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6화. 차기 분대장 (2) >
제36화. 차기 분대장 (2)
분대장 회의를 끝낸 후에 안준렬은 1분대원들이 모여 있는 작 업 장소로 향했다.
행보관이 오늘 1분대원들에게 부여한 일은 철조망 보수 작업 이었다.
안준렬의 기척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이강진이 그를 반겼다.
"충성. 오셨습니까, 안준렬 병장님."
"어. 인혁이는 어디 있어?"
"라인혁 병장은 저기 앞쪽에서 우호하고 같이 작업 중입니다."
"그래? 고맙다."
이강진을 남겨둔 채 안준렬은 라인혁을 찾았다.
"인혁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나만?"
"어."
"왜. 불안하게시리. 혹시 분대장 회의에서 내 이야기라도 나 왔냐? 중대장님이 뭐라고 하신 거야?"
"나쁜 말 안 했으니까 그냥 와."
안준렬이 둘이서만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라인혁만 부르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웬만한 일은 혼자 고민하다가 해결하곤 했던 안준렬이었기 때 문에 그의 이런 행동이 분대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멀리서 이런 안준렬의 행동을 지켜보던 기운상이 이강진에게 물었다.
"안준렬 병장님, 왜 저러시는 겁니까?"
"……글쎄."
이강진은 과거의 기억을 빠르게 훑었다.
뭐 하나가 걸리는 게 있긴 했다.
'차기 분대장 때문인가.'
그 시기가 온 듯했다.
"차기 분대장을 골라야 한다고?"
라인혁의 물음에 안준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대장님이 그러시더라. 대대 ATT 때 최대한 많이 알 려주래. 그 다음에 우리 전역할 때까지 굵직한 훈련 없을 테니 까 이럴 때 미리미리 알려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뭐……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하지."
안준렬과 라인혁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들 이 전역을 해도 무사히 1분대가 별 탈 없이 운영되기를 바라는 선임들이었다. 이렇다 보니 차기 분대장을 선정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누구로 하게? 어차피 지웅이하고 필중이, 둘 중에 한 명이잖 아."
안준렬이 들려준 대답은 선택이 아닌 보류였다.
"모르겠다. 솔직히 나 혼자 판단할 문제는 아닌 거 같아서 이 렇게 널 따로 부른 거야."
사람이 보는 시각은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인 요소가 분명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준렬이 보지 못하는 걸 라인혁은 보고 있을 때가 있다. 이 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안준렬은 그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지웅이하고 필중이 중에 누가 좋을지, 너라면 누굴 택할지 말 해줘."
"음?"
라인혁의 고민은 길어졌다.
이 자체만으로도 안준 렬은 의외였다.
사실 바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필증이한테 분대장 물려주라고 말하려는 거 아니었어?"
"내가?"
"너, 필증이하고 친하잖아."
라인혁 라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고필중이다. 그래서 안 준렬은 이렇게 물으면 라인혁이 고필증의 이름을 언급할 줄 알 았다.
하지만 라인혁은 달랐다.
"솔직히 필중이가 지웅이보다 낫긴 하지. 싹싹하고, 눈치도 있 고. 그리고 우리 말고 다른 분과 선임들하고 잘 지내기까지 하 잖아? 나중에 경고 카드, 칭찬 카드로 정치 싸움에 들어가도 충분히 커버칠 수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기까지 하니까 능력 면으 로 따지면 필증이 분대장을 차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런데?"
"문제가 있어.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잠시 말을 끊은 라인혁이 이내 그 문제점의 정체를 언급했다.
"필중이가 몇 달 쉬었다가 왔잖아."
"그렇지."
"솔직히 필중이가 없는 사이에 지웅이가 고생 많이 한 거, 모 르는 사람 없잖아. 물론 실수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고 생했던 흔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걸 생각한다면, 지웅 이 입장도 무시할 수가 없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치료를 위해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고필중. 그 빈자리를 황지웅이 어떻게든 메꾸기 위해 고군분투를 했던 걸 생각하면, 고필중에게 바로 분대장 자리를 물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민해봐야 한다.
어느 한 쪽이 섭섭해 하지 않고 모두가 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안준렬이 해야 할 일이다.
점점 더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갑자기 근처에서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준렬과 라인헉은 곧장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강진이 서 있었다.
"라인혁 병장님. 부소대장님이 찾으십니다."
"나를?"
"예, 그렇습니다."
"어, 그래. 알았어."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안준렬이 이강진에게 돌연 질문했다.
"혹시 우리가 한이야기, 들었어?"
이강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 죄송합니다. 일부러 들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일 텐데, 본의 아니게 이강진이 듣고 만 것 이다.
그가 말한 대로 의도한 건 아니었다. 소리가 들리는데,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으랴.
안준렬은 이강진에게 괜찮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신경 쓰지 마. 안 그래도 오늘 분과별 간담회 때 오픈하려고 했었으니까. 그런데 강진아."
문득 안준렬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라면 지응하고 필중이 중에 누구한테 분대장을 차게 할 거 야?"
이강진의 생각이 궁금했다.
"저라면……."
이강진이 어떤 대답을 들려줄지. 안준렬과 라인혁은 귀를 기 울였다.
"우선 두 사람한테 분대장을 찰 의사가 있는지부터 먼저 물어 보겠습니다. 그래서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줄 거 같습니다."
"……아하."
이거야말로 명답(名答)이다.
차기 분대장 선정에 대해서 안준렬과 라인혁은 분과별 간담 회 때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었다. 하나 세 사람 이상이 알게 된 시점부터 이미 비밀이라는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이번 건도 마찬가지였다.
차기 분대장에 관한 말은 안준렬 혼자만 들은 게 아니다.
중대장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문이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황지웅의 귀에도 이 사실이 들어갔다.
"분대장 선정이라……."
같이 작업하던 서일주가 황지웅에게 물었다.
"황지웅 상병님이 다음 분대장 하시는 거 아닙니까?"
"잘 모르겠는데."
"엇? 왜 모르십니까? 황지웅 상병님 아니면 분대장 찰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치, 운상아?"
"이병 기운상! 예, 그렇습니다!"
서일주와 기운상은 황지웅 편이었다.
그러나 황지웅은 자신 없어하는 어투였다.
"솔직히 나보다 필중이가 일 더 잘하잖아. 축구를 좋아해서 그 런지 다른 분과 선 임들하고도 두루 친하고."
"황지웅 상병 님도 수송분과나 박격포반하고도 친하지 않습니까?"
"친하기야 하지. 근데 필중이처럼 넓게 알고 있진 않으니까."
황지웅은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하고만 한정적으로 친하 다. 반면, 고필중은 황지웅이 말한 것처럼 두루, 넓게 모든 사람 들과 다 친했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정치 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고필중의 인맥이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황지웅은 고필중이 분대장을 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일주는 달랐다.
"에이, 그러진 않을 겁니다. 저는 무조건 황지웅 상병님 밀어 드리겠습니다. 운상아, 너도 그럴 거지?"
"예! 물론입니다!"
두 사람의 응원 덕분일까.
황지웅은 다시 의욕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도전 한 번 해볼게."
"파이팅입니다!"
고필중도 황지웅이 차기 분대장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시기 와 비슷한 시점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대장이 라……."
황지웅과 다르게 고필증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지웅이가 찰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같이 작업하던 백우호는 왜 고필중이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제가 황지웅 상병을 욕할 생각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고필중 상병님이 황지웅 상병보다 더 일 잘 하시지 않습니까? 적어도 제가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태강이도 아마 그럴 겁니다."
백우호가 눈치를 주자, 성태강은 바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 했다.
이들은 같은 라인혁 라인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 히 있는 게 아니다. 백우호와 성태강은 매번 같이 어울리 던 고 필중 쪽에 더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고필증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
중대 대다수의 선임들이 만약 고필중이 입원으로 오랫동안 자 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그가 분대장을 찼을 거라고 말을 했다.
고필중은 분대장을 찰 자격이 있음을 이미 입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포기한다?
백우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반년을 쉬다가 온 것도 아니고. 고작 한두 달이지 않습니까?
그런 거는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고필중 상병님."
고필중은 고민했다.
사실 그는 분대장에 어느 정도 욕심이 있었다.
군대에 왔으니, 적어도 초록 견장 한 번은 차 봐야겠다고 생 각했던 고필중이다.
이번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래도 지웅이가 너무 걸려."
서로 친하다 보니 황지웅의 입장을 생각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웅이도 분대장을 차고 싶어 할 거야. 예전부터 분 대장이 되고 싶다고 나한테 자주 말을 흘렸었거든."
황지웅의 속내를 알기에 더욱 분대장을 탐내고 싶지 않았다.
얌전히 포기하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던 성태강이 갑자기 나섰다.
"실례가 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제 눈에는 지금 고필증 상 병님도 분대장을 차고 싶어 하는데 동기 때문에 억지로 양보하 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고필중 상병님. 다른 사람 배려한답시고 자신의 목표와 꿈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 은 행동은 없습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당당히 쟁취해야 합니다. 저는 연예계 활동을 통해 그걸 깨달았습니다."
소극적으로 있으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거머쥐게끔 노력해야 한다.
가만히 있는다고 누군가가 산타클로스처럼 성공과 기회를 공 짜로 주진 않으니까.
고필중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분과별 간담회 시간이 찾아왔다.
안준렬은 분대원들을 모은 후에 이강진이 말한 대로 먼저 두 사람에게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한 명만 분대장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분대장을 물려주면 된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둘 다 하기 싫다는 경우 말이다. 그럴 때에는 잘 설득하든가 하면 될 것이다.
여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둘 다 하고 싶다.'라는 경우의 수다.
이게 가장 골치 아프다.
"너희도 잘 알고 있겠지. 차기 분대장에 관한 거 말이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준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오픈할게. 나하고 인혁이는 지웅 이하고 필중이 중 한 명에게 분대장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어. 계급상으로도 너희 둘이 딱 적당하고. 그래서 일단 분대장을 하고 싶은지 먼저 의사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
먼저 황지웅에게 물었다.
"지웅아. 넌 분대장 하고 싶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예. 하고 싶습니다."
황지웅의 대답은 안준렬도 예상하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도 분대장 한 번 차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으 니까.
그렇다면 고필중은?
"필중아, 넌?"
고필중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답을 내놓았다.
"하고 싶습니다."
< 제36화. 차기 분대장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