진짜’ 서일주 이병이었다.
이미 김명찬 병장한테 한 차례 속은 경험이 있어서일까. 백우호는 서일주 이병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진짜로 서일주 이병님이십니까?"
"응? 어. 근데 가짜 서일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서일주 이병은 김명찬 병장이 자신의 옷으로 신병놀이를 하다가 걸렸다는 사실을 아직 듣지 못했다.
안준렬 상병이 오고 나서야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황지웅 일병과 서일주 이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그토록 하지 말라고 말렸건만······."
"어휴. 꼬장 좀 적당히 부리시지, 하필이면 부대 분위기 안 좋을 때 신병놀이 하시다가 행보관님한테······."
두 사람은 이후에 김명찬 병장이 어떤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안준렬 상병은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나, 작업 있어서 나가야 하니까 너희가 남아서 애들 주기도 해주고, 알려줄 거 알려주고 그래라. 지웅아."
"일병 황지웅."
"네가 책임지고 잘 맡아. 이중에선 최고선임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일병이면서 최고선임이 되는 건 결코 흔한 경우가 아니다.
황지웅 일병은 서일주에게 네임팬을 건넸다.
그러고서 이강진과 백우호에게 따로 말을 흘렸다.
"의류대에 있는 보급품들 다 꺼내놔. 이름 적어줄 테니까."
자대에 전입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보급품에 자기 이름 써놓기다.
보급품은 잃어버리면 안 된다. 간혹 상급 부대에서 병사들이 군대에서 지급한 보급품을 제대로 보관하고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 검열을 나올 때가 있다. 그때 하나라도 보급품이 누락될 경우에는 부대 전체가 뒤집어질 것이다.
"이렇게 너희 이름을 보급품에 적어둬야 나중에 다른 분과가 너희 물건 몰래 훔쳐가도 바로 찾아낼 수 있는 거야. 나중에 너희도 후임 받으면 이렇게 해줘야 하는 거, 잊지 말고."
"좋아. 목소리가 우렁차니까 마음에 드네."
황지웅 일병은 신병이 두 명이나 들어왔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물론 서일주 이병도 마찬가지였다.
주기를 해주는 동안, 생활관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남자.
바로 소동의 주범, 김명찬 병장이었다.
"충성!"
황지웅 일병이 대표로 거수경례를 했다. 김명찬 병장은 거수경례를 대충 받아주고서 그대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졌다.
"하······ 씨발. 하필이면 화장실에 행보관님이 계시냐. 좆될 뻔했네."
이강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김명찬 병장님! 전부 제 탓입니다!"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이강진은 속으론 웃고 있었다.
한편. 제아무리 김명찬 병장이라 하더라도 이강진에게 차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우연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까.
"······됐다. 니들이 뭘 알겠냐."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들 잡고 트집을 잡았다가 또 행보관에게 꼬투리 잡히면 바로 영창이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게 말년병장의 철칙.
행보관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니, 특히나 조심해야 한다.
김명찬의 주특기였던 말년 꼬장도 못 부리게 되었다.
김명찬 병장의 뒤를 이어서 전마등 병장이 1생활관을 찾았다.
"아, 김뱀 여기 있었네."
"······왜."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말에 불안함이 느껴졌다.
"오늘 신병들 세족식 있다고 하니까 준렬이하고 같이 준비해."
세족식.
새로 들어온 신병을 존중하고 아껴주겠다는 의미로 행하는 소소한 이벤트다.
"뭐?! 신병들 발이나 씻겨주라고? 내가? 왜! 원래는 분대장이 하는 거잖아!"
"분대장 플러스 최고선임자가 하는 거지. 나, 이거 안 보여?"
팔에 차여진 노란색 완장을 직접 보여주는 전마등 병장.
"오늘 당직이니까 김뱀이 대신 좀 해줘."
"싫어! 내가 미쳤냐?!"
"행보관님의 명령이라도 거절할 거야?"
"······."
나왔다. 날뛰는 말년병장을 진정시켜줄 마법의 주문!
결국 무조건 하게 되어 있다. 김명찬 병장 본인도 알고 있었다.
"오늘 행보관님이 당직사관이시니까 세족식 다른 애들한테 떠넘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잘 부탁해, 김뱀."
뒷일을 맡기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뜨는 전마등 병장.
"개 같은 군대, 빨리 전역하고 싶네! 씨바알!!"
김명찬 병장의 절규는 한동안 계속 되었다.
* * *
저녁 9시 반.
오늘은 이례적으로 통합 점호를 실시하게 되었다.
행정반 옆의 넓은 공간으로 집합한 1중대 인원들.
통합 점호를 추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당직사관 완장을 찬 행보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목."
"주목!"
"오늘 신병들 온 거,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병사들은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신병들, 자리에서 일어나라."
"이병 이강진!"
"이병 백우호!"
"이병 김철!"
세 명은 자신의 관등성명을 외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강진부터 자기소개 맛깔나게 해봐라."
"예, 알겠습니다!"
빠질 수 없는 그 시간.
바로 자기소개 타임이다.
"이병 이강진! 금일부로 1중대 전입을 명받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충! 성!"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자기소개였다.
이강진이 스타트를 잘 끊어준 덕분에 백우호와 김철도 무난하게 자기소개를 이어갈 수 있었다.
원래는 자기소개 이후에 장기자랑 타임도 가져야 하지만, 행보관은 그런 걸 시키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장기자랑보다 먼저 해야 할 게 있었다.
준비된 의자에 자리를 잡은 세 명의 신병.
발아래에는 미지근한 물이 담긴 대야가 있었다.
김철은 행정분과 최고선임이. 백우호는 안준렬 상병이 세족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강진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명찬 병장님."
"······오냐!"
1중대의 트러블 메이커, 김명찬 병장이 이강진의 발을 직접 씻겨줬다.
순간 이강진은 고민에 빠졌다.
‘아,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네.’
너무 통쾌해서 한바탕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