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했더니 입대 전날 49화
제17화. 첫 자대 훈련 (1)
김명찬이라는 첫 전역자를 보낸 뒤.
1분대에도 변화의 바람이 찾아왔다.
가장 큰 변화는 1분대 최고선임이 김명찬에서 전마등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전마등은 김명찬에 비해 군생활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못해도 3개월은 이곳에서 지내야 했다.
그 말인즉슨.
분대장도 당분간 계속 차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망할 놈의 초록 견장은 언제쯤 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전마등은 상병이 꺾일 때쯤에 분대장을 차게 되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분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빨리 이 견장을 준렬이한테 넘겨줘야 하는데."
"아직 전 멀었지 말입니다."
안준렬 상병은 쓴웃음을 지었다.
차기 분대장은 안준렬로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라인혁보다는 그래도 분대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잘 소화하는 건 역시 안준렬이었다.
라인혁은 대신에 부분대장으로서 안준렬을 서포트해줄 예정이다.
안준렬과 라인혁 콤비가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는 덕분에 전마등은 한편으론 마음이 편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한 명 더 믿음직한 후임이 생겼다.
바로 이강진이다.
"강진아."
"이병 이강진."
"네가 김뱀이 쓰던 침대 쓸래?"
"제가 말입니까?"
예상 못한 제안이었다.
김명찬이 사용하는 침대가 1생활관에서 가장 좋다. 창가 쪽 구석이면서 동시에 티비도 가까이에서 잘 보이고.
하나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매트리스가 제일 푹신하다는 점이었다.
이 침대를 노리는 자가 많이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마등은 이강진에게 좀처럼 거머쥘 수 없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른 애들한테 먼저 저 침대 쓸 사람 있냐고 물어봤는데, 아무도 없더라. 다들 자기가 쓰는 침대에 적응해버려서 다른 침대로 옮기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아."
그 부분도 충분히 이해한다.
익숙함이 있어야 편안함이 따라오는 법이다.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공간은 불편함이 따라온다.
아무리 매트리스가 푹신하다고 한들 무엇 하랴. 안락함이 익숙함을 대체할 수는 없다.
"정말로 제가 저 침대 사용해도 괜찮습니까?"
혹시나 해서 다시 묻는 이강진. 괜히 이런 걸로 선임들한테 눈칫밥 얻어먹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재차 물어본 것이다.
이번에는 전마등뿐만 아니라 안준렬도 같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안준렬이 이강진에게 물었다.
"괜히 선임들한테 눈치 보일까 봐 그러는 거지?"
역시. 안준렬은 촉이 좋았다.
"그럴 일 없을 테니까 네가 쓰고 싶으면 써. 싫다면 전마등 병장님이 우호한테 넘길 거라고 하시더라."
백우호는 현재 라인혁과 같이 외곽 근무에 나간 상태다.
군대에선 좋은 기회가 있을 때 그 자리에 없는 게 죄다.
이 기회를 이강진이 놓칠 리가 없다.
"감사합니다. 잘 사용하겠습니다!"
이등병 때 말년병장이 사용하던 침대를 사용하게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 * *
일요일 주말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오전 10시에 종교행사 집합이 시행되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1075 대대의 경우에는 교회와 절이 있지만, 천주교 종교행사를 진행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천주교를 가고 싶어 하는 병사들은 따로 차를 타고 옆 부대까지 나가야 했다.
이런 수고스러움 때문인지 1075 대대는 천주교를 택하는 비율이 가장 낮았다. 정말 절실한 천주교 신자 아니면 웬만하면 기독교, 불교를 택하곤 했다.
가장 픽률이 높은 건 바로 불교다. 가끔 스님이 없을 경우에는 불교 군종병이 대신 종교행사를 진행을 한다. 그때는 소위 ‘불교 나이트’라는 클럽이 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리듬에 몸을 맡기는 일탈의 시간 덕분에 불교가 병사들에게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이강진은 군생활이 끝날 때까지 기독교 종교행사만 참여하기로 했다.
이유는 바로 한지윤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목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피아노 반주가 이어졌다.
한지윤이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는 그녀의 미모만큼 아름다웠다.
이강진은 눈을 살짝 뜨고서 그녀의 자태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서 직접 피아노 연주까지 했었지.’
‘그녀의 선율’이라는 월화드라마에 주연으로 출연했던 한지윤.
당시 시청률이 20%를 넘을 정도로 꽤 괜찮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였다.
한지윤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원래부터 피아노를 잘 다뤘었나 보군.’
배우로 데뷔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피아노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피아노에 대해 문외한인 이강진이 봐도 잘 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1시 반이 되어서야 종교행사가 모두 끝났다.
한지윤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교회 입구에서 병사들에게 초코파이를 일일이 건네줬다.
이강진의 차례가 왔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인생을 살면서 이토록 긴장한 적이 있었던가?
이강진이 기억하기로는 거의 없었다.
그녀의 앞에 처음으로 섰을 때였다.
"어머."
한지윤이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물었다.
"저번에 희율이 아버님 차 타고 계시던 병사 분 맞죠?"
"희율이가 누굽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한지윤은 뒤늦게 ‘미안해요.’라는 말을 하면서 자초지좋을 설명했다.
"김희율이라고, 1중대 행보관님의 딸 이름이에요. 제 친구거든요."
그제야 이강진은 김희율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보다······.
"잠깐 봤을 텐데, 제 얼굴을 어떻게 기억하신 겁니까?"
"호호, 제가 이래봬도 기억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거든요. 대학교에서 발표할 때에도 PPT 자료 한 번 스윽 보고 다 외울 정도예요."
한지윤이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이강진.
예전에 그녀가 모 잡지사와 인터뷰를 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어서 대본도 짧은 시간에 금방 외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피아노도 잘 치지, 기억력도 좋지. 젊었을 때부터 배우로 성공할 요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군.’
그것도 그거지만, 한지윤이 자신을 기억해줬다는 게 더 반가웠다.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한지윤에게 건네받은 초코파이.
그녀의 온기가 담긴 초코파이라서 그런 걸까. 당분간 입에 대지도 못할 거 같았다.
‘취식물 오랫동안 관물대에 짱박아 놓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첫 사랑이 준 초코파이를 바로 먹자니, 그것도 아쉽다.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다.
* * *
중대 ATT 훈련을 앞둔 3월의 3째주 주말.
오늘 이강진은 면회실에서 어머니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때문일까.
1분대 선임들은 아침부터 난리였다.
"인혁아! 구두약 어디 있어? 라이터도 가져와!"
"불광 내게?"
"어. 강진이가 어머니 처음 만난다고 하는데, 전투화 광 확실히 내줘야지."
1중대에는 신병이 면회나 외출, 외박, 신병위로휴가를 나갈 경우에는 이렇게 선임들이 직접 전투화 광을 내주는 관습이 예전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안준렬과 라인혁이 각각 한 짝씩 붙잡고 직접 불광을 내줬다.
20분이 넘는 사투 끝에 모든 게 완성되었다.
선임들의 손길이 닿은 전투화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거울 대신 전투화를 사용해도 될 정도로 반짝반짝했다.
빛나는 전투화를 신은 이강진.
A급 전투화에 A급 전투복까지 갖춰 입은 이강진은 잠시 후, 전마등과 함께 위병소로 향했다.
면회실이 위병소 근처에 있었다.
이미 안에는 그리운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온 가족, 친구, 연인들이 각각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중년의 여인이 보였다.
이강진의 어머니였다.
"엄마!"
"아이고, 강진아!"
언제 불러봐도 그리운 호칭, 엄마.
그의 어머니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이강진을 안아줬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아들, 잘 지내고 있지?"
"물론이죠. 선임들도 다 잘 대해줘요. 아, 소개시켜 드릴게요. 제가 속해 있는 1분대 분대장이세요."
전마등은 이강진의 어머니에게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충성! 병장 전마등이라고 합니다."
"키도 크고 잘 생기셨네!"
"하하, 아닙니다. 그보다 앉으시죠, 어머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저한테 다 말씀하시고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이거, 부대 사람들이랑 같이 나눠먹어요."
이강진의 어머니가 건넨 것은 치킨과 피자였다.
전마등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굳이 준비 안 해 오셔도 됐는데······."
"우리 아들만 먹이기 미안해서 그래요. 많이 사왔으니까 맛있게들 먹어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강진의 어머니 덕분에 1분대원들은 행복한 점심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 * *
전마등이 잠시 자리를 비켜준 사이.
이강진은 어머니를 통해 이혼 사실을 전해 들었다.
"엄마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아들은 군생활에 집중하렴. 알았지?"
"물론이죠. 그리고 저, 그렇게 크게 신경 안 쓰고 있어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 중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맞다, 그리고 보니 민수 씨가 나중에 너 보러 같이 면회 오자고 하시더라. 면회는 또 언제 가능하니?"
"일단 훈련 끝나고 난 다음에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리고 다음 달에는 굳이 안 오셔도 돼요. 어차피 곧 있으면 신병위로휴가 나갈 테니까요."
휴가를 나갈 수 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히 선임들 눈치 보면서 휴가 쓰는 거 아니니?"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신병위로휴가가 가장 파워가 세거든요."
우선순위로 따지면 말년휴가보다 위에 있는 것이 신병위로휴가다.
이런 걸 보면 괜히 ‘이등별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만큼 요즘 이등병은 함부로 대하질 못한다.
물론 일병이 되는 순간, 이 우대도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까부터 이강진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입고 있는 낡은 점퍼. 이것이 원인이었다.
이강진은 말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아줬다.
"엄마. 제가 나가면 옷부터 사드릴게요."
"옷?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 위해서 쓰렴."
"아니에요. 이미 돈은 많이 모아뒀어요."
이강진의 미소는 의미심장했다.
군대에 나가자마자 미리 넣어뒀던 주식들을 전부 처분할 것이다.
그리고 휴가 때 쓸 돈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른 종목에 투자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돈을 불려나갈 것이다.
그런 뒤에 시프코인에 올인한다.
이미 이강진의 미래는 성공이 약속되어 있었다.
"앞으로는 엄마 고생 안 시켜드릴게요. 제가 평생 모시고 살 테니까 이 아들만 믿으세요."
"고마워, 아들."
그의 어머니는 이강진이 자기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나.
이강진의 말은 진심이다.
* * *
면회를 마친 후.
황지웅이 이강진에게 손짓했다.
"강진아. 옷 갈아입고 와. 안 그래도 너하고 우호한테 알려줄 게 많이 있거든."
"예, 알겠습니다."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지 이강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황지웅은 무게를 잡고서 이강진과 백우호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지금부터 중대 ATT가 뭔지 내가 확실하게 알려주도록 하마. 두 번 설명 안 할 테니까 이번 기회에 잘 듣고 다 기억해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종교행사, 면회 등 행복했던 주말 일정도 잠시.
어느 새 자대 첫 훈련이 코앞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