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화. 두 번째 휴가 (2) >
제24화. 두 번째 휴가 (2)
노란색 셔츠에 밝은 파스텔 톤의 청바지, 그리고 흰색 운동화 를 착용한 채 전신거울 앞에 선 이강진.
"어때요?"
여성 점원의 물음에 이강진은 약간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산뜻하네요. 근데 이런 계통의 옷들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좀 부끄럽기도 하고요."
"어머머! 손님, 너무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마세요. 패션의 가장 첫 걸음이 뭔지 아세요? 바로 자신감이에요, 자신감! 자기가 뚱뚱하다고, 못생겼다고, 키가 작다고 너무 비하할 필요 없 어요.
신체 조건이 엉망이어도 옷만 잘 입으면 절반은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보기엔 이 정도가 딱 괜찮은 거 같아요. 너무 과하지도 않고, 너무 칙칙하지도 않고. 그리고 요즘은 밝은 계 열의 옷이 여성들에게 어필하기 딱 좋아요."
"그렇군요."
주식, 그리고 군대에선 척척박사라 불리는 이강진이었지만, 패션 센스는 영 별로다.
게다가 이강진은 사실 20대 청년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20대 지만, 회귀하기 이전에는 아재 중에서도 아재였다. 그러다보니 젊은 감각이라는 게 많이 떨어져 있었다.
여성 점원이 심혈을 기울여준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그리고 사실 이 옷이 좋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적어도 군복보다는 나으니까.'
아마 매장에 걸려 있는 그 어떠한 옷을 가져오더라도 같을 것 이다.
오후 1시 정각에 만난 이강진과 한지윤.
처음 보자마자 한지윤은 놀라움을 드러냈다.
"강진 씨. 그 옷, 새로 사신 거예요?"
"네. 요 근처 옷가게에서요."
한지윤은 이강진의 사복 차림을 처음 봤다. 매번 군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사복 차림의 이강진을 보게 되니 딴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 어울리시는 거 같아요."
"그, 그래요?"
이강진은 속으로 여성 점원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 오로지 한지윤 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된다.
이 목적은 일단 달성되었다.
"자, 가요. 강진 씨. 제가 가게 예약해뒀어요."
"예, 그러죠."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걸었다.
그 와중에 이강진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두 남자를 주시했 다.
둘 다 이강진처럼 사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이강진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들, 군인이군.'
그들도 이강진을 보더니 군인임을 바로 눈치 챈 낌새를 보였다.
아무리 사복을 입고 있어도 군인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밖에 없다.
그 특유의 아우라, 그리고 행동이나 어투 등. 아무리 숨기려 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그런 요소들이 있다.
사복을 입은 두 군인을 지나치자, 좁은 길이 연달아 이어졌다.
자연스레 이강진과 한지윤의 거리가 좁혀졌다.
살짝 손이 닿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
이강진이 먼저 용기를 내볼까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야.'
군대에서 종교행사로 자주 만나긴 했지만, 둘이서 사적으로 만난 적은 이번이 두 번째다. 사귀기로 한 사이도 아닌데 멋대 로 손을 잡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파렴치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도 있었다.
천천히 사이를 좁혀 가면 된다. 남은 군생활처럼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가게에서 끼니를 해결한 후에 영화를 관람했다.
이 과정에서 이강진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한지윤의 새 로운 취향에 대해 알게 되었다.
"히어로 장르를 굉장히 좋아하시나 보군요."
"네! 멋있잖아요? 특히 전 아연맨이 가장 좋아요. 하늘도 자유 자재로 날아다니고, 손에서 빔도 나오고. 슈트 색깔도 예쁘잖아 요. 강진 씨는 어때요?"
"저도 좋아합니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로 돈 모아서 액션 피겨 도 질렀었죠."
"어머, 정말요? 취향이 딱 맞네요!"
공통적인 화제가 있다는 건 참 좋다. 대화가 끊이질 않고 계 속 이어진다는 뜻이 니까.
영화 관람을 마친 후에 카페에서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기 로 했다.
늦은 저 녁때까지 한지윤과 함께 하고 싶었지 만, 차 시간도 있었기에 차마 그때까진 있을 수 없었다.
카페에 들어선 두 사람.
군인들이 굉장히 많이 보였다.
북적이는 카페 안을 빠르게 훑은 한지윤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에 빈자리 있어요. 저쪽으로 가요."
유일하게 남은 빈자리였다.
군인들 사이를 누비면서 겨우 안쪽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 한 이강진.
군복이 담긴 종이백을 내려놓으면서 의자를 뒤로 빼려고 할 때였다.
툭
"뒤에 있는 사람의 의자에 살짝 닿았다.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상대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어투로 반응했다.
순간 이강진의 모든 사고방식이 정지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설마……!'
대한민국에 이런 말이 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이번에는 이강진을 잡았다.
맞은편에 있던 한지윤이 방금 전에 이강진의 사과를 받아준 남자를 보면서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등 씨 아니에요?"
"엥? 지윤 씨?!"
하필이면 전마등의 옆자리에 앉을 줄이야!
"지윤 씨가 여긴 어쩐 일입니까? 뒤에 분은 남자친구인가요?"
이강진은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그러고서 한지윤과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거, 말하면 안 됩 니다!'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지윤은 이강진의 뜻을 바로 캐치했다.
"가, 같은 학과 친구에요."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깐 이강진.
"어흠! 아, 안녕하세요."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각도를 잘 조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서 로 등지고 있는 위치였기에 얼굴이 쉽게 노줄되는 일은 없었다.
한지윤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마등 씨 볼 일 보세요. 저희는 레포트 이야기 좀 해야 해서
"알겠습니다. 아, 강진이한테는 오늘 일, 못 본척 하고 있을게 찡긋.
의미심장한 윙크를 날리는 전마등이었다.
그의 모습에 한지윤은 인위적인 웃음을 흘렸다.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이강진은 한지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오늘 지윤 씨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저야말로요. 그리고 고마워요. 강진 씨한테는 금 같은 휴가 시간일 텐데, 저한테 할당해줘서요."
"휴가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올 수 있습니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저는 지윤 씨랑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즐겁거든 요. 그러니까……."
비록 손잡을 용기를 내진 못했지만.
"다음에도 또 볼 수 있을까요?"
이 정도 용기는 충분히 낼 수 있었다.
한지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물론이죠! 다음번에는 제가 청주로 내려갈게요. 여기 근처는 강진 씨한테 위험할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고맙죠. 그럼 구체적인 이 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네,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언제나 군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주는 여인, 한지윤.
지금 이 순간, 이강진은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입대도 나쁘지 않네.'
하지만 이내 미친 생각임을 깨닫고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이번 휴가의 가장 큰 목적이 하나 있다.
바로 이사다.
장이 열렸을 때, 이강진은 매도할 건 매도하고, 매수할 건 매 수하면서 추가 투자와 목돈 마련을 동시에 마쳤다.
그날 저녁. 이강진은 그의 어머니에게 이사에 관련된 말을 꺼 냈다.
주식으로 이사비용을 확보해뒀으니, 내일부터 집을 보러 다 니자고.
안 그래도 이강진의 어머니는 황민수를 통해서 아들이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이 사실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이강진이 눈여겨보고 있던 집이 몇 개 있었다.
"청주고 근처에 단독주택들 모여 있는 곳 있죠? 거기로 이사 갈까 하는데 어때요? 거기면 식당하고 거리도 가깝고. 걸어서 출퇴근 하는데 문제없을 거예요. 그리고 엄마, 예쁜 2층짜리 단 독주택에서 사는 게 꿈이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나야 좋지만…… 정말 그만한 돈은 있는 거니?"
"물론이죠. 3일 뒤에 돈 들어오니까 그때 직접 확인시켜드릴 게요. 어머니는 가만히 계시면 돼요. 나머지는 아들이 다 알아 서 해결할 테니까요."
어느 순간 듬직해진 아들을 보면서 그의 어머니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강진은 어머니와 함께 근처 부동산을 찾았다.
30대로 추정되는 젊은 공인중개사가 이강진 모자에게 여러 군데의 집을 소개시켜줬다.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기 시작하는 이강진.
"주차 공간이 넓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집은 없나요?"
"아, 차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요. 곧 살 거예요. 근데 비싼 걸로 살 예정이라서 기왕이 면 주차 공간이 넉넉한 집이면 좋을 거 같아요. 턱이 높지 않은 곳이라면 더더욱 좋고요."
스포츠카를 샀을 때의 경우까지 생각해서 일부러 턱이 낮은 곳을 골라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마침 적당한 집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시죠."
바로 근처였다.
외관이 굉장히 깔끔한 그런 집이었다. 내부도 깨끗하고. 이전 집주인이 잘 관리를 해서 그런지 첫 인상부터 청결하다는 느낌 이 강하게 들었다.
한동안 집을 계속 살피던 이강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봤던 곳 중에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근데 한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뭐죠?"
"이곳이 다른 곳에 비해서 확실히 매매가가 셉니다. 그게 단 점이죠. 3억 조금 넘어갈 겁니다."
인테리어 공사에 이사 비용까지 모두 고려하면 넉 넉잡아 3억 5천 정도는 잡아둬야 한다.
"흠, 그래요?"
고민하는 이강진. 중개사는 그가 가격 때문에 고민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이곳 마음에 들어요?"
2층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곳들에 비하면 가장 나은 거 같구나. 근데 그만큼 비싸지 않겠니?"
"아니요, 오히 려 싸대요."
"그러니?"
"네."
반대로 말해버린 이강진은 중개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쉿'이 라고 하면서 모른 척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난 뒤.
"계약하죠.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진 않네요."
이강진의 대답은 중개사의 걱정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휴가 첫 날, 옷가게 점원에게 말했을 때에도 이와 비슷했다.
마음에 들면, 그냥 사면된다.
이강진은 이미 그런 재력을 갖추고 있다.
계약을 했다고 바로 이사할 수는 없다.
들어가기 전에 인테리어 공사와 청소 등을 해야 한다.
이강진이 계속 어머니 곁에 있다면 이런 일들을 도맡아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강진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멀리 나갈 필요 없다. 이미 가까운 곳에 믿을 만한 사람이 있 으니까.
"안녕하세요."
바라 식당을 찾은 이강진은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황민수를 찾아왔다.
"아저씨. 바쁘세요?"
"강진이 왔냐. 딱 봐도 안 바빠 보이는 거 알잖아."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불청객인 날파리들만 날리고 있는 상화애초에 장사가 엄청 잘 되는 곳은 아니었다. 찾아오는 손님만 찾아오는 곳이었기에 점심, 저녁 시간대가 아니면 대부분 지금 처럼 한가하다.
"아저씨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인데? 너하고 나 사이면 보증도 서줄 수 있으니까 어디 말해봐라."
"그런 건 아니에요."
이강진이 없는 동안 인테리어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그리고 이사 준비 같은 것도 어머니와 함께 해줄 수 있을지 부탁을 하기 위해 왔다.
황민수는 이강진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왜 부탁해. 네가 말 안 해도 그 러려고 했다. 미영 씨 혼자서 고생시킬 수는 없으니까."
오히려 황민수에겐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이강진의 어머니에게 확실하게 점수를 따둘 수 있는 기회.
호쾌하게 웃는 황민수를 보면서 이강진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황민수는 누군가를 속이고 뒤통수 때리는 그런 사람 은 아니다. 오히려 황민수는 그 반대 체질이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인 남자.
'두 분 다 결국은 내 손이 갈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좋다.
이들과 계속 함께 할 수만 있다면.
< 제24화. 두 번째 휴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