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6화. 차기 분대장 (4) >
제36화. 차기 분대장 (4)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강진은 입이 삐쭉 튀어나온 백우호 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직도 삐쳐있냐."
"……너랑 상관없잖아."
"나중에 PX 같이 가준다고 했잖아."
"PX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고필중 상병 님이 분대장을 달 수 있도록 힘을 실어 달라 이거지. 기호 1 번, 고필중! 언더 스탠 드?"
"언더 스탠드든 업 스탠드든. 너한테 누차 말했지만, 나도 안 준렬 병장님처럼 좀 더 고민해보고 결정할 거야. 그러니까 자꾸 강요하지 마."
"쳇. 동긴데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냐."
백우호는 어지간히 고필중이 마음에 든 모양인 것 같았다.
하기야. 공통된 취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이야기도 잘 통 하다 보니 고필중이 분대장을 달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이강진이 고필중의 편을 들어주는 걸 망설여 하는 이유가 있었다.
회귀 이전의 이력 때문이었다.
'그때 분대장이 된 인물은 분명……."
갑자기 생활관 문이 벌컥 열렸다.
안준렬이 이강진과 백우호에게 지시했다.
"신병 들어왔으니까 짐 받아줘라."
"신병 왔습니까?"
"어. 들어와라."
의류대를 등에 짊어진 한 남자가 1생활관에 들어섰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키였다.
기운상처럼 키가 멀대처럼 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작은 편이었다.
160cm 초반?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법 깡다구가 있는 얼굴이었다.
목소리도 생각보다 컸다.
"충성 이병 곽분섭! 금일부로 1075 대대 1중대 1분대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백우호는 손으로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한편 이강진은 잠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만, 분섭이가 이때 전입을 왔었나?'
아는 후임인 건 맞다. 하지만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떠랴. 중요한 건 반가운 얼굴을 또 보게 되었다는 것 이었다.
백우호는 이강진처럼 곽분섭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첫 만남부터 제법 놀랐다.
"곽분섭이? 짜식, 목소리 엄청 크네. 키는 작은데."
"이병 곽분섭! 이래보여도 160cm는 넘어요!"
"뭐? 방금 '요'라고 한 건 아니지? 내가 잘못 들었나?"
"죄, 죄송합니다!"
첫 만남부터 실수를 저지르는 곽분섭이었다. 그 모습에 이강진은 옛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분섭이가 초반에 실수를 엄청나게 많이 저지르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 때문에 이강진이 처음에 좀 고생을 했던 것도 같이 떠올랐 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다. 그래도 미래의 일을 알고 있으니, 당분간 주의해서 곽분섭을 집중 마크하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차기 분대장 선정 때문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1분대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바로 곽분섭의 전입 때문이었다.
저녁 점호 시간 전에 라인혁은 곽분섭에게 손짓했다.
"이, 이병 곽분섭!"
"사회에서 뭐 하다가 왔냐?"
"평범하게 대학 다니다가 왔어요!"
"요?"
"죄송합니다!"
곽분섭은 자꾸 '요'자체를 썼다. 요가 튀어나올 때마다 고필증 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인혁의 뒤를 잇는 군기반장, 고필중이 이걸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분 섭아."
"이병 곽분섭!"
"여긴 군대다. 한 번만 더 '요' 쓰면 그때는 가만 안 둔다."
"예! 죄송합니다!"
이건 경고가 아니다.
협박이다.
침을 꿀꺽 삼키는 곽분섭. 첫 만남 때부터 실수를 연발하니, 본인도 많이 답답할 것이다.
고필중은 다른 후임들에게도 주의를 줬다.
"분섭이 말투 교육, 똑바로 시켜라. 맞선임이 태강이었나?"
"이병 성태강, 예! 그렇습니다."
"신병이 잘못하면 니들도 같이 혼난다는 거, 잘 기억해둬. 운 상이도 그렇고, 강진이하고 우호도 알아둬라."
그들도 알았다면서 대답했다.
일부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래야 곽분섭이 바짝 긴장 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라인혁은 그런 고필증을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일을 잘한다고.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다 싶을 때, 합동 점호를 위해 이들은 행정반 옆 공간으로 향했다.
오늘의 당직사관은 통신반장이다.
그가 당직을 맡았는데 신병이 왔다?
그러면 분명 '그것'을 시킬 터.
"1 분대에 신병 하나 왔었지?"
"이병 곽분섭!"
손을 번쩍 든 곽분섭에게 통신반장이 매번 했던 것을 요구했다.
"장기자랑 한 번 하자."
"오오오!"
선임들이 박수를 보내면서 곽분섭에게 장기자랑을 독려했다.
갈 곳을 잃어버린 곽분섭의 시선. 이강진은 불안한 느낌을 받 았다.
"노, 노래할게요!"
신병의 한 마디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방금 저 녀석, '요'자 쓰지 않았냐?"
"맞습니다."
"신병이 정신이 나갔구먼."
여기저기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소개하는 첫 무대부터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고필중 은 지금 당장 1분대 후임들에게 집합 명령을 걸고 싶은 기분이 었다.
그전에 이강진이 먼저 나서려고 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강진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인 이가 있었다.
"상병 황지웅! 통신반장님, 우리 신병이 긴장을 많이 한 거 같 으니까 제가 대신해서 요즘 개발 중인 개인기 하나 보여드리겠 습니다."
"지웅이, 네가?"
"예, 그렇습니다. 여자 친구한테 들려줄 때마다 재미있다고 아 주 그냥 빵빵 터집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는 일부러 후임의 실수를 감싸주기 위해 나섰다.
일병도 아니고 상병이 이런 용기를 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목을 가다듬은 황지웅은 이내 가래 낀 목소리를 내면서 한때 유명했던 개그맨의 성대모사를 선보였다.
"에- 그짓말입니다, 새빨간 그짓말! 아니면 내 손에 장 지집니 돠!"
"하하하!"
"이야, 황지웅! 성대모사 달인이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분위기를 탄 김에 황지웅은 추가로 성대모사를 몇 가지 더 보 였다.
여자 친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연습한 성대모사가 설마 이 럴 때 쓰일 줄이야.
아마 황지웅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점호가 끝나자마자 고필중은 짧게 말했다.
"내 밑으로 집합."
서일주를 비롯해서 모든 후임들이 집결했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신병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죄송합니다!"
"지웅이 아니었으면 점호 분위기 개판되었을 거다. 상병이 이 병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었다. 그때, 황지웅이 고필중의 어깨 를 가볍게 툭 쳤다.
"됐어. 이 시간에 무슨 집합이야. 곧 자야 하는데. 할 이야기 있으면 내일 해. 그렇지 않습니까, 안준렬 병장님. 라인혁 병장 님."
두 병장들도 황지웅의 말에 동감했다.
라인혁이 추가로 말했다.
"군기 잡는 건 좋은데, 괜히 통신반장님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 니까 오늘은 그냥 자자."
"……예,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잠자리에 드는 고필중.
한편, 황지웅의 옆 침대에 누운 곽분섭은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감사합니다, 황지웅 상병님."
"됐어. 사실은 나도 예전에 너랑 같은 실수를 했었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통합 점호에서 장기자랑 할 때, 무심코 '요'자 써서 라인혁 병 장님한테 엄청 갈굼 받았었어.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지 가 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황지웅은 곽분섭의 실수에서 자신의 이등병 시절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존심 다 내팽개치고 자신이 스 스로 웃음거리가 되는 걸 자처했다.
"분섭이, 너도 나중에 후임이 와서 이런 실수 하면, 네가 도와 줘야 한다. 안 그래도 군대에 끌려온 것도 서러운데, 서로 돕고 살기라도 해야지. 설령 선임이든, 후임이든, 어차피 사회 나가면 형, 동생, 친구 할 거잖아. 그러니까 필중이도 너무 미워하지 말 고.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들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불이 꺼짐과 동시에 이들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대화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안준렬은 조금 뒤에 잠을 청했다.
마치 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일요일 오전.
기독교 종교 행사를 마무리 지은 이강진은 목사와 한지윤을 배웅하고 다시 막사로 올라왔다.
그때였다.
백우호가 사열대에서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안준렬 병장님이 집합하시란다."
"집합?"
"어."
그새 곽분섭이 또 뭔가 실수라도 했나?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곽분섭은 기운상, 성태강이 처음에 입대한 것과 다르게 상당 히 많은 실수들을 연발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강진은 오랜만에 선임들의 갈굼을 듣곤 했었다.
이번 집합도 그것의 일환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모든 1분대원들이 1생활관에 집합했다.
안준렬은 이들 앞에서 중대발표를 했다.
"차기 분대장을 정했다."
다수결까지 갈 거라고 예상했던 이강진은 놀라움을 감줬다.
'의외네.'
과연 누구로 정했을지 궁금해졌다.
안준렬은 손으로 차기 분대장을 직접 지목했다.
"지웅이, 네가 차기 분대장이다."
지목 당한 황지웅조차 놀랐다.
황지웅 캠프 인사들은 죽제 분위기였다. 반면, 고필중 캠프 멤 버들은 쉽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안준렬 병장님! 고필중 상병이 안 된 이유가 뭔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백우호는 꼭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고필중도 말은 안 했지 만, 듣고 싶다는 눈치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안준렬은 이들에게 황지웅을 고르게 된 계 기를 들려줬다.
"신병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곽분섭에게 집중되었다.
곽분섭은 놀라 외쳤다.
"이병 곽분섭!"
"신병, 네가 뭔가 했냐?"
"아, 안 했습니다!"
설령 한다고 해도 자대로 전입한지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신 병 이 안준렬에게 무슨 거래를 하겠나.
이건 순전히 안준렬의 판단이었다.
"필중이가 일 잘한다는 건 나도 알고 인혁이도 알고 우리 중대 모두가 다 알아. 하지만 난 분대장에겐 '일을 잘한다.'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뭘까.
모두의 관심이 안준렬에게 쏠렸다.
"바로 '희생'이다."
안준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분대장은 너희들도 알겠지만 희생정신이라는 게 필요해. 자 신의 개인정비시간을 포기해야 할 줄 알아야 하는 희생정신. 하 지만 다른 희생정신도 필요하지. 분대원을 위한 희생 말이야."
황지웅은 그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증명된 것은 바로 곽분섭의 장기자랑 사건 때였다.
"지웅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면서까지 후임의 실수를 무마시키려고 했다는 거다.
너희 입장 에선 지웅이의 이런 행동이 이해가 안 되고 가볍게 보일지도 모 르지. 하지만 이런 행동에는 엄청난 용기가 따르는 법이야. 나는 내가 생각하는 분대장으로서의 희생정신이 지웅이가 보여준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서 분대장을 지웅이에게 물려주기 로 했다."
이것이 이유였다.
옆에서 안준렬의 말을 듣고 있던 라인혁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쓴웃음을 짓던 고필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웅이라면 잘할 겁니다."
패배를 인정했다.
동시에 황지웅을 인정했다.
황지웅은 안준렬과 라인혁, 그리고 고필중에게 고마움을 드 러 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잘해내겠습니다!"
이로서 차기 분대장이 결정되었다.
기뻐하는 황지웅을 보면서 이강진은 다시 한 번 옛 기억을 떠올렸다.
'중간에 약간의 변수가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 종착지는 같구 나.'
이번 세계에서도 황지웅은 분대장을 차게 되었다.
이쯤 되면 이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 제36화. 차기 분대장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