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무박 3일 (3)
차에 올라탔을 때, 병사들은 가만히 멍 때리고 앉아 있기만 하 면 안 된다.
안준렬이 후임들에게 외쳤다.
"총구 밖으로 해놓고. 사주경계 하는 자세 취하면서 이동해라. 그리고 무엇보다 졸지 말고. 사단급 훈련이라는 거 잊지 마. 언제, 어디서 검열관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한테 털리는 것도 무서운데, 사단급으로 털리면 얼마나 괴로울까.
웬만한 공포영화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총구를 밖으로 내민 채 바깥을 바라보는 이강진.
이들이 갈 곳은 3097 진지 근처에 있는 목진지다.
그곳에 가자마자 점령 보고를 해야 한다.
차로 10분을 달린 끝에 3097 진지에 도착한 안준렬 조.
선탑자로 온 행보관이 이강진과 안준렬, 그리고 황지웅을 떨궈준 이후에 말했다.
"사단에서 불시에 근무 잘 서고 있는지 검사 나올지도 모르니 까 조심해라. 그리고 준렬이."
"상병 안준렬."
"P96K 베터리 챙겼냐?"
"예, 챙겼습니다."
"베터리 없으면 나가리 되니까 진지 점령하고 나서 베터리 중 에서 방전된 거 있나 미리 다 체크해 봐라. 없으면 후번근무자 한테 인수인계 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숙지해야 할 사항이 꽤 많았다.
"아마 14시에서 15시 사이에 이곳에 타 사단 포병대대 하나 가 실사격 하러 올 거다. 대대 ATT 받는 중이라고 하니까 그리 알고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고생해라."
"예, 충성!"
드디어 모든 전달사항이 끝났다.
군용차를 타고 사라지는 행보관과 병력들.
안준렬은 군장과 다수의 훈련 물품들이 든 짐을 들고서 이강진과 황지웅에게 말했다.
"가자, 애들아."
"예!"
3097 목진지에 자리를 잡은 세 남자.
이들은 17시까지 이곳에서 계속 근무를 설 예정이다. 다른 거 할 게 없다. 오로지 경계근무밖에 없다.
굉장히 심심한 시간이 이어졌다.
두 사람이 1시간동안 야간 경계 근무 서는 것도 지루한데, 3 명이서 8시간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진지를 점령하고 나서 총기를 거치시킨 뒤.
멍하니 30분을 앉아 있었다.
안준렬은 애초에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니다. 이강진도 마찬가 지.
그나마 황지웅이 입을 좀 터는 스타일이긴 하다. 그 때문일까. 황지웅은 벌써부터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준렬 상병님. 뭐 좀 드시겠습니까? 저희, 이번에 추진해온 것 중에서 제가 추천할 만한 간식거리가 몇 개 있습니다."
"벌써? 너무 빠른 거 아니 냐. 투입된 지 이제 30분밖에 안 됐 잖아. 나중에 먹어."
"……예, 알겠습니다."
괜히 말 몇 마디 붙여보려고 하다가 도리어 잔소리만 듣고 끝 나버렸다.
안준렬은 안 된다. 재미없는 선임은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방향을 선회하기로 했다.
"강진아."
"이병 이강진."
"전마등 병장님한테 들었다. 토요일에 정말로 지윤 씨 만났다 며?"
군대에서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누구든 절로 귀를 기울 이게 된다.
안준렬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지윤은 1075 대대에서 유명인이다.
이강진은 한지윤과 면회실에서 단 둘이 데이트를 한 이후, 대 대 여신님을 혼자서 독점했다면서 한동안 따가운 눈초리를 받 으면서 생활해야 했다.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한지윤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 왔다.
물론 황지웅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천천히 이야기 듣기 좋은 자리가 생겼다. 이곳에 있으면 자그마치 8시간이나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이 기회 가 하루가 아니라 3일이다. 그러면 24시간이다.
"어떻게 된 거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 좀 풀어봐라, 우리 막 내."
"……."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이강진.
이렇게 될 운명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같 은 이야기를 20번, 30번 넘게 대답하려니까 이제는 귀찮아질 지 경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랴.
선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예전에 지윤 씨의 대학교 레포트 조사 도와준 것 때문에 보 답의 의미로 면회 왔던 겁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사실 오디션 합격 때문에 면회를 온 것이다. 그러나 한지윤이 배우가 된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했기에 이강진은 그 이 야기만 쏙 빼놓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레포트? 저번에 그 직업군 만족도 조사인가 뭔가 하는 그거?"
"예. 그거 맞습니다."
"레포트 한 번 도와줬다고 면회까지 와?"
"황지웅 일병님도 아시겠지만, 지윤 씨가워낙 착하지 않습니까. 별 거 아닌 일이라고 해도 지윤 씨 성격이라면 충분히 오고 도 남습니다."
"하긴, 그렇지."
한지윤의 인성에 대해서는 대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럼 둘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예. 아닙니다."
"난 또. 진짜로 사귀는 줄 알았잖아."
일단 안심을 하는 황지웅이 었다.
"황지웅 일병님은 여자 친구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도 막 입대한 이등병이 군대에서 지윤 씨 같은 미인을 여자 친구로 만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왠지 화가 날 거 같아서 말이야."
"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지윤 이야기가 계속 나오면 곤란하다. 이강진의 입만 아프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를 노리기로 한 이강진. 이번에는 안준렬을 타깃으로 삼기로 했다.
"안준렬 상병님은 여자 친구 안 계십니까?"
회귀하기 이전에도 안준렬은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거의 언 급하지 않았다.
항상 베일에 싸여 있는 남자. 그가 바로 안준렬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글쎄다."
굉장히 애매한 대답이었다. 안준렬은 원래 자신의 사생활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였다.
계속 캐물어도 같은 대답만 들려올 거 같았기에 이강진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게 또 다시 심심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 * *
12시 반쯤 되자, 행보관이 다시 이곳 3097 목진지를 찾았다.
"밥 가져가라."
배식이 목적이었다.
황지웅이 바로 반응했다.
"예, 알겠습니다. 강진아, 가자."
"예!"
안준렬이 초소를 지키는 사이, 이강진은 황지웅과 함께 3인분 의 식사거리를 옮겼다.
훈련 한정으로 맛볼 수 있는 먹거리.
전투식량이었다.
행보관이 병사들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다 먹고 깔끔하게 치워둬라. 근처 아무 곳에나 쓰레기 버리 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중대 ATT를 받을 때에는 일반적인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무박 3일은 달랐다.
경계 근무에 나가 있는 병사들에 한해서 이런 식으로 전투식 량이 보급된다.
황지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강진을 바라봤다.
"강진아. 너, 이거 어떻게 먹는지 알아?"
대부분은 모른다.
하지만 이강진은 달랐다.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예. 이렇게 하는 거 아닙니까?"
밥이 담겨 있는 봉지 위에 있는 끈을 팍! 하고 잡아당기는 이강진.
이런 상대로 가만히 놔두면 된다. 그러면 알아서 밥이 완성된 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추가로 이강진은 전투식량을 좀 더 맛있게 먹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밥 안에 볶음김치 넣어서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너무 짜다 싶을 때에는 소시지 넣는 것을 추천합니다. 소시지 소스에 단맛 이 나니까 섞으면 원하는 입맛을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넌 그런 걸 어디서 배웠냐?"
"저보다 군대 먼저 간 친구가 알려줬습니다."
"거 참……."
전투식량 맛있게 먹는 법을 강의하려고 했던 황지웅이었으나, 이강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다.
식사를 마치고 또 다시 지루한 경계근무 시간이 이어졌다. 오후 2시.
저 멀리서 다수의 군용차들이 이곳, 3097 진지를 찾았다.
이강진이 안준렬과 황지웅을 찾았다.
"안준렬 상병님, 황지웅 일병님. 행보관님이 말씀하셨던 그 포 병대대 들어오는 거 같습니다."
"어디."
고개를 돌려 3097 진지 입구를 바라보는 두 남자.
군용 트럭 뒤에 달려 있는 견인포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황지웅이 혼잣말을 흘렸다.
"가만. 저 사이즈면……."
"KH-179. 155mm 견인곡사포입니다."
정답을 스포일러 하는 이강진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어. 아는 척 안 해도 된다, 강진아."
사실은 거짓말이다.
황지웅은 105mm인 줄 알았다. 이강진에게 쓴 소리를 하면서 도 한편으론 말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155mm 견인곡사포를 이렇게 가까이 보는 건 이강진도 처음이었다.
바로 근처에서 포 하나가 방얄되기 시작했다.
군용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포대원들.
"포 방열부터 해!"
"측각수! 방열방위각 뭐야! 빨리 안 부르냐!"
"가신 들 때 조심해라! 저번에 구민호, 그 미친놈처럼 가신에 발등 찍혀서 병원 신세 지지 말고!"
"하나, 둘, 삼!"
"씨발! 발톱부터 꽂아!"
"정신 안 차리 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K-9 같은 자주포와 다르게 견인곡사포는 방열 과정이 굉장히 힘들다.
가신을 벌리고, 포신을 위로 향하게 한 후에 FDC와 협업을 해 편각, 사각을 딴다. 그리고 사수와 부사수가 각각 편각과 사각을 직접 맞춘다.
이 과정까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완료를 해야 한다.
허리까지 오는 두껍고 커다란 철주를 해머로 쿵! 쿵! 쿵! 내려 찍는 포병이 있는가 하면, 쌀가마니보다 더 무거운 포탄을 어깨 에 짊어지고 옮기는 포병도 보였다.
그들을 보면서 황지웅은 혀를 내둘렀다.
"어이쿠. 난리 났네, 난리 났어. 강진아. 우리는 보병 온 걸 감 사하게 생각하자."
"이병 이강진. 예, 알겠습니다."
사실 특별히 감사할 필요까진 없었다.
포병만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병도 보병 나름대로 고중 이 있고, 공병도 공병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결국 자기가 근무했던 부대가 가장 힘든 법.
정신없이 포를 방열하는 포대원들 사이로 한 남자가 목소리 를 높였다.
"얘들아! 조금만 더 힘내자! 이 번에는 하나포가 여섯포보다 더 빨리 방열해야지! 언제까지 뒤쳐질래. 이번에는 힘 좀 내보자.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던 간부가 포대원들을 독려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강진과 안준렬, 황지웅이 지키고 있는 호가 있는 방향이었다.
"너희는…… 가만 있어보자. 19사단이네?"
"충성! 상병 안준렬. 예, 그렇습니다."
안준렬이 대표로 거수경례와 답변을 했다.
"아, 19사단, 지금 국지도발 훈련 중이라고 했었나. 포대장님 이 말씀하신 게 이거였군."
소위도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사전에 들은 게 있는 듯했다.
그가 안준렬에게 물었다.
"네가 최고선임이야?"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우리도 내일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인연이네."
방금 전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소위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전포대장을 맡고 있는 이도훈 소위라고 한다. 훈련 끝날 때 까지 서로 잘 지내보자."
이도훈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강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잠시 후.
이강진의 머리가 번뜩였다.
'설마……!'
이도훈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진 이유가 뭔지 이제 야 깨달았다.
< 제22화. 무박 3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