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화. 전투 축구 (2) >
드리블을 하면 빠른 속도로 하프라인을 넘어선 주덕연 일병. 워낙 빨라 수비진이 제대로 그를 쫓을 수가 없었다.
주덕연 한 명만 막아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그를 따라 마인정 상병을 포함해 총 세 명의 병사들이 수비라 인과 골문을 강하게 압박했다.
상대즉 공격수는 4명.
반면, 수비수는 3명에 불과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마인정은 씩 웃었다.
'선취골은 우리 차지다!'
그렇게 확신을 했다.
하지만 이 확신은 머지않아 단 한 명의 수비수로 인해 무너지 고 말았다.
주덕연을 막아선 이강진.
그는 자세를 낮준 채 끝까지 공을 주시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들었을 때.
마침내 이강진이 움직였다.
스윽.
오른발을 슬쩍 내밀었을 뿐이다. 그 동작만으로 이강진은 주 덕연이 사수하던 공을 그대로 가로챘다.
주덕연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가로채기!
'마, 말도 안 돼!'
중대에서 나름 공 좀 차본 주덕연이 이렇게 허무하게 공을 빼앗길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했다.
마인정의 쓴 소리가 바로 날아들었다.
"야! 주덕연! 뭐 하냐! 이등병 따위한테 공이나 뺐기고! 정신 나갔어?"
"그, 그게 아니라……."
한편 공을 가로챈 이강진은 전방을 빠르게 훑었다.
'나가 있는 공격수가 없군.' 패스보다는 이강진이 직접 공을 몰고 가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툭툭 공을 치면서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강진.
공을 차는 폼이 범상치 않았다.
미드필드진이 이강진의 진격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2명이나 달라붙었지만, 이강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을 뒤로 빼는 척하면서 턴을 했다.
하지만 그건 페이크였다.
측면으로 방향을 틀어 빠진 뒤에 두 명을 가볍게 재꼈다.
현란한 발놀림에 상대편 선수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맞은편에서 라인혁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이스, 이강진!"
아직 이강진 쇼는 끝나지 않았다.
혼자서 추가로 수비수 2명을 재꼈다.
이강진에게 찾아온 골 찬스!
골키퍼와 1대 1 상황이 되었을 때.
이강진은 라인혁에게 공을 보냈다.
"라인혁 상병님!"
"어기"
라인혁은 설마 자신이 패스를 받을 줄 몰랐다. 골문이 바로 앞 인데, 그냥 슛을 때려도 무방할 터. 그럼에도 이강진은 라인혁 에게 골 기회를 양보했다.
선임에게 골 찬스를 대놓고 양보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군대식 접대!
선임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경기는 그 순간에 끝나지만, 선임의 뒤끝은 경기가 끝난 이후 에도 한동안 계속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강진은 자신 이 돋보이는 것보다 선임을 돋보이게 만드는 킹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땡큐!"
라인혁의 오른발이 공을 강하게 걷어찼다.
슈우웅!
빠르게 골문을 향해 날아가는 축구공.
라인혁의 슛은 이내 골키퍼를 놓락하고 골망을 흔들었다.
-삐이 으)!
심판을 맡게 된 병사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1 대 0!"
"아싸!"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환호를 하는 라인혁.
그를 중심으로 병사들이 빠르게 다가가 라인혁의 활약상을 추 켜 올렸다.
"역시 라인혁 상병님이십니다!"
"아주 기가 막힌 슈팅이었습니다!"
"저는 챔스 보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가 라인혁을 칭찬했으나, 그는 이 공을 이강진에게 돌렸
"강진이가 패스를 잘 줘서 그래. 나이스 패스였다, 강진아."
"이 병 이강진.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선취골을 가져가게 된 라인혁 팀.
이때부터 마인정은 불안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시작부터 1골을 먹히고 시작한 마인정 팀.
불현 듯 느꼈던 안 좋은 예감은 어느새 현실이 되어버렸다.
1골 먹혔던 게 2골이 되고, 2골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4골로 증식해버렸다.
4대 0.
놀랍게도 이 성적은 최종스코어가 아닌, 전반전 기록이었다.
라인혁이 2골, 최세정 상병이 1골, 그리고 이운준 일병이 1골.
이렇게 3명이 4골을 나란히 넣었다.
골을 기록한 병사들의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어시스트는 한 명으로 동일했다.
이강진.
그의 발끝에서 골 찬스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전반전이 끝난 이후. 라인혁의 팀원들은 이강진의 활약에 기 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강진아. 너, 축구 왜 이렇게 잘하냐?"
이강진은 라인혁의 물음에 웃으면서 답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축구 잘한다고."
"잘해도 이 정도까지 잘할 줄은 몰랐지."
빠른 드리블로 상대 팀의 미드필드진과 수비진을 다 재낀 후 에 선임들에게 슈팅 기회를 만들어줬다.
선임들은 이강진이 패스해주기만을 기다렸다가 공 오면 그냥 슛을 날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다 보니 4대 0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강진의 활약에 가장 놀란 건 고필중이었다.
"혹시 너, 사회에서 선수로 뛴 적 있었어?"
고필중은 체대에 다니면서 각종 스포츠를 섭렵했다. 전문가 의 시선에서 봤을 때, 이강진의 발놀림은 아마추어의 것이 아니 었다.
이강진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동안 감춰왔던 진실을 알렸다.
"사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선수로 뛰었습니다. 우승은 못했 지만, 그래도 시 대회에서 4강 이상은 꾸준히 갔었습니다."
그때 이강진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시 대회 이야기가 나오자, 병사들은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했다.
"아니, 그 정도면 축구 선수 지망해도 되는 거 아니야?"
"실제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정사가 안 좋 기도 했고, 그리고 선수가 되기에는 애매한 재능이라고 판단해서 스스로 관뒀습니다."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군대에서 펼치는 전투 축구에 서는 충분히 여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회귀하기 이전에 이강진은 지금처럼 군생활을 잘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축구 실 력 하나만큼은 A급을 넘어 특급으로 평 가받았다.
축구 하면 이강진!
이 법칙은 회귀한 이후에도 유효했다.
축구 선수 줄신임이 밝혀지게 된 이강진은 수비수에서 자신 의 원래 포지션이었던 공격수로 포지션이 바뀌었다.
덧붙여서 라인혁은 이강진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강진아! 선임들 눈치보지 말고 슈팅 기회 오면 네가 직접 때 려라! 지금은 이기는 게 중요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대편 선임들 무서워할 필요 없어! 여기서 나보다 계급 높은 놈 없다. 내가 다 커버칠 테니까 마음껏 날뛰어봐라!"
라인혁이 직접 뒤를 봐주겠다고 말을 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인혁의 선언과 동시에…….
축구 괴물을 억압하던 계급이라는 이름의 봉인이 풀렸다.
공을 건네받자마자 이강진은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갔 다.
마치 폭주 기관차를 보는 듯했다.
마인정은 자기 팀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 미친 이등병,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 말고 막아라! 무조 건 막아!"
"알겠습니다!"
군대에서 하는 축구가 괜히 전투 축구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위협적인 백태클을 비롯해서 은근슬쩍 팔꿈치로 밀어붙인다 든지 하는 온갖 부정행위가 날아들었다.
축구를 하는 건지, 격투기를 하는 건지. 분간이 잘 안 갈 정도 였다.
하지만 실력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버리면 이런 부정행위조차 제대로 먹혀들지 못한다.
태클이 날아들자 공과 함께 공중으로 뛰어오른 이강진.
화려한 드리블로 수비진을 완전히 따돌렸다.
어떠한 짓을 동원해도 이강진을 말릴 수가 없었다.
골문이 완전히 비었다.
이강진은 오른 발을 뒤로 크게 젖혔다.
빠아앙!!!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축구공이 매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마치 155mm 견인곡사포에서 고폭탄이 발사된 것 같은 엄청 난 박력이었다.
골망이 크게 흔들렸다.
후반전이 시작된 지 채 1분이 안 지났다.
그 사이에 벌써 1골을 먹힌 것이다.
이강진을 막아야 이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인정 은 작전타임을 요청했다.
그리고 포메이션을 긴급 수정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이강진에게 3명의 병사들이 달라붙었 다.
3명에게 이강진을 전담마크 하라고 시켜두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었다.
이강진은 라인혁과 다른 병사들에게 빠르게 신호를 보냈다.
'저한테 공 줄 필요 없습니다. 제가 수비수들 다 몰고 다니면 서 빈 공간 만들어줄 테니, 그것만 공략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이강진의 전략은 잘 통해도 너무 잘 통했다.
이강진을 막는데 대부분의 전력을 소모하게 된 마인정 팀.
그 결과…….
-삐익!
"8대 0! 라인혁 상병님 팀의 승리!"
아주 처참하게 발렸다.
반면, 라인혁 팀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승리를 쟁취하 게 되었다.
마지막 경기를 승리하게 됨으로 인해 라인혁 팀은 7전 4승 3 패를 기록하면서 PX 내기에서 승자를 차지했다.
경기가 끝난 뒤.
고필중은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이병 이강진."
고필중에게 다가간 이강진. 그는 고필중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혹시 그에 관련된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하나 이강진이 걱정하던 것과 다른 반응이 나았다.
"잘했다. 그리고 의심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제가 고필중 일병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저를 의 심했을 겁니다."
"짜식.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워."
1중대에서 가장 축구 실력이 뛰어난 건 이강진이다. 하지만 고필중도 이강진 못지않은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
가끔 포상휴가를 두고 축구 경기에서 고필중과 자주 경쟁했었던 이강진.
그는 이강진의 선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좋은 라이벌이었 다.
그래서일까.
하루라도 빨리 고필중과 같이 공을 차고 싶다는 바람이 문득들었다.
토요일 저녁.
내기 축구에 참가했던 팀원들은 PX에서 단체로 뒤풀이 파티 를 벌였다.
먹고, 마시고, 그리고 즐기고.
좋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이강진은 자신이 좋아하는 냉동식품 하나를 이쑤시개 끝에 꽂 았다.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으려던 찰나에 훼방꾼이 등장했다.
"우리 강진이, 축구 엄청 잘하더라?"
마인정 상병이었다.
"사회에 있을 때 시 대회까지 나갔었다며?"
"예, 그렇습니다."
"오호, 그래?"
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괜히 말을 걸어온 건 아닐 터. 필히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이다.
"강진아. 툭 까놓고 말하마. 다음에 내기 축구 할 때, 내 팀으 로 와라."
스카우트 제의였다.
"솔직히 말해서 인혁이 녀석보다 내가 더 잘해줄 자신 있어. 물론 같은 분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중대 한 식구 아니냐.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다 준비해주마. PX 가고 싶을 때 나한테 말 해!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물론 사주는 것도 나고. 아니면 작업 병 차고 싶어? 너도 알지만 지금 내가 중대 유일의 이발병이잖 아. 후임 뽑아야 하는데, 필요하다면 너 추천해줄 수 있어. 작업 병 알지? 달고 있으면 4박 5일 포상휴가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거."
물론 이강진도 알고 있다.
군종병, 제초병, 이발병, 보일러관리병 등등. 중대에는 작업병 이라 불리는 특수보직이 존재한다.
다른 병사들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되지만, 대신에 마인정 이 말한 대로 정기적으로 포상휴가가 떨어진다.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다.
이강진도 작업병 하나 정도는 가져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발병이라…….'
고민에 빠져들려고 하는 사이에 두 번째 훼방꾼이 등장했다.
"야, 마인정! 내 후임 데려갈 생각 하지 마라. 확 걷어 차버릴 라!"
"치사하게 너 혼자 강진이 독점할 생각이냐?"
"그래, 강진이는 무조건 내 라인이다, 이거야! 강진아, 다른 쪽 에 눈도 돌리지 마라. 알았지?"
"이 새끼 보f라? 그걸 네가 왜 결정해! 강진이가 결정해야지!"
"어쭈? 해보자 이거지?"
"그래! 함 해보자!"
이강진은 졸지에 두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난리가 난 휴게실 안에서 그는 몰래 한숨을 삼켰다.
'너무 인기 있어도 큰일이군.'
군대란 곳은 종잡을 수가 없다.
< 제21화. 전투 축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