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5화. 유격 훈련 (3) >
제25화. 유격 훈련 (3)
유격장이라고 해봤자 엄청 대단한 시설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몇 개의 장애물 코스가 눈에 띄일 뿐.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커다란 연병장이었다.
1075 대대 연병장보다도 더 커 보이는 연병장이 가장 먼저 병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임급 병사들은 유격장의 연병장을 보면서 울상을 지었다.
저곳에서 작년에 지옥을 맛봤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지옥을 이 번에 또 체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게 참 절 망적 이었다.
반면, 후임급 병사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와, 우리 대대보다 연병장이 크네?'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물론 이강진을 제외하고 말이다.
'봐도 봐도 좆같은 곳이네.'
이강진은 이번이 3번째 유격이다. 아주 독보적인 이력을 가지 고 있는 이강진은 오랜만에 탈영하고 싶다는 본능이 들었다.
연병장을 지나쳐 4박 5일 동안 머무를 장소로 향하는 이들.
유격장에는 막사 건물 같은 편의 시설이 없다. 야외 숙영을 하 는 것처럼 각 분대별로 텐트를 설치하고 자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텐트는 미리 설치되어 있었다.
행군에서 열외 된 병 력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이 행보관과 함 께 선발대로서 먼저 차를 타고 와서 다른 병사들이 행군을 할 때 그들을 대신해 텐트를 미리 설치해뒀다.
덕분에 오자마자 텐트를 쳐야 하는 수고스러움은 없어 지게 되 었다.
확성기를 든 행보관이 병력들을 향해 외쳤다.
"총기부터 먼저 총기보관함에 넣어둬라! 그 다음에 군장 넣어 두고 좀 쉬었다가 식사 집합해라!"
"예, 알겠습니 다!"
병사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한 명씩 줄을 서서 총기보관함에 자신의 총을 넣어뒀다.
무거운 완전군장은 텐트 안에 슈웅! 던져뒀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완전군장.
전마등은 완전군장 중 하나를 배게 대용으로 삼아 누웠다.
"아…… 지친다, 지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네."
"고생하셨습니다, 전마등 병장님."
이강진은 전마등의 좋아리 부분을 직접 주물러줬다. 말년에 유격을 뛴다는 게 얼마나 억울한지. 이강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훈련 종류는 달랐지만, 그도 말년에 혹한기를 뛴 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말년휴가로 빼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번 유 격 훈련처럼 말년이고 뭐고 열외 없이 무조건 훈련 뛰라는 대대장의 엄명에 따라 이강진은 혹한의 추위 속에서 말년을 보냈다.
반대로 전마등은 찜통 속에서 말년을 보내게 생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질감이 생긴 것이다.
"아구구…… 우리 강진이, 마사지도 잘하네."
"제가 예전에 마사지샵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습니다."
"넌 대체 못해본 아르바이트가 뭐냐?"
"웬만한 건 다 해본 거 같습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과 축구 실력, 그리고 군대 경험까지 더해지니 A급을 넘어 트리플 S를 받아도 모자랄 만큼 뛰어난 인 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러니 선임들이 이강진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간부들도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강진아. 아까 준렬이 표정 봤냐?"
"못 봤습니다."
"그 녀석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특히 눈빛. 마치 먹이를 노리 는 매의 눈빛이었어. 그 융통성 없고 꽉 막힌 자식, 우리라고 봐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더라. 오히려 더 지지고 볶고 하겠지. 어휴!"
"안준렬 상병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 같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FM 스타일이다. 같은 분대원이라고 해도 조교와 교육생 관계인 이상, 절차대로 행동할 것이다.
그게 FM이니까.
바깥에서 황지웅이 이강진과 전마등을 찾았다.
"식사 집합하시랍니다."
"오냐. 가야지, 가."
텐트가 설치되어 있는 곳 옆에 작은 공터가 있다. 앞으로 유 격장 아침 점호라든지 저녁 점호, 기타 집합 등은 이곳에서 행 해질 예정이었다.
중대장이 지친 표정으로 이들 앞에 섰다.
"뒤쪽 좁으니까 최대한 앞으로 밀착해라. 밀착."
"앞으로 밀착!"
가까이만 가도 서로의 땀 냄새가 진동을 했다.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건 샤워였다.
그전에 밥부터 먹어야 한다.
"1 분대부터 먼저 나와서 배식 받도록 한다. 밥 먹고 난 뒤에 는 20시까지 샤워 및 세면세족 하고 21시부터 저녁 점호를 시 작하겠다. 30분 일찍 자게 해줄 테니까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푹 쉬어둬라. 그리고 근무자 편성 꼭 확인해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야외 훈련을 할 때에는 밥 메뉴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버려 두는 게 좋다.
유독 훈련 도중에 나오는 밥은 맛이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있다.
"강진아."
황지웅이 이강진을 불렀다.
그는 조용히 무언가를 이강진에게 건넸다.
"맛다시다. 우호 불러서 반절씩 나눠서 먹어. 나는 운상이하고 나눠서 먹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미리 추진을 해온 것이다.
맛)(시만 있으면 된다. 여기에 참치까지 섞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유격 첫 날에 추진해온 것들을 너무 소모해버리 면 안 된다. 유격장에서 4박 5일을 버텨야 하는데, 첫 날부터 달리면 큰일이지 않은가.
이강진은 백우호를 몰래 불렀다. 그리고 백우호의 밥 위에 맛 X시를 얹어줬다.
"그나마 먹을 만해졌네."
"다른 사람들한테 안 들키게 조심하면서 먹어."
특히 간부들한테 걸리면 안 된다. 물론 간부들도 병사들이 추 진을 해왔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간부들이 안다고 해서 유격 장에서 대놓고 추진한 것들을 먹는 모습을 보이면 잔소리를 듣 는다.
이런 건 그냥 서로 모른 척하면서 넘어가주는 게 좋다.
밥을 먹었으니, 이제 샤워를 할 차례다.
하나 큰 문제가 있었다.
백우호, 그리고 기운상과 함께 샤워장을 찾은 이강진.
샤워장을 본 순간, 백우호와 기운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기가…"
"……샤워장 맞습니까?"
이런 말을 할 법도 했다.
천장에 분무기 같은 것들이 여러 개 보였다.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진한 붉은색의 대야도 눈에 띄었다.
그 이상은?
없다. 이게 끝이다.
바닥은 타일도 아니고 콘트리트다. 샤워장이라고 하기에는 한 없이 부족한 시설이었다.
이곳에 알몸 차림으로 들어가 위에서 나오는 물을 맞으면서 샤워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부족했다.
"나, 이거 비슷한 거 본 적 있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백우호.
"예전에 무슨 전쟁 영화에서 포로들이 이렇게 샤워하는 장면 이 있더라."
포로. 넓은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도 국방부의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노예든가.
둘 다 좋은 의미는 아니다.
이강진이 먼저 앞장서며 말했다.
"샤워장 맞으니까 샤워나 하러 가자. 사람들 더 붐비기 전에 후딱 하고 나와야지, 안 그러면 서로 몸 부대끼 면서 해야 한다."
남자끼리 알몸으로 몸을 부딪쳐야 하다니!
백우호와 기운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 싶진 않다!
두 남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샤워실이며 화장실이며 어느 것 하나 편한 게 없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4박 5일이나 버텨야 하다니.
'인생 참 뭐 같네.'
억지로 욕지거리를 삼키는 이강진이었다.
* * *
유격장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 해.
유격복으로 갈아입은 병사들 앞에 선 중대장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간밤에 잠은 잘 잤나!"
"예!"
신기하게도 잠은 잘 잤다. 너무 피곤해서 눕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진 것이다.
"환자는 거수하도록."
전마등과 박이율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중대장은 피식 웃었다.
"누가 동기 아니랄까 봐 어떻게 동시에 손을 드냐. 이제 말년 다 되간다고 벌써부터 뺑끼치려는 거, 중대장이 모를 줄 아냐?"
이곳 유격장에선 꾀병이 통하지 않는다.
중대장이 직접 아침 점호를 실시했다.
애국가 제창, 국군도수체조 등.
부대에서 하던 평범한 아침점호 순서들이었다.
물론…….
구보도 빠질 수 없다.
"전체 상의 탈의한다, 실시!"
"실시!"
여름이어도 이른 새벽 아침에는 굉장히 춥다.
옷을 벗자마자 벌써부터 한기가 몰려들었다.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깔깔이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상의를 탈의한 중대장은 스스로 인솔자 위치에 섰다.
소대장이 놀라 물었다.
"중대장님이 인솔하시는 겁니까? 제가 병력들 인솔하겠습니다."
"다른 부대도 다 중대장이 직접 인솔자 역할 하면서 뛰려고 하는데, 나 혼자만 소대장 보내면 체면이 안 서잖아."
중대간의 기싸움이다.
중대의 넘버원인 1중대장이 이 기싸움을 피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이건 1중대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전체~ 뛰어!"
"엇!"
"가!"
유격장 구보는 난이도가 제법 있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경사진 곳이 굉장히 많다. 작은 언덕만 8개 를 넘어야만 했다.
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숨이 턱 밑까 지 차올랐다. 그 와중에 중대장은 새로운 시련을 병사들에게 부 여했다.
"이동 중에 군가한다! 군가는 죄후의 5분! 군가 시작, 하나 둘 셋 넷!"
"숨 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구보에서 군가가 빠질 수 없다.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아니 면 악을 쓰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 도로 외쳐대는 병사들.
그렇게 유격장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다시 텐트로 복귀할 수 있었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대(大) 자로 뻗어버린 전마등.
이강진이 그를 찾았다.
"전마등 병장님, 식사 하십니까?"
"안 해. 우유 하나만 챙겨줘라. 건플레이크 먹을 거니까."
이강진이 신병교육대에 있을 때 만들어 먹었던 바로 그 먹거 리다.
아침은 건플레이크만한 게 없다. 이것이 전마등의 신념이었 다.
각자 아침을 든든하게 해결한 뒤.
오와 열을 맞준다음에 연병장으로 향했다.
연병장에는 이미 조교들이 일렬로 선 채 병사들을…… 아니, 교 육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존재가 있었다.
다른 조교들과 달리 검은색 상의와 모자를 쓴 남자.
그가 바로 유격 교관이다.
"전체 주목!"
"주모!"
"목소리 봐라! 지금 캠핑 왔나! 다시 대답한다, 주목!"
"주모오오!"
그제야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유격 교 관.
"교육 기간 동안 교육생들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사항이 있 다. 우선 첫 번째."
일부러 뜸을 잠시 들인 교관.
교육생들을 쭉 훑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대답은 '악!'으로 통일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 다!"
"어쭈? 이것 봐라! 방금 교관이 뭐라고 했나! 정신 똑바로 안 차려!"
교관이 말한 '악' 구호는 유격 훈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무 조건 대답은 악으로 고정. 이 수칙을 어기는 즉시 무시무시한 처 벌이 가해질 것이다.
"다음, 교육생들의 관등성명에 관해서다. 본 조교가 아까부터 말하고 있다시피 관등성 명은 ' XXX번 교육생'으로 통일한다. 다 들 신교대 나왔으니까 어떤 식으로 관등성명을 대야 할지 잘 알 거다."
말을 하던 도중.
갑자기 교관이 앞에 있던 기운상을 지목했다.
"거기, 너."
"이병 기운상!"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교육생들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방금 교관이 뭐라고 했는지 까먹었나? 엎드려 ?뻗혀!"
"아, 알겠습니 다!"
"대답 보너라! 악으로 통일하라고 했잖아, 악으로! 악!"
"아아악!"
이래서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다.
< 제25화. 유격 훈련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