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무박 3일 (1)
아무리 군생활을 잘해나가고 있다 하더라도 군대에 있다는 것 자체가 군인들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그나마 이 지긋지긋한 군대에서 유일하게 힐링을 받을 수 있 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종교행사다.
특히 이강진에게는 교회가 아니라 힐링캠프로 여겨졌다.
한지윤의 존재 덕분이었다.
'오늘은 지윤 씨 있겠지?'
그런 기대감으로 교회를 찾은 이강진이었으나.
한지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온통 군복 입은 남정네들뿐이었다.
'이상한데.'
저번 주에도 한지윤은 종교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번 주 까지 포함하면 벌써 2주째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한지윤이 매주 교회를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2주 이상 쉰 적은 없었다.
전화도 몇 번 해봤지만, 그때마다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갑자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종교행사가 끝날 때에 맞춰서 이강진은 목사에게 한지윤의 근 황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니까 분명 뭔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았다.
"강진아. 집합해야지, 뭐하고 있어?"
백우호의 부름이 이강진의 발목을 붙잡았다.
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이강진은 1중대가 모여 있는 곳으 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2주 동안 한지윤의 모습을 못 봐서일까.
'기운이 영 안 나네.'
한지윤의 웃는 얼굴만 봐도 행복할 텐데.
이 행복은 어쩔 수 없이 다음 주로 미뤄야만 했다.
다시 평일이 시작되었다.
열심히 일과 시간을 보낸 병사들. 오전이 지나고 오후 집합 때 소대장이 병력들 앞에 섰다.
"다들 주목!"
"주모!"
병력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소대장은 새로운 전달사항을 이들 에게 전했다.
"2주 뒤에 국지도발 무박 3일 훈련에 돌입한다."
군대 생활은 훈련의 연속이다.
이번 훈련이 끝나면 다음 훈련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다. 또 다음 훈련이 끝나면 그 다음 훈련이 병사들을 찾아온다.
중대 ATT가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무박 3일 훈련이다.
소대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무박 3일 훈련이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는 후임병사들도 많을 거 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다. 3일 동안 우리 중대에 할당된 목진지를 계속 지키고 있으면 된다. 24시간동안."
그래서 '무박'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이다.
소대장의 말을 들은 백우호가 겁에 질린 채 혼잣말을 흘렸다.
"3일이나 자지 말라니…… 가능하긴 한 건가?"
백우호는 소대장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강진이 그 오해를 직접 풀어주기로 했다.
"실제로 3일동안 잠 안 자는 건 아니고. 아마 2교대나 3교대 식으로 해서 24시간 계속 돌리는 형태로 할 거야."
"아, 그래?"
수색대대나 특수부대의 경우에는 실제로 잠을 안자고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일반 보병의 경우에는 경계근무만 주구장창 서 면 된다.
"자세한 건 조금 있다가 황지웅 일병님이나 서일주 이 병 님이 알아서 설명해주실 테니까 그때 들으면 돼."
"오케이, 땡큐."
신교대에서 군대 척척박사라 불리 던 이강진.
아마 이런 식으로 군대에 대해 잘 모르는 동기들한테 계속 설 명 역할을 하다 보니 척척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닐까 싶었이강진의 예상대로 집합이 끝나자마자 황지웅이 이강진과 백 우호에게 무박 3일 훈련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에 이강진이 말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8시간씩 3교대로 목진지에 나가서 근무 서 면 되는데…… 3교 대라고 얕보면 큰 코 다친다. 경계근무 자체가 굉장히 지루하고 힘든 거니까. 뭐, 너희들도 요즘 야간 근무 계속 서고 있으니까 잘 알겠지만."
1시간 근무 서고 오는 것도 굉장히 고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8시간이나 서야 한다고 하니, 백우호에겐 그야말로 청천벽 력 과도 같은 말이었다.
"다른 건 다 좋지만, 사단에서 불시에 순찰을 돌 수도 있으니 까 그거만 조심하면 될 거야."
연대급을 넘어서 이번에는 사단급이다.
괜히 근무 잘못 섰다가 사단 간부에게 털리기라도 하면 큰일 이다.
황지웅이 설명을 마치고 자리를 떴을 때. 백우호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연달아 새어나왔다.
"어째 군대는 편안할 날이 없냐."
"그러니까 군대지."
이강진의 한 마디로 모든 게 다 설명된다.
훈련 일정이 정해지 면, 1~2주 가량은 그 훈련을 받기 위한 준비 기간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가장 바빠지는 사람이 바로 행보관이다.
"병력들 보급품 수량 다 확인하고. 무박 3일 때 불줄되는 식 품들도 재고 다 체크해라. 사단에서 보급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일일이 다 확인하러 나올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목진지 현황판도 새로 만들고. 공병 불러서 페인트칠 좀 제대로 하라고 해. 이 버러지 같은 녀석이 포상휴가만 날름 처먹고. 일도 제대로 안 하는 거 같은데, 한 번만 더 내 눈에 이 런 거 띄면 공병 뗄 각오 하라고 전해둬라."
"알겠습니다."
행정병들은 행보관이 하는 말들을 수첩에 빠르게 적어뒀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보급쪽 만큼은 털려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 를 하는 행보관.
"그리고 필요한 거 있으면 정리해서 나한테 말해라. 시내 나 가서 사오게."
"행보관님. 아스테이지가 다 떨어졌는데, 이거 먼저 부탁드려 도 되겠습니까?"
"복사용지도 부족합니다."
"아스테이지에 복사용지…… 그래, 알았다. 내일 시내 나갈 때 사오 마."
"감사합니다."
회의가 대충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이강진이 행정반을 찾았다.
"충성. 이병 이강진,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이강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행보관은 그를 불렀다.
"강진이, 거기 잠깐 서 있어라. 행정병들은 회의 끝났으니까 이만 나가보고."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만 따로 행보관실로 불렀다.
그에게 전달할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다."
작은 쪽지였다.
그 쪽지 안에는 이강진이 특별히 주시해달라고 부탁했던 종목들의 주가 변동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감사는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회의를 진행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딱딱했던 행보관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네 덕분에 원금 손실 복구도 했고, 여윳돈도 챙길 수 있게 되었고. 죽다가 살아났으니까. 만약 마누라한테 내가 주식으로 얼마 잃었는지 들켰으면, 난 그날 집에서 ?겨났을 게다."
"하하하."
이강진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1중대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자아내는 행보관이라 하 더라도 마누라 앞에서는 힘없는 남편에 불과했다.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MVW 엔터테인먼트도 사셨습니까."
"걱정 마라. 진작 사뒀으니까."
곧 트리니티 스타의 타이틀곡이 역주행 바람을 타게 될 것이다.
MVW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강진은 다시금 한지윤의 이 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행보관한테 한지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무슨 상황인지 알아 봐달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이강진과 한지윤의 사이를 수상하게 보는 박이율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행보관한테도 그런 의심 가득한 시선을 받고 싶진 않았다.
이강진이 한지윤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행보관이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주식을 돈 좀 모은 다음에 부동산에 투자 좀 해볼까 한다."
"부동산 말씀이십니까?"
"어. 괜찮은 찌라시를 들어서 말이야. 네가 나한테 주식 정보 줬으니까, 나도 너한테 찌라시 하나 들려주마. 받기만 하면 좀 그러니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신 뢰도 쌓인다.
행보관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병사라 하더라 도 이런 건 지켜줘야 한다.
"3기 신도시에 관련된 거다. 듣자하니까 발표될 곳 중 하나가 파주 쪽에 있다고 하더라. 마침 그쪽에 괜찮은 땅이 있다고 하 던데…… 돈 있으면 거기 미리 사두는 곳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 이 들더구나."
3기 신도시. 그리고 파주.
비록 부동산은 이강진의 주 종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3기 신도시에 관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행보관님. 그 찌라시는 의심을 좀 더 해보시는 게 좋을 거 같 습니다."
"응? 왜. 이 정보가 틀렸나?"
정답이다.
행보관은 잘못된 정보로 잘못된 투자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강진이 기억하는 한, 3기 신도시 라인업에 파주 쪽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강진의 위치에서 정보가 틀렸다, 맞다를 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근거가 없으니까.
행보관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텐가?
근거가 없으면 신뢰도가 떨어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래가 다르게 흘러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식은 여태껏 정직하게 흘러갔지.'
그렇다면 부동산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강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행보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해보기로 했다.
"저도 휴가 나갔을 때, 거기에 관련된 찌라시를 몇 개 들은 적 이 있습니다. 근데 죄다 달랐습니다. 어디는 부천시라고 하고, 어디는 이번엔 경기권이 아닐 거라고 하고. 정보가 중구난방이 면, 거르는 게 답입니다. 주식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괜히 찌 라시에 마음 흔들려봤자 도움 되는 거 없습니다."
귀가 얇으면, 결과는 대부분 안 좋게 나온다.
부동산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그러다가 행보관 인생이 종 칠 수도 있다.
이강진은 그것에 대한 주의를 주고 싶었다.
고민하기 시작하는 행보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찌라시의 줄처가 어딘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이야 기 들었을 때, 딱 보니까 나한테 안 팔리는 땅 팔아먹으려고 하 는 사기꾼 느낌이 나긴 했어. 그래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장 결정하지 못했던 거고."
"그렇다면 행보관님의 족을 믿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기 껏 주식으로 돈 좀 만졌는데, 그 돈 다 날리게 되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찌라시대로 되면 그냥 아쉽기만 할 뿐. 금전적인 손해는 없다.
그냥 남 좋은 꼴 보고 잠깐 배만 아프면 된다. 그 대가로 거액을 지켜낼 수 있다면, 오히려 그건 손해가 아니라 이득이다.
이것이 이강진의 생각이다.
아니면 차라리 이강진이 3기 신도시가 어느 곳으로 선정될지 미리 말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접어두기로 했다.
남의 인생을 담보로 도박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행보관은 이강진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강진이, 네 말대로 하마."
"잘 생각하셨습니다, 행보관님."
훈훈하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려고 할 때쯤.
갑자기 행보관의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타이밍 참 기가 막히는군. 누구한테 전화 온 거지?"
액정 화면을 확인한 행보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윤이한테서? 얘가 나한테 무슨 일로 전화를 했담."
순간 이강진은 귀를 의심했다.
"지윤이라면 혹시 목사님 딸, 한지윤 양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한지윤 맞다."
설마 한지윤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이럴 때 찾아올 줄 이야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 제22화. 무박 3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