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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더니 입대 전날-104화 (104/347)

< 제32화. 초록빛 전쟁 (4) >

제32화. 초록빛 전쟁 (4)

못하는 게 없는 남자라고 불리는 이강진이지만, 사실 그보다 더 상위호환 격인 존재가 1중대에 있었다.

바로 행정보급관이다.

"뭐? 초소 근처에 땅벌집이 있어?"

"예, 그렇습니다."

조일근과 이강진은 예초 작업을 마치고 행정반으로 돌아와 근 처에 땅벌집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강진이가 땅벌집 근처에 기다란 나무 막대기 3개를 꽂아서 위치를 표시해뒀습니다."

"그래? 알았다. 너희는 고생했으니 들어가서 쉬고 있어라. 나 는 가서 땅벌집 없애고 올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행보관은 부소대장들을 찾았다.

그들과 함께 장비를 챙겨들고 탄약고 초소로 향하는 행보관.

오늘따라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듬직해 보였다.

군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못하는 게 없게 되어버린 행보관이다. 땅벌 소탕 정도야 그에겐 여름만 되면 돌아오는 연례행사나 다를 바 없었다.

뒤처리는 행보관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강진과 조일근은 각 자의 생활관으로 돌아가 늦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생활관으로 돌아온 이강진.

그를 보자마자 백우호와 분대원들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야, 강진아."

백우호가 이강진을 보면서 손을 내저었다.

"풀 냄새난다. 오지 마라."

"그럼 난 어디로 가라고. 샤워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참아."

"그 냄새, 사라지긴 하냐?"

"몰라."

군대에서 예초병을 해본 것은 이강진도 처음이다. 최대한 옷 과 몸에 베인 풀 냄새를 어떻게든 지우려고 노력은 해볼 것이다.

하지만.

"장담은 못해."

이강진의 한 마디에 1분대원들의 표정은 더욱 썩어 들어갔다.

예초병들의 하루는 평일을 넘어 주말까지 이어졌다.

토요일 점심부터 예초기를 돌린 이강진은 해가 저물고 나서 야 다시 막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하…… 피곤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피곤한 일이었다.

'괜히 지원했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 따내는 휴가는 의미가 있다.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휴가였다. 그렇기에 힘들어도 그냥 참 고 군말 없이 지내기로 했다.

문제는 내일이다.

분대장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안준렬이 뻗은 채로 있는 이강진에게 다가왔다.

"강진아."

"일병 이강진."

"내일 종교행사 있잖아. 교회 내려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이강진은 군종병 일까지 병행해야 한다. 이게 문제였다.

"예.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일 에초기 돌리는 것도 오늘처럼 점심시간 이후에나 시작알 테고. 군종병 업무는 오전에 다 끝낼 수 있으니까 지장은 없을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안준렬이 묻고 싶은 건 다른 거였다.

"오전에 군종병 일하고, 오후에 예초기 돌리고. 그러면 피곤 하지 않겠냐는 거지."

보통 사람들로는 감당하기 힘든 일정이다.

이것을 3주동안 반복해야 한다.

이 제 1주차에 접 어들었을 뿐이다. 과연 이강진의 체 력과 정신 력이 그때까지 버텨줄까? 분대장으로서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강진은 자신 있었다.

"할 수 있습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말해. 내가 행보관님한테 말해서 네 업 무를 분담하든가 조치를 취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준렬 병장님."

"천만에. 분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거 니까 신경 쓰지 마라."

분대원 관리는 분대장의 주된 업무 중 하나다.

확실히 안준렬은 전마등보다 업무를 철저하게 잘 소화하는 그 런 느낌이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해야지.'

일단 오늘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바로 샤워다.

'언제 지윤 씨가 올지 모르니까.'

예초병을 맡게 된 3주동안 한지윤이 부디 종교행사에 오지 않 기를.

이강진은 처음으로 모순된 소원을 빌게 되었다.

* * *

이강진의 바람은 불행하게도 하늘에 닿지 않았다.

"어머, 강진 씨!"

오늘도 아리따운 미소로 이강진을 반기는 한지윤.

그녀가 이강진을 반갑게 맞이할수록 점점 더 그녀와의 거리 를 벌리고 싶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지윤이 싫어져서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기에 이러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지윤 씨."

평소의 이강진과 다른 모습이라는 걸 눈치 챈 한지윤.

"강진 씨. 오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면 제가 강진 씨한테 뭐 잘못했다든지……."

"네? 그, 그럴 리가 없죠! 하, 하하하!"

"근데 왜 자꾸 저를 피하시는 거예요?"

정곡을 찔렸다.

빙빙 돌려서 말하면 오해만 쌓을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에는 차라리 스트레이트로 말하는 편이 좋다.

"제가 냄새가 좀…… 심할 겁니다."

"냄새요?"

"예초병 일을 잠깐 하고 있거든요. 풀 냄새가 몸에 베여서 저 하고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한지윤은 이강진의 경고를 무시했다.

오히려 그와 거리를 좁혔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한지윤은 이내 빙그레 웃었다.

"괜찮은데요? 심하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피하려고 하는 게 더 상처받아요. 그러니까 평소처럼 지내요."

한지윤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그녀를 점점 알아갈수록 이강진은 확신했다.

한지윤은 좋은 여자다.

어쩌면 이강진에게 과분할 정도로.

예초병 일을 시작한지 이제 3주차에 접어들었다.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소문만 일병이 언덕에 앉아 있는 이강진과 조일근을 찾았다.

"충성.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제 돌아다녀도 괜찮냐?"

"저번 주부터 잘만 돌아다녔습니다. 조일근 상병님, 기억 안 나십니까? 저하고 같이 족구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붙였던 거즈도 뗐다.

약간 욱신거리는 것만 빼곤 이제 일상생활을 하는데 전혀 지 장이 없었다.

조일근은 이강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문만이, 너 없이 어떻게 하나 앞이 캄캄했는데. 강 진이가 활약을 정말 많이 해줘서 살았다. 땅벌들한테서 나를 구 해주기까지 했고."

"하하하,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강진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소문만과 이강진, 둘 다 예초병으로 기용한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본 조일근이었지만, 이것은 이루어쩔 수 없는 꿈이었다.

애초에 1중대가 보유하고 있는 예초기의 숫자는 2개가 전부 다. 이강진을 서브 멤버로 돌려서 로테이션 식으로 돌릴 수도 있을 거 같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받아야 할 포상휴가 문제도 생 긴다.

결국 두 명이 한계다.

"소문만 일병님은 언제 복귀하시는 겁니까?"

3주차가 되었어도 이강진은 아직 소문만의 예초병 복귀 소식을 못 들었다.

"그거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아, 그렇습니까?"

"내일부터 다시 내가 예초병 찰까 하는데. 어때?"

그래도 소문만은 양심이 있었다.

이강진이 임시 예초병 일을 하는 건 이번 주 일요일까지였다. 4일 정도 남았기에 여유롭게 쉬다가 일요일이 딱 되었을 때 다 시 복귀해도 상관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만은 바로 내일부터 자기가 다시 예초병을 차겠다고 나섰다.

이강진이 고생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소문만이 이렇게 나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오늘까지만 하겠습니다."

"나 없는 사이에 조일근 상병님 도와줘서 고맙다, 강진아. 나 중에 내가 확실하게 보답할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 지긋지긋한 예초병도 이제는 슬슬 이별할 때가 다 되었다.

'드디어 초록빛 지옥에서 해방인가.'

그건 아니었다.

제초 작업은 여전히 계속 될 것이다.

단지 예초기를 들었나, 낫을 들었나.

그 차이일 뿐이다.

위이이이잉!

예초병으로 다시 복귀한 소문만은 조일근과 같이 제초 작업 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이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강진의 표정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백우호가 고개를 갸우 뚱했다.

"왜. 다시 예초병 차고 싶어?"

"아니. 그냥 저 두 사람의 호흡 때문에 그런 거야."

"호흡이 왜?"

"아무리 내가 잘해도, 오랫동안 손과 발을 맞춰온 조일근 상 병님과 소문만 일병님의 유대 관계까지 대신할 순 없구나 하고 깨달았거든."

역시 소문만에게 다시 예초병을 건네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문 득 들었다.

백우호는 이강진의 말을 도통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몸소 체험해본 사람과 말로만 들은 사람의 차이는 분명 존재 한다.

"됐다. 풀이나 뽑자."

코팅된 장갑을 이용해서 돼지풀을 힘 있게 움켜쥔 이강진.

예초기를 돌렸을 때에는 이깟 풀들은 금방 베어낼 수 있었지 만, 지금은 일일이 노다가로 다 뽑아내야만 했다.

그래도 차라리 이게 더 편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돼지풀들을 뽑아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막사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행정반에서 알려드립니다. 일병 백우호. 일병 백우호는 지금 즉시 행정반으로 오기 바랍니다.

"우호야. 너 부르는데?"

"뭐지?"

불린 당사자인 백우호도 어리둥절했다.

근처에 있던 고필중이 백우호에게 농담 식으로 물었다.

"설마 사고라도 치고 온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단 행정반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장소를 이탈하는 백우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강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설마…… 그건가.'

이강진이 이번 휴가를 반드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 가 하나 있었다.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던 불운의 기운.

그 기운은 이강진을 향한 게 아니었다.

30분이 지나도 백우호는 오지 않았다.

이쯤 되니 고필중은 백우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호, 이 녀석. 설마 어디 가서 농땡이 부리고 있는 건 아니 겠지?"

이강진이 그렇진 않을 거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정글모를 쓴 안준렬이 이강진과 고필증을 찾았다.

"작업 그만 하고 잠깐 와 봐"

"무슨 일이십니까?"

대답 대신 안준렬은 일단 와 보라는 손짓만 했다.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제야 대답을 들려줬다.

"우호한테 큰일 생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뜸을 들이 던 안준렬은 이내 사 실을 공유했다.

"우호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셨다고 하더라."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백우호의 어머니.

이 때문에 백우호는 급하게 정기 휴가를 사용하기로 했다.

"4박 5일 맞지?"

"예, 그렇습니다."

분대장 수첩을 펼친 안준렬이 백우호에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쟁여둔 포상휴가 같은 거 없어? 어머니가 입원하셨을 정도 면 좀 길게 휴가 갔다가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포상휴가는 없습니다. 그리고 4박 5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엄청 크게 다치시 진 않았다고 하셨으니, 얼굴만 봐도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아들 입장에서 신경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고민하는 안준렬.

행보관이나 중대장에게 말해서 추가로 휴가를 받아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때, 갑자기 이강진이 백우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라."

"이게 뭔데?"

"열어보면 알 거야."

작은 봉투 안에 담겨져 있던 것은 바로…….

이강진이 예초기를 돌리면서 어렵게 받은 3박 4일 포상휴가 증이었다.

"너, 설마……."

이강진은 백우호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당분간 어머니 곁에 있어줘. 그게 장남의 역할이잖아."

이전 군생활에서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힘들고 지칠 때, 동기인 백우호가 있어줘서 군생활을 무사히 버텨낼수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백우호는 이강진을 힘 있게 끌어안았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로 안 잊을게!"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이강진이 백우호에게 하고 싶었다.

< 제32화. 초록빛 전쟁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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