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했더니 입대 전날-87화 (87/347)

제25화. 유격 훈련 (8)

PT체조라든지 이 런 것들은 그래도 반복하면 어느 정도 익숙 해지는 단계까진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화생방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맡아도 영 적응이 안 되는 CS 연기.

CS탄을 얼마나 많이 터트렸는지, 정화통을 분리하자마자 수 백 개의 바늘이 눈과 코, 입, 목, 그리고 얼굴 전체를 콕콕 찌르 는 것 같은 통증이 바로 밀려왔다.

화생방 교관은 기침을 연달아 내뱉는 교육생들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팔 벌려 뛰기 10회 한다. 몇 회?"

"10 히……!"

"11 히, 시작!"

어떻게 해서든 교육생들에게 보다 더 많은 CS 연기를 마시게 하기 위해서 화생방 교관은 계속해서 그들을 굴렸다.

이후에 군가를 2곡 완창하고 나서야 겨우 화생방 지옥에서 탈 출할 수 있었다.

"팔 벌리고 아래로 뛰어갑니다!"

"절대로 얼굴 만지지 않습니다!"

이미 신병교육대를 시작으로 화생방 훈련을 1번 이상 받은 경 험자들이었기에 병사들은 조교의 말에 잘 따랐다.

얼굴을 만지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엄습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CS 연기를 전부 털어낸 후에 물로 얼굴을 씻었다.

"푸하!"

하나둘씩 원기를 되찾는 1분대원들.

전원 무사히 화생방을 클리어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라인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 산 하나 넘었네. 어휴."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 해도 익숙해지지 않은 산. 그 이름은 화생방이다.

화생방 훈련 이후에 드디어 마지막 코스 훈련만이 남게 되었 다.

이번 코스 훈련을 마지막으로 유격 4일차가 종료된다.

활차하강. 와이어 로프를 타고 수십 미터 높이에서 지 면까지 하강하는 유격 훈련이다.

가장 많은 교육생들이 포기한 코스 훈련이기도 했다.

1분대 내에서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기운상을 비롯해 황지웅, 전마등 등이 포기를 했다.

도전하게 된 1분대원은 라인혁과 이강진, 그리고 백우호. 단 셋뿐이었다.

라인혁은 활차하강이 오히려 재미있어서 도전하게 되었다. 이강진은 유격왕을 노리고 있었기에 무조건 클리어를 해야만 했그렇다면 백우호는? 뻔하다.

"강진이, 너도 하면 나도 한다!"

승부욕이 곧 용기로 변했다.

이렇게 해서 단 3명만이 활차하강 스타트 지점에 서게 되었가장 먼저 라인혁이 뛰어내렸다.

"이야아아앗호!"

스릴을 즐기면서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는 라인혁.

그 다음, 백우호의 차례다.

그전에 조교가 물었다.

"214번 교육생, 애인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부모님한테 한 마디 외치고 뛰어내립니다!"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도하!"

"도하아아아아!"

라인혁과 다르게 백우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래로 뛰어 내렸다.

이제 마지막, 이강진의 차례.

그는 조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사였다.

지금까지 모든 코스를 만점으로 클리어한 남자! 뿐만 아니라 참호 전투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덕분에 지금 이강진은 압도적 인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사실 활차하강을 굳이 안 해도 되지 만, 그래도 이강진은 혹시 모를 변수까지 차단하고 싶었기에 일부러 도전했다.

활차 손잡이를 잡은 후에 제자리에 섰다.

"후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해보려니까 괜히 떨렸다. 조교가 백우호에게 했던 질문을 이강진에게도 반복했다.

"215번 교육생. 애인 있습니까!"

순간 이강진은 망설였다.

한지윤. 그녀가 떠오른 것이다.

"애인으로 삼고 싶은 여자는 있습니다!"

"그럼 그 여성에게 한 마디 외치고 뛰어내립니다!"

뛰어내리는 것보다 한지윤을 향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더 떨렸다.

"지윤아! 사 사 사……."

"목소리 더 크게!"

"사, 사랑한다아아아!!!"

힘겹게 용기를 냈다.

"도하!"

"도하!"

한지윤에게 고백하는 건 망설였지만, 뛰어내리는 데엔 망설 임이 없었다.

이강진의 몸이 와이어 로프의 비스듬한 라인을 따라 쭉 아래로 향했다.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더 니, 이내 착지 지점에 도착했 다.

지면에 발을 딛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밑에서 대기하던 분대원들이 잘했다면서 이강진의 등을 두드 려 줬다.

도중에 백우호가 궁금증을 드러 냈다.

"근대 강진아. 아까 저기 위에서 '사랑한다!'라고 외치지 않았 냐? 누구한테 한 거야? 멀어서 이름까진 못 들었는데."

"뭐? 강진이 너, 좋아하는 여자 있냐?"

"우리 강진이, 로맨티스트였네! 누구냐, 누군데?"

이강진은 화두를 전환하기 위해 애썼다.

"아, 아닙니다. 우호 녀석이 잘못 들은 겁니다. 전 그런 적 없 습니다."

"이 녀석이 내 청력을 무시하네? 확실히 들었다니까?"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네가 헛것을 들은 거야!"

말로는 애써 부정해보지만,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은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한지윤에게 고백하고 활차하강을 했다는 사실을 들킬 뻔했지만, 그래도 이강진이 누구인가. 산전수전 공중전 까지 다 겪은 역전의 용사다. 그 정도는 대충 유야무야 시킬 수 있었다.

모든 훈련이 종료되고 유격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수용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샤워실에 서 몸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병사들은 오후 8시에 다시 집합을 했다.

훈련 때문에 집합한 건 아니었다.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병사들 앞에 선 중대장.

"오늘로서 실질적으로 모든 유격 훈련은 종료되었다. 다들 고 생 많았다!"

"악!"

"마지막 유격장에서의 밤을 그냥 보내면 섭섭할 거 같아서 이 렇게 너희들을 집합시키게 되었다. 아마 선임들은 이 중대장이 뭘 시키려는지 다들 알 거다."

고개를 끄덕이는 선임급 병사들.

이미 작년에 한 번 경험해본 일이었기에 그들은 알 수 있었 다.

물론 이강진도 알고 있다.

"지금부터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 이 앞에서 속 시원하고 하고 들어간다. 상대가 선임이든, 후임이든, 간부든. 누구든 좋다. 나한테 해도 상관없다. 쌓였던 것들 있으 면 이 자리에 나와서 속 시원하게 풀고 가라. 뒤끝 걱정은 안 해 도 된다. 그런 건 없을 테니까."

1중대만의 전통 행사.

'가슴을 열어라!' 시간이다.

"먼저 선임들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짬 높은 순서대로 나오도 로"

짬 순서로 따지면 전마등과 박이율이 1등이다.

전마등은 1분대를 향해 외쳤다.

"애들아! 형 이제 유격 훈련 끝나고 집에 갈 테니까 좆뺑이 열심히 쳐라! 크크큭!"

1분대뿐만 아니라 다른 분대에서도 '우우우!' 하며 야유를 보 냈다.

사실 선임급들의 차례는 그렇게까지 재미가 없었다.

계급장 떼고 한 번 제대로 질러보자는 후임들이 이 런 자리에 서 분위기를 잘 띄우는 법이다.

이등병들에게 많은 기대를 모아보는 중대원들.

김철의 차례가 되었다.

"이병 김철! 통신반장님에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선임급을 넘어서 간부에게 도전하는 김철이었다.

"통신반장님, 일 좀 그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통신반장님 업 무까지 저희가 짬처리 하려고 하니까 힘들어 죽겠습니다!"

병사들이 '오오!' 하면서 김철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전마등과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반면, 통신반장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었다. 중대장 은 그런 통신반장을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뒤끝 없기로 한 거, 기억하고 있지?"

"예, 물론입니다. 하, 하하하."

김철의 선방 덕분에 행정분과 선임들은 속이 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백우호의 차례.

"라인혁 상병님!"

"엥? 나?"

당황하는 라인혁을 향해 백우호의 속사포가 이어졌다.

"솔직히 FIFA 저보다 못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엄청 많이 봐 드리고 있는 건데, 자꾸 저보고 FIFA 좆밥이라고 놀려대는 거, 불 편합니다!"

"어쭈? 그럼 부대 복귀해서 한 판 붙어 볼까?"

"그럼 이 번에는 봐주는 거 없이 하겠습니다!"

"좋다! 한 번 해보자!"

군대에선 작은 것 하나 가지고도 이렇게까지 재미있게 놀 수 가 있다.

후일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마무리가 된 백우호의 차례.

드디어 이강진이 등장했다.

이강진은 과연 누구에게 불만을 토로할 것인가. 귀추가 주목 되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저는 크게 할 말 없고…… 전마등 병장님한테 한 마디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슬며시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이강진.

"앞으로 곧 분대장 떼고 말년 들어갈 텐데, 꼬장 적당히 부리 고 전역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전역빵 때릴 때,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순간 전마등은 한기를 느꼈다.

전마등뿐만 아니었다. 박이율을 비롯해서 말년을 앞두고 있는 선임급들은 모두가 다 이강진을 두려워하는 눈빛을 했다. 가슴을 열어라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강진은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 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과거로 회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여전히 농담과 안 어 울리는 남자였다.

유격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체조의 향연은 여전히 계속 되었 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교관은 난이도가 쉬운 PT체 조만 골라서 지시를 내렸다. 온몸비틀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 았다.

그렇게 1시간 정도 PT체조를 받은 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 졌다.

다시 연병장에 집합한 병력들.

교관과 조교들이 단상에 모두 모였다.

이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유격 퇴소식이 거행된 것이다.

나팔소리와 함께 대대장이 등장했다.

"유격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 성!"

거수경례를 받은 대대장은 유격복을 입고 있는 병력들을 빠 르게 쭉 훑었다.

"지난 4박 5일 동안 유격 훈련을 받느라 다들 고생이 많았다. 첫 입소 행군 때와 다르게 지금은 다들 늠름한 눈빛을 하고 있 는 걸 보니 이 대대장은 아주 기쁘다! 무엇보다도 사고 없이 무사히 유격 훈련을 끝마친 것에 대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사고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제만 하더라도 한 병사가 아트로핀 주사를 맞고 의무대로 실려 가지 않았나.

하지만 대대장이 무사고라고 하면 무사고다.

사고가 있어도 무사고다. 이게 군대 방식이다.

"지금까지 다들 잘해줬다. 특히 유격 훈련을 준비하느라 고생 한 조교, 교관들에게 다 같이 박수!"

짝짝짝 I

교관과 조교들을 향해 병사들이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들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보내는 박수라기보다는 '이제 진 짜로 끝났구나!' 하는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박수에 가까웠다.

교관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유격 기간 동안 내가 너무 괴롭히기만 한 거 같아서 미안하 다. 다시 대대로 들어가면 허물없이 잘 지내보도록 하자. 알겠 나!"

"악!"

"좋다. 그럼 마지막으로 유격왕을 발표하도록 하겠다."

이강진이 기다리던 바로 그 시간이다.

"올해의 유격왕!"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교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 중대 소속, 이병 이강진. 단상으로 올라오도록."

노력의 결실이 4박 5일 포상휴가라는 이름의 과실이 되어 이강진에게 수여되었다.

"이 교육생은 유격 훈련 동안 우수한 성적과 모범적인 태도를 보였음에 4박 S일 포상휴가증과 함께 이 상장을 수여함."

"감사합니다!"

또 다시 거머쥐게 된 포상휴가증.

언제 이 휴가증을 사용할까.

이강진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 제25화. 유격 훈련 (8) > 끝

퇴소식을 통해 유격 훈련 일정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큰 훈련이 하나 남아 있다.

유격 복귀 행군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다. 야간 행군이었기 에 병사들에게 오침 기회가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 텐트에 나란히 누운 병사들.

그때, 한 남자가 1분대 텐트를 방문했다.

"충성.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안준렬이 1중대로 다시 복귀했다.

그의 동기인 라인혁이 가장 먼저 안준렬을 반겼다.

"너도 고생 많았다, 준렬아. 네 자리 비어뒀으니까 여기 누워 서 자면 돼."

"땡 큐."

후임들도 안준렬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한 마디씩 보탰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U "

.흐.

안준렬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버리는 남자, 전마등.

그런 전마등의 반응을 본 안준렬은 힘없이 웃었다.

"전마등 병장님. 아직도 삐치셨습니까?"

"삐치긴 누가 삐쳤다고 그래? 선임이 봐달라고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 무시한 네 잘못이지."

전마등이 열외 되었을 때, 열외 담당이었던 안준렬은 전마등의 말을 무시하고 FM대로 얼차려를 부여했었다.

전마등은 그걸 담아두고 있었다.

"전마등 병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같은 중대, 분대라고 봐줬다가 교관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오히려 더 큰일이라는 것 으 "

"그래서 적당히 눈치 보면서 봐줬어야지. 상병 짬 됐으면 그 정도는 융통성 있게 할 수 있잖아."

융통성. 안준렬에게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다.

마치 이강진에게 농담이라는 단어만큼 어색했다.

삐친 전마등을 공략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제가 PX 거하게 쏘겠습니다."

전마등은 PX 가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은 꼭 가야 직성이 풀릴 정도다.

"……냉동 쏘는 거다?"

"예, 알겠습니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한 입으로 두말했다간 알아서 해라."

"하하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융통성이 없기로 소문이 난 안준렬이지만, 약속을 어기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다.

전마등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얼추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이제 야간 행군을 대비해 얌전히 잠을 청하는 일만 남았다.

피로가 쌓인 탓일까.

오침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코를 고는 소 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강진도 단잠에 빠져들었다.

'야간 행군만 끝내면 된다. 그러면…… 휴가 나가자? …."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해둔 포상휴가증 덕분에 편안한 마음 으로 잠을 청했다.

오후 5시.

텐트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부대로 먼저 복귀하는 군용 트럭에 텐트 자제와 의류대를 실었다.

남은 건 K-2 소총과 장구류, 그리고 완전군장뿐.

야간행군 준비를 모두 마친 병사들은 연병장으로 향했다.

오후 6시가 되었을 때, 모든 병사들이 행군 준비를 끝마쳤다. 이후에 대대장이 다시 한 번 단상을 올랐다.

"행군이 끝나고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유격 훈련이 끝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무사히 부대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순간 '악!'이 튀어나올 뻔한 병사들이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 리고 제대로 된 대답 소리를 들려줬다.

이것이 유격의 후유증이었다.

"본부 중대부터 출발한다! 선두, 앞으로!"

"앞 사람과 간격 유지한 채 걷는다!"

"좌우로 밀착해! 좌우로 밀착!"

모든 간부와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다음, 1중대의 차례다.

"1 중대, 가자!"

"예!"

중대장을 필두로 병사들이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입소 행군과 다르게 복귀 행군은 굉장히 피로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심지어 야간행군이다. 더 악조건 속에서 진행되다보니 자칫 방심하면 큰 사고를 당할 수가 있다.

특히 산행을 조심해야 한다.

복귀 행군은 입소 행군과 다른 루트를 타기로 했다. 산행을 죄 소화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입소 행군 때 보지 못했던 풍경이 병사들 앞에 펼쳐졌 다.

하나 아쉬운 점도 있었다.

"입소 행군 때 봤던 그 계곡, 다시 보고 싶었는데."

백우호는 그 계곡 풍경이 꽤 마음에 들었다. 뒤에서 걷던 이강진이 그의 혼잣말을 받아줬다.

"전역하고 난 이후에 네가 개인적으로 찾아오면 되잖아."

"미쳤냐? 난 전역하면 부대 근처는 얼씬도 안 할 거야. 근데 유격장 근처를 왜 오겠냐."

"하긴."

그건 이강진도 같은 마음이 었다.

그랬던 그가 설마 재입대를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인생 참…….'

좆같다.

벌써 해가 저물었다.

어두운 길을 해치고 묵묵히 앞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

오후 6시부터 시작한 복귀행군이 벌써 5시간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딱 자정이 되었을 때, 1075 대대는 어느 한 부대에 들리게 되 었다.

이곳에서 라면 취식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기운상, 백우호와 함께 지급 받은 라면을 들고 식당으로 향하는 이들.

도중에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강진아. 저거 뭐냐?"

작은 언덕 같은 것이 부대 곳곳에 위치해 있었다.

"저거, 포상 같은데."

"포상? 포상휴가 할 때 그 포상?"

"아니. 포를 넣어두는 곳 말이야. 그런 걸 포상이라고 하거든."

자주포 부대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순간 누군가가 이강진을 불렀다.

"혹시 이강진?"

고개를 돌리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계급장이 가장 먼저 눈 에 들어왔다.

무박 3일 훈련 당시에 이강진에게 도움을 줬었던 155mm 견 인곡사포 부대 전포대장, 이도훈 소위였다.

"충성! 이병 이강진."

"오랜만이다. 설마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유격 복귀 행군 중이지?"

"예, 그렇습니다."

신기한 인연이었다.

설마 여기서 또 보게 될 줄이야.

당직사관 완장을 찬 이도훈은 이강진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그래. 푹 쉬었다가 가고. 저쪽에 자리 남은 거 같으니까 저기가서 먹어라."

"감사합니다."

"그럼 고생하고."

병력들을 통제하기 위해 다시 바쁜 걸음을 자처하는 이도훈.

그제야 백우호가 입을 열었다.

"누구셔, 저 분?"

"무박 3일 때 우리 조 도와줬던 그 소위분."

"아! 저분이 그분이구나. 가만. 근데 얼굴이 낯이 익은데?"

백우호도 이도훈을 티비에서 얼핏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낯 이 익었던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이강진과 이도훈은 인연 이상의 관계일지도 모른 피곤함, 졸음, 추위 등등과 싸우며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어 가는 1075 대대.

새벽이 밝아올 때쯤.

그토록 보고 싶었던 1075 대대 위병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 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자!"

"파이팅!!!"

위병소의 불빛을 보고 나니, 없던 힘이 샘솟았다.

병사들은 좀 더 힘을 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위 병소를 통과해 대대 연 병장에 하나둘씩 오와 열을 맞춰 줄을 섰다.

잠시 후.

대대장이 확성기를 들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중대장들은 각 중대 통제해서 병력들 데 리고 올라가고, 주말 동안 휴식 충분히 보장해줄 수 있도록 한 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해산!"

고생했을 병사들의 마음을 잘 아는 대대장이었기에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 가서 쉬어라.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5일 만에 다시 돌아온 막사 그제야 병사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군장을 내려놓고 대충 짐 정리를 끝낸 다음에 바로 샤워를 했다.

몸이 깨끗해지니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이 기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오늘 하루 정말 고생하셨습니 다! 취침 소등 하겠습니 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너희들도 수고했다."

마침내 이강진은 눈을 감았다.

별의별 사건이 다 있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강진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번 훈련도 성공이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오후 1시 반쯤에 늦은 점심을 먹은 병사들.

분대장 회의에 불려갔던 안준렬이 다시 1생활관으로 복귀했다.

"오늘 하루 대대장님 지침사항에 따라서 자유시간 충분히 보 장해줄 테니까 자고 싶은 사람은 자고, 놀고 싶은 사람은 놀아 도 된다."

마침 기다렸던 말이었다.

기운상과 황지웅은 바로 재취침에 들어갔다. 라인혁과 백우 호는 유격장 때 약속했던 FIFA 대결을 치루기 위해 휴게실로 향했다.

"이 번에야말로 결판을 내보자, 좆밥!"

"이 젠 정말로 안 봐드립 니 다!"

서로 씩씩거리면서 생활관을 나섰다.

고필중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면서 이들과 같이 동행 했다.

세 남자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안준렬.

그가 전마등을 찾았다.

"전마등 병장님."

"엉. 왜? PX 가서 사주게?"

"사드리는 건 저 외곽근무 복귀한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보다 행보관님께서 다음 주 중에 분대장 교체식 할 거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알아두시면 될 거 같습니다."

순간 전마등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드디어 저 지긋지긋한 초록 견장 떼는구나! 하하하!"

다음 분대장은 예정대로 안준렬이다.

전달사항을 모두 마친 후에 안준렬은 바로 외곽근무로 투입 되었다.

생활관에는 분대장 교체식으로 한창 기분이 좋아진 전마등을 비롯해 황지웅, 서일주, 기운상, 그리고 이강진. 이렇게 다섯만 남은 상황이었다.

티비 리모컨은 전마등이 점유했다.

채널을 돌리던 전마등이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뭐야. 크림슨 와인 끝났어?"

전마등이 챙겨보던 인기 수목 드라마 제목이었다.

서일주가 전마등의 말에 답했다.

"예. 이 번 주가 마지막 화였습니다."

"이 런 썅…… 못 챙겨봤네."

크림슨 와인 마지막 화가 방영될 때쯤, 전마등과 1075 대대 병사들은 유격장에 있었다.

"크림슨 와인 끝난 다음에 드라마 뭐 하는데?"

"그건 잘 모릅니다."

서일주는 드라마를 잘 모른다. 관심이 별로 없었기에 아는 것 도 많지 않았다.

이때, 의외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이강진이었다.

"꽃잎의 기억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이번 주에 1, 2화 방영했 고, 조금 있다가 재방송 틀어줄 겁니다."

"꽃잎의 기억? 그건 무슨 내용인데?"

"기억을 잃은 여자 친구와 여친의 기억을 되찾아주려고 하는 남자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전마등 병장님이 재미있어할 만한 드 라마입니다."

이강진은 전마등의 드라마 취향을 잘 알고 있다.

의외로 전마등은 로맨틱한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꽃잎의 기억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흠, 그래? 그럼 강진이 말 믿고 한 번 볼까?"

마침 이강진의 말대로 꽃잎의 기억 1화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주와 여주가 알콩달콩 잘 사귀는 분위기를 보여 줬다. 그러다가 여주가 도중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남주와 사귀었던 기억을 전부 잃은 채로 깨어난다.

여기까지가 1화 절반의 내용이다.

이강진의 예상대로 전마등은 드라마에 푹 빠져버 렸다.

여주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다시 대학교를 나왔을 때였다.

-민주야!

여주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면서 다가오는 한 여인.

-누구…… 세요?

-어머, 얘 좀 봐. 나 기억 못해? 혜미라고, 혜미.

드라마 여주의 절친으로 설정되어 있는 캐릭터, 장혜미. 그녀를 본 순간, 전마등은 화들짝 놀랐다.

"자, 잠깐만! 저 배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설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전마등을 비롯해 1075 대대 사람들이 너무나도 잘 아 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진이 그녀의 정체를 언급했다.

"예. 전마등 병장님이 아는 그 한지윤 씨 맞습니다."

< 제26화. 드라마 속의 그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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