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1)
신병이 왔다!
이 말 한 마디에 침대와혼연일체가 되어 자던 백우호와 서일 주가 벌떡 일어섰다.
"신병 왔다는 게 정말입니까?!"
황지웅은 신병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등병 둘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임 생겼다니까 그렇게 좋냐? 특히 백우호."
"이병 백우호!"
"좋겠다? 막내 탈출해서."
"예, 그렇습니다!"
그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하지만 백우호와 다르게 이강진의 반응은 기쁨과 거리가 멀 어 보였다.
오히려 걱정이 가득 담긴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전마등은 이강진의 이런 반응이 이상했다.
"강진아. 후임 생겼다는데 안 기뻐? 지웅이 말대로 막내 탈줄 했잖아."
"아닙니다. 기쁩니다. 그런데 황지웅 일병님."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 신병 이름이 어떻게 되는 지까지 알고 있습니까?"
"이름? 이름까지는 확인 못했는데. 알아봐줄까?"
"괜찮습니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어차피 휴가 일정 때문에 전마등과 행정반에 가는 길이었다.
가서 이강진이 직접 확인하면 된다.
신병이 왔다는 말에 1분대 생활관은 온통 죽제 분위기였다.
후임이 늘어날수록 선임 입장에서는 기쁘다. 왜냐하면 가용 할 수 있는 노동력이 늘어난 셈이니까.
그러나 이강진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만약 그 녀석이 맞다면……."
회귀 이전에도 만났던 맞후임.
그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면 오히려 골치 아파지는데.'
제발 다른 사람이 오기를!
이강진은 속으로 몰래 바랐다.
"충성! 병장 전마등 외 1 명,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이강진과 전마등, 두 남자가 행정반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앉아 있는 신병과 빵빵한 의류대였다.
신병은 둘이었다.
'둘 중 한 명이 1분대로 오는 건가. 생각해보니 무박 3일 훈련 이 끝날 때쯤에 그 녀석이 왔었지.'
구체적인 시기는 잘 몰랐다. 자신의 자대 입대일조차 기억 못 하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후임의 자대 입대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후임의 얼굴과 이름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후임도 아니고 맞후임이 니까.
한 명은 조성면, 다른 한 명은 기운상이다.
이중 회귀 이전에 이강진의 후임이었던 사람은 바로…….
'운상이었지.'
기운상. 그가 이강진의 맞후임이었다.
20여년 만에 보는 맞후임의 얼굴에 이강진은 과거의 기억들 이 절로 펼쳐졌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그 파란만장함을 제공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는 기 운상이 었다.
두 신병은 전마등과 이강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추, 충성!"
"충성!"
긴장감이 바짝 묻어 있는 그런 거수경례였다.
전마등은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갈 때가 다 되긴 했나보다. 5월 군번 애들을 다 보고."
안경을 고쳐 쓰던 행정병이 피식 웃었다.
"전마등 병장님, 아직 가시 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6월에 유격 일정 잡힌 거, 아십니까?"
"유격이라고?!"
"예. 6월 중순으로 잡혔습니다. 전마등 병장님은 아마 유격 받고 전역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이 런 망할!"
바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남들은 입대 시기 잘 맞춰서 유격 2번 뛸 거, 1 번 뛰고 전역하 는데. 전마등은 유격 훈련은 얄짤없이 2번 뛰고 가게 생겼다.
키득키득 웃던 행정병이 그제야 전마등에게 행정반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휴가 일정 잡으려고. 강진이하고 같이 나갈까 하는데…… 하, 시발. 유격 이야기 들으니까 갑자기 의욕이 확 떨어지네. 그냥 휴가 모았다가 유격 훈련 갈 때 써버릴까? 그러면 훈련 열외될 수 있지 않을까?"
"연대에서 지침 내려왔습니다. 유격훈련 일자에 전역하는 말 년병장 아니면 예외 없이 훈련 다 뛰게 하라고."
"미친…."
운도 지지리도 없다.
정말로, 아주 정말로 천운이 따른다면, 어쩌면 혹한기도 1번 만 받고 전역할 수 있는 군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유격 끝나자마자 들어오는 신병들이 아마 그런 황금군번이 될 수 있을 터.
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부럽진 않다.
유격 한 번에 혹한기 한 번 뛸지 모르는 신병이 될래, 아니면 유격 2번 뛰는 말년병장이 될래. 이렇게 묻는다면 거의 99.9퍼 센트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나저나 행보관님 어디 계시냐?"
휴가 상담을 하려던 찰나에 행보관실이 열렸다.
행보관은 전마등을 보자마자 말했다.
"마등이, 마침 잘 됐다. 안 그래도 1분대에 신병 한 명 주려고 했는데. 와서 누구 데려갈지 골라봐라."
"예, 알겠습니다."
전마등은 조성면과 기운상을 번갈아 바라봤다.
"두 사람 다 일어나 봐라."
"예,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전마등의 고개가 위로, 계속 위로 향했다.
기운상의 키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우와…… 너, 키가 몇이냐?"
"이병 기운상! 190cm입니다!"
"190?! 사회에서 농구하다 왔냐?"
"평범하게 대학 다니다가 왔습니다. 대신, 농구 대회 같은 건 자주 나갔습니다."
"오호라."
전마등의 눈이 반짝였다.
군대에서 축구와 족구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그렇지, 농구도 나름 중요 구기 종목 중 하나다.
특히 중대, 대대 단위로 행해지는 체육대회를 고려한다면, 무 조건 기운상을 데리고 와야 한다. 1분대가 축구 라인업은 괜찮 지만, 농구 라인업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운상이가 좋아 보이는데. 강진아, 너는 어떠냐?"
"저 말입니까?"
"우리들 중에서 너하고 여기 신병들이 가장 오랫동안 얼굴 볼 거잖아. 어차피 나야 얼마 안 있으면 전역이니까. 네 의견도 고 려해주려고."
"제가 만약 다른 신병을 고르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다른 애 뽑아야지."
이강진의 의견을 상당히 많이 반영하겠다는 뜻이었다.
이건 기회다. 기운상을 버릴 수 있는 기회!
'어쩌 면 두 번 다시없을 찬스야.'
조성면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조성면은 빠릿빠릿하고 눈치도 좋으며 센스도 있는 편이었다. 선임들에게 A급 평가 를 받는 그런 우수한 카드다.
반면 기운상은 조성면에 비해 상대적으로 밀리는 게 많았다.
고집이 세고 실수도 자주 연발하는 타입이다. 물론 나중에 가 면 많이 나아지긴 하지만, 기운상이 군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 이강진이 많이 고생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운상에게는 크나큰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그 특이점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
이강진 앞에 놓인 두 개의 길.
한 길은 너무 편하다. 잘 포장되어 있는 아스팔트 도로라고 친 다면, 다른 한 길은 가시밭길이다.
고민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터.
"저는……."
조성면을 가리키려고 했던 이강진의 손은……. 결국 기운상에게 향했다.
"전마등 병장님 말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잘 선택했어."
정말로 잘 선택한 걸까.
사실 이강진은 기운상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정이라는 게 뭔지.'
옛정이 이강진에게 이런 결정을 강요했다.
오를 낌새가 보이지 않는 주식은 빠르게 손절하는 게 답이다.
하지만 이강진은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향세를 달리는 주식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오를지 모르니 까.
'이번에는 잘 좀 해보자, 운상아.'
* * *
6월 초로 휴가 일정을 대충 잡아놓게 된 전마등과 이강진.
"난 화장실 좀 들렸다가 가마. 먼저 신병하고 가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전마등을 제외하고 두 사람만 따로 1생활관으로 향했다.
"신병 왔구나!"
"와…… 키 큰 거 보더라. 전봇대가 들어오는 줄 알았네."
1분대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 라인혁이었다. 그의 키가 181cm였다. 그런 라인혁보다 9cm나 더 크니, 전봇대라는 표현 이 절로 나왔다.
황지웅은 기운상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분대에 운상이가 들어오면 딱 좋겠거니 생각했는데. 역 시 내 예상이 맞았군. 우리 막내, 농구는 잘하지?"
"이병 기운상! 엄청 잘한다고는 말 못하지만, 열심히 해보겠 습니다!"
"좋아, 의욕이 넘치네. 그럼 두 번째 질문."
신병이 들어오면 나오는 고정적인 질문이 있다.
"누나나 여동생은 없냐?"
바로 이거다.
여자에 굶주리다보니 이성에 관한 질문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기운상은 대답을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누나가 한 명 있습니다."
"누나? 사진 보여줄 수 있어?"
"아, 알겠습니다!"
입대를 할 때, 가족사진은 거의 대부분 가져온다.
조심스럽게 가족사진을 꺼내는 기운상.
사진에는 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성과 기운상, 그 리고 젊은 여인이 활짝 웃은 채 앉아 있었다.
황지웅의 어깨 너머로 사진을 훔쳐본 백우호가 눈을 반짝였
"오, 누나가 미인이시네! 몇 살이셔?"
"올해로 27입니다."
"키 엄청 커 보이는데. 설마 누님 키도 190대야?"
"아닙니다."
기운상의 말에 희망을 가져보는 군인들. 하지만 이내 그 희망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189cm 입니다!"
아무리 미인이어도 키 차이가 너무 나면, 남자로서 말 못할 패배감이 든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던 서일주가 이상한 듯 물었다.
"아버님은 사진 같이 안 찍었어?"
"그게……."
말끝을 흐리는 기운상.
순간 이강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기운상에게 '아버지' 이야기는 금기나 다를 바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졌음을 느낀 백우호와 서일주, 그리고 황지 웅은 속으로 각자 생각했다.
'혹시 돌아가신 건가?'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런가?'
'일주, 저 녀석이! 신병의 아픈 상처는 왜 건드리고 지랄이야!'
그러나 이강진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아니다.
그의 아버지가 특별해서였다.
공기가 무거워진 것을 깨달은 기운상이 억지로 말을 이었다.
"실은 제 아버지가
그의 말은 도중에 난입해온 중대장에 의해 끊기고 말았다.
"시, 신병 어디 있어!"
"이병 기운상!"
손을 번쩍 들면서 관등성명을 말했다. 중대장의 얼굴은 사색 이 되었다.
"화,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행정반으로 와 보더라! 지금 당장!"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일까.
서일주가 기운상에게 눈을 흘겼다.
"신 병. 너, 오자마자 사고 친 거 아니 냐?"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 뭐, 알았다. 일단 중대장님이 찾으시니까 빨리 가 봐.
우호야. 네가 같이 가줘라."
"예, 알겠습니다. 가자, 운상아."
백우호가 기운상과 함께 행정반으로 향하고 난 뒤.
황지웅이 서일주에게 잔소리를 늘어놨다.
"야, 서일주 이 미친놈아. 신병 아버지 돌아가신 거 같은데, 그 걸 굳이 꼭 건드려서 물어봤어야 했냐? 저러다가 신병이 탈영 생각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어휴! 이 녀석. 이번 달에 진급시험도 보는 녀석이……. 쯧쯧! 너 같은 놈들 때문에라도 진급시험에 눈치 항목도 넣어둬야 하 는데."
눈치항목 추가니 뭐니 하는 그게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이강진이 사실을 블4히기로 결심했다.
"운상이 아버지, 멀쩡히 살아계십니다."
"엥?"
"그게 정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아버지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그런 겁니다. 행정반에 갔을 때 행보관님하고 상담하는 걸 우연히 들었 습니다."
전마등이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이강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이는 없었다.
아무리 피가 이어진 가족이라도 사이가 안 좋을 수 있다. 이강진도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기운상의 부자지간과 이강진의 부자지간은 엄연히 달 랐다.
"아버지가 너무 지나치게 운상이에게 간섭을 해서 그런지 운 상이가 아버지를 많이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 닙니다.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기운상이 지니고 있는 특급 비밀.
어차피 이강진이 말 안 해도 바로 밝혀질 거, 미리 이들에게 만 스포일러를 하기로 했다.
"운상이네 아버지, 투 스타이십니다."
< 제23화. 이등별님 오셨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