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4화
제15화. 바깥 공기 (3)
점심 식사를 끝낸 후에 이들은 행보관의 차로 향했다.
그전에 행보관이 신병들에게 물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 있나?"
"없습니다!"
"그렇구먼. 그럼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을 테니까 차 안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행보관의 지시에 따라 신병 셋은 차량 안으로 탑승했다.
백우호와 김철은 벌써부터 설렘을 드러냈다.
"행보관님 따님이라니, 얼마나 예쁠까?"
"여대생이라고 했으니까 분명 여신 같을 거야. 그렇지?"
"그러엄! 요즘 여대생들이 얼마나 예쁜데! 특히 우리나라 여자들이 말이야. 다리가 정말 예쁜 거 같아. 안 그러냐, 강진아?"
"글쎄."
일단 이강진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행보관의 딸과 만나게 된 건 예전에 없던 이벤트였기 때문이었다.
미래의 일이 이강진이 회귀하기 이전에 겪었던 흐름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이건 이강진도 예전부터 눈치 채고 있었던 사실이다.
‘설마 행보관의 딸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처음 만나는 거다 보니 행보관의 딸이 어떤 여자인지 이강진은 전혀 몰랐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행보관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올렸다.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에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오오! 드디어 여신님 강림하시나 보다!"
"어디, 어디!"
백우호와 김철이 엄청난 호들갑을 떨었다.
하나 이 호들갑은 머지않아 사그라지게 되었다.
"아빠아!"
저 멀리서 뛰어오는 거대한 거구.
한 어깨 한다는 백우호보다도 훨씬 더 체격이 좋아 보이는 여성이 행보관에게 다가왔다.
치마를 입지 않았더라면 아마 여자인지도 분간이 잘 안 됐을 것이다.
"······."
"······."
"······."
순간 차 안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여신은 여신이다.
하나······.
행보관의 딸은 힘의 여신이었다.
* * *
운전대를 잡은 행보관은 난데없이 신병들에게 자신의 딸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우리 딸이 말이다. 이번에 역도 대회 나가서 우승까지 했거든! 성인이 되기도 전에 이 아빠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힘이 장사란 말이야. 허허!"
"아빠, 창피하니까 그만 말해요. 그보다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려요?"
"음? 어디 보자······ 네비에는 한 20분 뒤에 도착한다고 나오네."
"너무 느려요! 10분 안으로 도착해야 하니까 밟아요!"
외형뿐만 아니라 성격도 굉장히 호전적이었다.
역도 선수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딸이 여군으로 지원했을 거라고 말하는 행보관.
외형만 사나워 보일 뿐이지, 그의 딸은 그래도 성격은 시원스럽고 좋아 보였다.
"군인 아저씨들! 이거 마셔요. 집에 있는 냉장고에서 막 꺼내왔으니까 시원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차가운 이온음료가 바짝 목이 타버린 신병들에게 청량함을 선사했다.
안 그래도 점심 식사 이후에 시원한 음료가 땡겼다. 그러던 찰나에 행보관의 딸이 센스 있게 음료수를 챙겨온 것이다.
‘그래. 사람은 외형이 다가 아니지.’
내면의 아름다움도 봐야 한다. 이강진뿐만 아니라 백우호, 김철도 그렇게 생각했다.
행보관의 차량이 대학교 정문 앞에 잠시 정차했다.
"고마워요, 아빠!"
"조심해서 놀다 오고. 저녁 10시 이전까지는 집에 들어와야 한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도 알지?"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상이 무서워도 행보관의 딸에게 덤비는 불한당은 없을 것 같아 보였다.
하나 신병들은 이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만약 꺼내는 순간, 그날 이후로 군생활은 다 끝났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신병들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모처럼 아리따운 아가씨들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현역 역도 선수의 무용담만 지겹도록 듣게 되었다.
"자, 출발한다."
행보관이 운전대를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야야야, 강진아! 철아! 저기 봐봐!"
"또 뭔데."
백우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트는 두 사람.
그 순간, 이들은 눈을 의심했다.
행보관의 딸과 만나기로 약속한 상대방 때문이었다.
흰색 스키니진에 볼륨 있는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는 타이트한 상의. 그리고 긴 생머리까지.
하나 중요한 건 바로 그녀의 미모였다.
"대박······!"
"뭐 저렇게 이쁘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본 순간, 이강진은 숨이 멎을 뻔했다.
너무 예뻐서? 아니면 자신의 이상형에 딱 맞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저 사람, 한지윤이잖아!’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라 불리게 될 스타, 한지윤!
설마 그녀와 이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 * *
"지윤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니, 괜찮아."
한지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행보관의 딸에게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보다 그녀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뒤에 병사분들이 탄 거 같은데. 무슨 일이야?"
"아, 자대 전입 새로 오면 우리 아빠가 그 주에 데리고 나와서 대중목욕탕 같이 가곤 하거든. 그거 때문인 거 같아."
"어머, 그래? 원래는 하다가 말았잖아."
한지윤은 1075대대 부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의 아버지가 맡고 있는 1075대대 기독교 종교 행사를 도와주러 갔기 때문이었다.
한지윤의 아버지는 목사 출신이다. 하나 그녀는 종교를 따로 가지고 있진 않았다. 신앙심으로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아버지를 돕는 게 그녀의 목적이었다.
1075대대에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그 부대의 현재 사정이 어떤지 대충 듣곤 한다.
행보관의 딸이 어깨를 으쓱였다.
"옆 부대에서 이등병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서 다시 시행하는 거 같아. 원래 군대라는 곳이 다 그렇잖아? 사건 하나 터지면 안 하던 것도 하게 되고. 없던 것도 만들어서라도 하게 되고."
"하긴, 그렇지."
비록 한지윤은 군인은 아니지만, 군부대를 자주 왕래하다보니 또래 얘들보다 군대가 어떤 곳인지 잘 알게 되었다.
순간 행보관의 딸이 눈을 흘겼다.
"저 셋 중에서 마음에 드는 군인 아저씨라도 있었어? 내가 연결해 달라고 할까?"
"어머, 얘 좀 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필요하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군인 아저씨들 소개시켜주는 건 확실하게 할 수 있으니까."
"어휴, 그래. 알았다, 알았어."
대충 장단만 맞춰주기로 결심한 한지윤이었다.
* * *
‘별 일이네. 살다보니 젊었을 적 한지윤을 다 보고.’
이강진이 아는 것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지만, 틀림없이 한지윤이었다.
왜냐하면 이강진은 한지윤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드라마는 빠짐없이 다 챙겨봤기 때문이었다.
한지윤은 이강진의 첫 사랑이었다.
잘나가는 주식 부자가 된 이후, 정말 어렵사리 그녀와 사적인 자리에서 한 번 마주할 일이 있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그런 자리는 아니었다. 상위 0.1퍼센트들이 참석하는 VVIP 파티에서 그녀를 만난 기억이 있었다.
말 몇 마디 붙여본 게 다였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이강진에게 아직도 인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어린 시절의 한지윤을 군대에 온 덕분에 보고 말이야.’
군 입대 이후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한편. 아까부터 아무런 말없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이강진의 모습을 예의주시하던 백우호가 조용히 물었다.
"아까 봤던 그 여자 생각하냐?"
"······아니."
입으로는 부정했지만, 얼굴 표정에는 백우호의 말이 맞다고 다 드러나 있었다.
백우호는 눈치가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짜식. 그런 여자가 이상형이었나 보네. 하긴,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여자가 우리 같은 군바리한테 눈길 하나 주겠냐. 그냥 얌전히 포기해라."
"나도 알아."
이강진도 아주 잘 안다.
심지어 이때 당시의 이강진은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이강진을 한지윤이 누구 좋으라고 만나주겠나.
한지윤과의 인연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너무 목을 매다보면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약속된 성공이 이강진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거기에 집중을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 * *
일요일 저녁.
주말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간을 최대한 보람차게 보내기 위해 병사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호야!"
라인혁 상병이 백우호를 불렀다.
"이병 백우호!"
"일주한테 들었다. 너, FIFA 할 줄 안다며?"
"예, 그렇습니다!"
"패드 좀 만져봤나 보다? 어때. 나하고 한 판 해볼까? 내가 우리 1중대 FIFA 챔피언이거든. 챔피언의 실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영광입니다, 라인혁 상병님!"
이렇게 갑자기 만들어진 FIFA 듀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지웅 일병이 이강진을 찾았다.
"강진아. 나, 전화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전화 할 사람 있으면 해도 돼."
"이병 이강진!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강진은 집에 전화가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티비에서 방영되고 있는 걸그룹 무대에 빠진 선임에게 전화가 하고 싶으니까 같이 가자는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마침 황지웅이 타이밍 좋게 제안을 해온 것이다.
황지웅은 1분대에서 가장 전화를 많이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우리 지은이~ 잘 지냈엉? 오빠가 전화 너무 자주 안 해서 미안행~"
입대 전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기만 붙잡으면 황지웅의 말투는 역겨워진다. 이 통화 내용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름 고충이었다.
그 사이에 이강진은 옆 전화 부스를 차지했다.
잠시 뒤에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진이니?
"예, 엄마. 저예요. 잘 지내시죠?"
-나야 잘 지내지.
그러나 잘 지낸다는 말과 다르게 목소리는 무거웠다.
"무슨 일 있어요?"
-으응, 아니야. 그보다 다음 달에 면회 한 번 갈까 하는데. 아무 때나 가도 되니?
"잠시만요. 3주차 때 오면 될 거 같아요. 그 다음에는 훈련 일정 때문에 안 되거든요."
-그래. 그럼 그때 가마. 할 이야기도 있고.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통화를 끊은 뒤에도 이 찝찝함은 계속 남아 이강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뭐지?’
아들 앞에서는 항상 밝은 척을 하려고 노력하는 그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더 신경이 쓰였다.
‘민수 아저씨한테 전화해볼까?’
슬쩍 옆 부스를 바라봤다.
아직 황지웅은 여자 친구와 러브러브 중이었다.
‘좋았어.’
빠르게 황민수의 폰 번호를 입력했다.
콜렉트콜임에도 불구하고 황민수는 바로 이강진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진이니?
"네, 아저씨. 저예요. 혹시 말인데요. 엄마한테 무슨 일 생겼나요?"
-아, 그게 말이지······.
황민수가 난처함을 드러냈다.
말을 해줄까 말까 고민하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 어머니, 얼마 전에 이혼 도장 찍었다고 하더라.
회귀 이전에도 이강진의 부모는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서로 갈라섰다.
그일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하나 이강진은 무덤덤했다.
오히려 잘됐다. 어렸을 때부터 어린 아이에 불과한 자신과 어머니에게 폭력만 행사하고. 결국 다른 여자랑 살림 차린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계속 고생시킬 바에야 그냥 깔끔하게 이혼을 하는 게 낫다고 예전부터 줄곧 생각했다.
‘이런 미래는 그대로 일어나는 게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