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3화. 진지공사 (2) >
제33화. 진지공사 (2)
이강진은 군생활을 하면서 딱 한 번 멧돼지를 본 적이 있었 다.
하지만 이 순간, 새롭게 기록이 갱신되었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
그러나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멧돼지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도망칠까?
아니,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이강진은 병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자세를 낮추라는 신호였다.
멧돼지는 시야가 나쁘다. 우선 움직임을 최소화 시켜야 한다.
괜히 무섭다고 달아나면, 오히려 멧돼지에게 공격 대상으로 인식된다.
시야가 나쁘고 성격도 나쁘다.
이강진은 자신이 아는 팁을 빠르게 병사들에게 공유했다.
"녀석을 자극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병사들.
이대로 얌전히 녀석이 지나가기만을 바라야만 했다.
푸릉!
다시 한 번 콧김을 뿜어낸 멧돼지.
녀석은 병사들이 있는 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두려움과의 싸움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잠시 뒤.
멧돼지가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산 속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제야 병사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사, 살았다……!"
"오줌 지릴 뻔했네!"
군대에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괜히 산 속에서 멧돼지를 만났 다가 큰 부상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1부소대장은 병사들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일단 내려가자! 언제 녀석이 다시 올지 모르니까!"
"아, 알겠습니다!"
작전상 후퇴다.
작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병사들의 안전이다.
멧돼지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안 이상, 계속 무리해서 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1부소대장은 결국 병사들을 데리고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만 했다.
작업에 투입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어진 불상사였문제는 목진지 작업조만 이런 게 아니었다.
행보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번 주에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말하면 뭐 어쩌라는 거요!"
배수로 조 작업도 중지된 상태였다.
병사들과 함께 배수로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통신반장이 목 진지 조의 복귀를 뒤늦게 혹인했다.
"작업 벌써 다 끝났어?"
1부소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멧돼지 때문에 도중에 하다가 다시 내려왔습니다."
추가로 뱀도 나왔다.
멧돼지 이야기를 들은 순간, 통신반장은 혀를 찼다.
"그러면 작업 못하지."
"근데 행보관님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시는 겁니까?"
"중장비 불렀는데 갑자기 오늘 못 오게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그것 때문에 저러고 계시는 거야. 우리도 작업을 스탑 됐고."
"아하."
목진지도, 배수로도.
작업이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아, 됐고, 끊어!"
전화를 강제로 끊어버린 행보관은 가시가 잔뜩 돋친 어투로 1부소대장에게 물었다.
"니들은 왜 여기 있냐. 작업은 어쩌고."
"그, 그게 말입 니다."
자초지좋을 설명했다.
아무리 행보관이라도 멧돼지가 줄몰한 지역에 병사들을 다시 올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질 텐 가.
한숨을 푹 내쉰 행보관.
"진지공사 첫 날부터 되는 게 하나도 없군!"
행보관은 진지공사 시즌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 터치 받지 않고 오로지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갑작스런 약속 취소와 멧돼지 때문에 망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툭, 툭툭…… 쏴아아!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통신반장이 하염없이 밖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에게 외쳤다.
"비 오니까 다들 막사로 들어가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보슬비도 아니고 장대비가 내렸다.
잠깐 밖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행보관과 통신반장, 1부소대장도 마지못해 막사 아래로 피신 했다.
행정반에 있던 소대장이 행보관에게 다가왔다.
"행보관님.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 같습니다. 그칠 때까지 병 력들, 생활관으로 들여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으,
이대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오전 시간을 날려 보내야 한다는 게 행보관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했다.
군대에선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곤 한다.
지금이 딱 그때다.
"……알았습니다."
결국 행보관은 뜻을 굽히기로 했다.
* * *
오전에 잠깐 내리는 소나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장대비는 오후 3시가 되어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 았다.
그럴수록 행보관은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저 썩을 비는 언제까지 내리는 거야!"
지금 당장 나가셔 병력들 데리고 작업해야 할 판국에 비라니.
행보관 입장에선 비 내리는 소리가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누가 작업하기 싫어서 기우제라도 지냈나."
이런 의심을 할 정도였다.
초조해 하는 행보관을 보면서 중대장이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일기예보 보니까 내일은 화창할 거라고 합니다. 내일부터 작 업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하는 행보관.
내일은 먹구름 대신에 태양이 출근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야만 했다.
행보관이 내일이 화창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때. 병사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도 제발 비가 와주기를!"
"천지신명이시여, 비나이다! 비나이다!"
1생활관에서 때 아닌 기우제가 펼쳐졌다.
그 정도로 이들은 간절했다.
안 그래도 날씨 때문에 행보관은 잔뜩 뿔이 난 상태다. 내일 날씨가 개면, 분명 월요일에 못한 만큼의 양을 작업하게끔 병사 들을 부리고 또 부릴 것이다.
이강진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그때는 어땠지?'
비가 계속 내렸었나?
아니면 월요일만 비 내리고 화요일부터는 쭉 화창했나?
'기억이 안 나네.'
20년 전의 날씨가 어땠는지 떠올릴 정도로 기억력이 엄청 좋 진 않았다.
'결국 우리의 운명은 하늘에게 달린 건가.'
이강진도 따지고 보면 병사들의 편이다.
이대로 무사히 진지공사가 짬처리 되기를!
눈을 뜨자마자 병사들은 바깥 날씨부터 확인했다.
"비 옵니다!"
"아싸!"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
날씨는 행보관이 아닌 병사들의 편을 들어줬다.
병사들은 기뻐 날뛰겠지만, 행보관은 아니었다.
오전 8시 반.
줄근을 마친 행보관은 어제보다 더 쏟아져 내리는 비를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오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때마침 당직사병이 행보관을 찾았다.
"충성."
"무슨 일이냐."
"병력들, 계속 생활관에서 대기하게끔 하는지 여쭤보려고 왔 습니다."
행보관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서 정신교육 비디오라도 틀어줘."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오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겠군."
아무리 행보관이라 하더라도 날씨까지 조종할 수는 없다.
일단은 화를 삭이고 기다려야만 한다.
* * *
결국 비는 화요일 내내 오고 말았다.
수요일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비는 일과 시간에만 내렸다. 개인정비 시간이 되면 기다렸다 는 듯이 비가 멈췄다.
이강진과 병사들은 요 근래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원래 군대 날씨는 이게 아니잖아."
라인혁의 말대로였다.
추울 때 더 줍고, 더울 때 더 덥고. 일과 시간만 되면 햇빛이 쨍쨍 내려쬐다가 개인정비 시간만 되면 눈이 내리고 비고 오고. 이게 군대 날씨다.
진지공사 시기의 날씨는 군대 날씨가 아니었다.
병사들에게 타이밍 좋게 내리고만 있으니. 기쁨을 넘어서 수 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남은 진지공사 기간은 이틀.
병사들과 다르게 행보관은 애가 탔다.
어떻게든 작업은 해야겠는데, 이 망할 비가 너무 많이 온다.
"……어쩔 수 없지."
만약 목요일까지 비가 온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군."
행보관은 비장의 수를 꺼내기로 했다.
행보관의 예상대로 비는 목요일까지 내렸다.
오늘도 병사들은 싱글벙글이었다.
"비 오니까 또 정신교육 하겠지?"
"아까 행정반 보니까 이미 당직이 정신교육 CD 꺼내놓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개꿀 빨겠네. 크큭!"
하하호호 웃으면서 막사 밑으로 집합한 병사들.
행보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도 작업하기에는 글렀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유일하게 단 한 명 만이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대답했그 한 명이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판쵸우의를 쓴 행보관이 병사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오늘은 다 필요 없고 무조건 작업한다. 지금부터 전부 빤스 만 입고, 그 위에 판쵸우의 쓴 다음에 이곳으로 집합하도록 한다. 알겠나!"
……."
병사들은 경악했다.
오늘, 행보관은 제대로 독기를 품고 출근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세상이 멸망하든.
행보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작업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것이 1중대 행보관의 의지다.
이강진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랬지. 이런 사람이었어.'
작업에 미친 남자, 행보관.
그가 병력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것들이…… 대답 않고 뭐하고 있냐! 퍼뜩 안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허겁지겁 생활관으로 향했다.
행보관의 말대로 병사들은 팬티만 남겨두고 그 위에 판쵸우 의를 입었다.
"으악!"
"이 빌어먹을 냄새!"
전투복 위에 판쵸우의를 입어도 끔찍한데, 맨살에 판쵸우의 가 다니까 끔찍함은 배가 되었다.
몸에 착용한 거라고는 오로지 속옷과 판쵸우의, 그리고 슬리 퍼뿐.
병사들이 다 집합했음을 확인한 행보관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진지공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희들에게 할 일을 알려주겠다."
행보관은 막사 옆 배수로 쪽을 가리켰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배수로 하나만 조진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트이 !"
삽을 들고 배수로로 향하는 병사들.
기운상은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영화를 떠올렸
"스파르타를 소재로 만든 영화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마치 그 곳의 주인공이 된 거 같습니다."
망토 대신 판쵸우의를.
무기 대신 삽과 곡괭이를 손에 들었다.
황지웅이 어이를 상실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사람들처럼 멋있기라도 하지, 이건 뭐 그지들도 아니고."
군대라는 게 다 그런 것이다.
* * *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와중에도 행보관의 작업 정신은 계 속 되었다.
"돌덩이가 너무 크잖아! 해머로 쪼갠 다음에 쌓아올려!"
"알겠습니다!"
비 내리는 곳에서 해머질과 삽질, 곡괭이질이 이어졌다.
근처에 떠내려 온 개구리들이 병사들의 슬픈 처지를 대변하 듯 울부짖었다.
그래도 비올 때 작업을 하니까 좋은 점은 하나 있었다.
적어도 덥진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미친 듯이 작업에 임할 때였다.
갑자기 당직사병이 허겁지겁 달려오기 시작했다.
"해, 행보관님!"
판쵸우의도 걸치지 않은 채 달려오는 당직사병.
행보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내 작업을 방해하면, 설령 너라고 해도 용서 않겠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큰일 났습니다! 비상입니다, 비상! 지금 병력들 다 데리고 위 병소로 나가보셔야 할 거 같습니 다!"
"……뭐라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 제33화. 진지공사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