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3화
제15화. 바깥 공기 (2)
남이 사주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
특히 군대 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군인 월급이라고 해봤자 얼마 안 된다. 아무리 PX가 민간 사회의 편의점보다 물가가 싸다 하더라도 시급 몇 백 원도 안 되는 군인 월급으로 먹을 수 있는 식품 양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백우호는 먹고 싶은 것들을 거침없이 고르기 시작했다.
이강진은 백우호처럼 욕심을 많이 부리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하나와 탄산음료 캔 하나, 그리고 과자 하나와 이강진이 평소에 좋아하던 슈X치킨 하나. 이렇게 네 개만 골라 바구니에 넣었다.
백우호는 이강진의 3배 정도 되는 먹거리들을 챙겨 넣었다.
계산대를 지키던 병사가 서일주가 계산해야 할 금액을 알려줬다.
"다 합해서 2만 5천 5백 원이네요."
"여기 카드요."
서로 ‘요’로 끝나는 말을 사용하는 서일주와 대대 PX병. 백우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 강진아!"
팔꿈치로 이강진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바, 방금 서일주 이병님, 저 일병 분한테 ‘요’ 쓰지 않았냐?!"
"어, 썼지. 나도 봤어."
"원래는 쓰면 안 되잖아! ‘다나까’ 써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같은 부대 선임들한테 쓰는 거고. 1중대 말고 다른 부대 병사들은 아저씨야. 그냥 서로 ‘요’자 써도 돼."
"엥? 그런 거야?"
"그런 거다."
아직 백우호는 이런 개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타 부대 간부들한테까지 ‘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간부는 간부. 병사는 병사. 이건 확실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
신기한 광경을 목격한 백우호는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 모양인지 혼란에 휩싸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이강진은 계산이 다 끝난 물건들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양 손이 금세 두둑해졌다.
카드를 집어넣은 서일주가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가자······ 근데 우호는 왜 저러냐?"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이강진은 그저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 * *
이강진에게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된 서일주.
그는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면서 백우호와 공감대를 형성했다.
"나도 너처럼 황지웅 일병님이 다른 대대 아저씨랑 서로 ‘~요.’라고 말할 때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이 있거든. 내가 알던 군대와 전혀 다른 말투 사용하니까 당황했지."
"서일주 이병님도 그러셨습니까."
"어. 참고로 우리 중대 막사에 붙어 있는 의무대 있잖아? 거기 의무대에 있는 아저씨들한테도 다나까 사용 안 해도 돼. 그 아저씨들은 본부중대 소속이니까. 강진이는 이미 아는 거 같고. 우호는 잘 알아둬."
"예, 알겠습니다!"
때마침 전자렌지에서 띵! 하는 소리가 났다.
포장을 뜯자, 알맞게 익었는지 냉동식품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돌았다.
그때, 서일주가 갑자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먹겠다고 골랐으니까, 각자 고른 거 다 먹을 때까지 막사 안 올라갈 거다. 하나도 남김없이, 배가 터져도 다 먹어라."
"헉······!"
가장 불리한 건 백우호다.
백우호는 이강진의 말을 믿었다. 이런 내무부조리 없어졌다던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정말로 먹고 싶은 거 다 골랐건만.
흔들리는 백우호의 눈빛을 본 서일주는 키득키득 웃었다.
"농담이야. 그냥 해본 말이니까 너무 그렇게 동요하지 마라, 우호야."
"이, 이병 백우호! 심장이······ 아니, 위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그러냐? 놀린 보람이 있네."
언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늘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이강진과 다르게 백우호는 놀리는 맛이 굉장히 찰졌다.
이강진이 백우호의 선임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맨날 놀렸을지도 모르지.’
그 생각이 들자,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 * *
1075대대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
원래는 종교행사를 가는 날이지만, 오늘 이강진과 백우호, 김철 셋은 아쉽게도 종교행사에서 열외될 수밖에 없었다.
행보관과 함께 떠나는 대중목욕탕 일정 때문이었다.
차를 타고 온 행보관. 그는 평소와 다르게 사복 차림이었다.
"충성!"
오늘 당직사관인 박두정 하사가 행보관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신병들은?"
"준비 다 시켜줬습니다."
"그래? 방송으로 애들 행정반으로 오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당직병이 방송으로 신병들을 호출했다.
-아아. 행정반에서 알려드립니다. 이병 이강진, 이병 백우호, 이병 김철은 지금 즉시 행정반으로 오기 바랍니다.
방송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이강진과 백우호가 먼저 행정반에 들어섰다.
"이병 이강진!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뒤이어 김철도 모습을 드러냈다.
세 병사들은 평소에 입고 다니는 군복이 아닌 휴가 때만 입고 나가는 A급 전투복을 입고 행정반을 찾았다.
행보관은 이들에게 따라오라고 말한 후에 앞장을 섰다.
사열대 앞에 주차되어 있는 행보관의 SUV 차량에 하나둘씩 올라서는 신병 트리오.
덜컹거리는 군용 트럭 뒤가 아닌 편안하고 푹신한 민간 차량에 오랜만에 탑승해서일까. 이들의 눈빛에 설렘이 가득 깃들었다.
"출발한다."
"예!"
능숙한 운전 솜씨를 발휘하며 차량을 몰아가는 행보관.
위병소 앞에서 잠시 차량을 멈춰 세운 후에 선임근무자에게 말했다.
"신병들 데리고 목욕탕 갔다 오마."
"아, 그거 때문에 오셨던 겁니까? 예, 알겠습니다. 바리케이드 바로 치우겠습니다."
"오냐."
위병소를 나선 후에 민간 도로에 올라섰다.
10분 뒤.
점점 도시의 모습이 신병들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행보관님, 창문 내려도 됩니까?"
"왜, 더워?"
"그게 아니라······."
우물쭈물 거리는 김철을 대신해서 이강진이 말을 이었다.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고 싶어서입니다."
"허허, 이 녀석들. 그래, 이럴 때 사회 공기 실컷 마셔보지, 언제 마시겠냐. 마음대로 해라."
"감사합니다!"
행보관은 다른 간부들만큼 병사들을 옭아매고 하는 그런 FM 스타일이 아니다.
할 땐 하고, 풀어줄 땐 풀어주고. 이게 1중대 행정보급관 스타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사들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 헤아려주려고 한다. 그의 성향을 잘 알기에 이강진은 솔직하게 말을 했던 것이다.
창문을 내리자, 벌써부터 봄의 기운을 머금은 따스한 바람이 이들의 얼굴을 스쳤다.
순간 이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창문 너머로······.’
‘······뛰어내리고 싶다.’
물론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사회에서 맡는 공기가 너무 좋았다는 것을 뜻했다.
* * *
행보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30분을 달린 끝에 오늘의 목적지인 대중목욕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내려라."
하차를 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민간인들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다정다감한 부부의 모습을 시작해서 친구들과 PC방으로 직행하는 고등학생들,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남녀 커플들까지.
하나 무엇보다도 신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바로······.
바로 여대생 일행이었다.
"야야야! 저기 봐봐! 오른쪽이 가장 괜찮지 않냐?"
"나는 왼쪽."
"중간이 제일 나은 거 같은데······."
각자의 취향을 소신껏 밝히면서 토론의 장을 열려고 할 때쯤이었다.
"뭐하냐, 얼른 들어오지 않고."
"이병 백우호!"
"이병 이강진!"
"이병 김철! 바로 가겠습니다!"
행보관의 부름에 즉각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목욕탕 안으로 발을 들인 이들.
그전에 이강진이 백우호와 김철에게 몰래 경고했다.
"들어가기 전에 심호흡 크게 한 번 하고 들어가라."
"응? 왜?"
"니들 심장마비 겪을까 봐."
이때 당시에는 이강진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이강진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백우호와 김철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별 두 개가 달려 있는 전투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다.
"투, 투스타?!"
"······!"
헛숨을 삼키는 두 이등병.
이곳 대중목욕탕은 평범한 목욕 시설이 아니다.
사실은 군 간부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위치한 대중목욕탕이다.
그 말인즉슨.
‘군에 종사하는 높은 계급의 간부들과 지겹도록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지.’
제아무리 이강진이라 하더라도 이곳에선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별들이 목욕을 하러 오는 장소.
평범한 줄 알았던 대중목욕탕에 은하수가 펼쳐졌다.
* * *
갑작스런 별들의 등장에 신병들은 마음 편히 목욕을 할 수가 없었다.
몸에 대충 비누칠만 칠하고 나온 그런 기분이었다.
어차피 오늘의 목적은 목욕탕에서 몸을 씻는 게 아니다.
바로 행보관이 사주는 점심이다.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이병 백우호! 짜장면이 먹고 싶습니다!"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에 가장 무난한 메뉴였다.
결국 최종적으로 백우호가 제안한 중국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강진은 볶음밥과 짜장면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복짜면을 주문했다.
볶음밥을 주문하면 짬뽕 국물까지 붙어서 나온다. 이건 복짜면도 마찬가지였다.
한꺼번에 세 가지의 맛을 즐길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행보관이 서비스로 사준 탕수육을 입에 털어 넣었을 때였다.
"강진이, 저번에 네가 말한 종목 있잖냐."
"이병 이강진. 진영캐미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네가 조만간 폭락할 거니까 나한테 만약 거기에 돈 넣어둔 지인 있으면 빼놓으라고 말하라고 했던 거, 기억하나?"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불과 3일 전의 일인데, 그걸 기억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네 말대로더라. 팔자마자 10분 지났나? 떨어지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결국 나락까지 떨어져버리더라. 사실 너한텐 비밀로 했었지만, 거기에 넣어둔 돈이 좀 있었거든. 네 덕분이다. 고맙다."
"아닙니다."
행보관은 이강진이 ‘우연히’ 진영캐미컬에 관한 이야기를 한 줄로 알고 있었다.
하나 이강진은 의도적으로 진영캐미컬 소식을 들려준 것이었다.
행보관이 거기에 적지 않은 돈을 넣어둔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행보관의 신뢰를······ 아니, 마음을 조금씩 사들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이강진이 행정보급관이라는 이름의 종목의 대주주가 될 것이리라.
‘좋아, 계획대로야!’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일이 잘 흘러가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 이강진.
그때, 작은 변수가 하나 생겼다.
행보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뭐? 학교 앞까지 바래다 달라고? 일요일인데 갑자기 웬 학교냐. 친구들이랑 약속? 그런 거 있으면 그냥 택시 타고······ 어휴, 알았다. 알았어. 아빠가 곧 가마."
아빠?
신병들의 관심이 어느새 행보관에게 쏠렸다.
통화를 마친 행보관은 신병들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우리 딸이 오늘 친구들하고 약속 있다고 지 다니는 대학교 입구까지 태워달라고 하는구나. 딸내미 바래다주고 부대로 복귀시켜주마."
대학! 여대생!
신병들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커졌다.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행보관님!"
이들의 충성심이 갑자기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