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화. 5분대기조 (2) >
제37화. 5분대기조 (2)
오대기 비상!
그 말을 듣자마자 이강진과 고필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 나갔다.
그때, 뒤에서 '오대기 비상'을 외쳤던 라인혁이 키득키득 웃 음소리를 냈다.
"짜식들, 긴장 바짝 하고 있구먼! 오대기다운 자세를 갖추고 있어. 참 군인이다, 참 군인!"
두 사람은 어이를 상실한 눈으로 라인혁을 응시했다.
실제 상황이 아닌 장난이었다.
선임만 아니었더라면 이걸 확!
고필중이 인상을 팍 쓰면서 말했다.
"라인혁 병장님. 질 나쁜 농담은 그만해주시기 바랍니다. 심 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크큭. 미안, 미안. 너희가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나 알아보고 싶어서 그랬어."
가끔 오대기를 차고 있으면 이런 놀림감이 될 때가 있다.
여전히 입가가 씰룩이는 라인혁을 보면서 이강진은 속으로 생 각했다.
'이놈의 오대기를 빨리 떼버리든가 해야지.'
무사히, 그리고 최대한 빨리 1주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kifk 저녁 점호를 마치고 취침에 들어가는 1분대원들.
이때까지도 이강진은 전투복을 입고 자야만 했다.
'불편해 죽겠네.'
활동복의 안락함과 편안함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자는 순간까지 벨트를 차고 싶진 않았다.
이강진은 살짝 벨트를 풀었다. 이런 거 가지고 들킬 일도 없 고. 설령 들킨다 하더라도 벨트 푼 정도는 다른 선임들도 봐주 곤 한다.
전투복을 입고 잠을 잔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이들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훈련 때에도 전투복을 입고 자곤 하지만, 그때는 다들 피곤해 서 그런지 금세 잠에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평소라면 많이 다르다.
오늘따라 유독 잠이 안 온다.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고 했으나, 계속 되는 도전에 실패만 반복될 뿐이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다 올까.'
때마침 불침번 후임 근무자였던 백우호가 이강진을 불렀다.
"강진아. 잠 안 자고 워해?"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서."
"불면증이 냐?"
"뭐,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지."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잠을 설치는 병사들이 몇몇 있었다. 슬 슬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와야 하는 시기에 군대에서는 더운 열기만 가득했다.
"잠 안 오면 같이 라면이나 먹자. 마인정 병장님하고 같이 근무 교대하고 라면 먹기로 했거든. 뱃속 든든하게 하고 자면 잠 잘 올 거야."
근무 교대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5분.
그 정도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이강진은 자신이 먹을 라면을 미리 꺼냈다.
'역시 간짬뽕만한 게 없지.'
마인정, 백우호, 그리고 이강진. 이렇게 셋은 소대장에게 라면 취식하고 자도 되냐고 미리 허가를 구했다.
소대장은 곧장 알았다고 대답했다.
라면을 먹기 위해 1층 로비로 향한 세 남자.
야밤에 먹는 라면의 맛은 각별하다.
후르릅!
뜨겁고 매콤한 면이 세 사람의 입 안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군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은 한정적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식욕'이다.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단점이 있
"강진아, 우호야. 요즘 나, 살 좀 찐 거 같지 않냐?"
마인정이 자신의 뱃살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옷 위의 실루엣만 봐도 예전에 비해서 배가 좀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강진과 백우호는 사이좋게 '그렇다.'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좀 붙은 거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마인정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상병 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인정의 인상은 굉장히 샤프했다. 하지만 병장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인정의 얼굴에 점점 살 이 붙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쳐도 몸무게 숫자가 세 자리를 달성할 정도로 찌진 않았다.
한 5~8kg 정도 쪄 보였다.
"운동이라도 다시 해야 하나. 병장 달면서부터 내가 너무 나 태해진 느낌이더라. 너희 계급 때에는 쉬는 날에 일부러 연병장 도 뛰고 그랬었는데."
하지 만 그것도 다 옛 말이다.
전역할 때가 가까워지니 이제 뛰는 것도 귀찮아졌다.
걸그룹 나오면 자연스럽게 티비 앞에 모여서 노래를 따라 부 르고. 시간만 있으면 그냥 누워서 자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라인혁과 같이 주말만 되면 축구로 불태운 적도 있었 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귀찮아졌다.
"이래서 병장만 되면 다시 원래 몸무게로 돌아간다고 말하나 보다. 하아. 니들은 일병 때 길들여둔 그 부지런함, 병장 때까지 가져가라."
백우호는 마인정의 이 말을 좀 다르게 받아들였다.
"병장 때까지 저희가 똥휴지 치워야 합니까?"
"그러고 싶다면 그래도 좋고."
"에이.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왜. 성실한 강진이라면 할지도 모르지. 어때, 강진아?"
이강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저라도 그건 오버입니다."
이강진의 말이 옳았다.
백우호와 마인정이 담배 타임, 소위 식후땡을 가질 때, 이강진은 컵라면 용기들을 들고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찾았다.
누가 쓰레기를 버리러 갈지 가위 바위 보를 한 결과.
'설마 내가 질 줄이야.'
이강진이 걸리고 말았다.
'내가 기억력이 좋았더라면, 몇날며칠 몇 시에 가위 바위 보 에서 어떤 것을 내야 이길지 다 알 수 있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보면서 분리수거장 안으로 향했다.
컵라면 용기를 따로 모아두는 곳이 있다. 그곳에 쓰레기를 버 린 뒤에 다시 막사로 향하려고 했다.
스슥!
산 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아주 짧게 들렸다. 그 이후에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멧돼지인가?'
농가 같은 곳에 보면 가끔 멧돼지가 마을까지 내려와서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가곤 하는 경우가 있었다.
1075 대대에는 아직까지 멧돼지에 의한 피해는 없었다. 부대 주변이 철조망으로 감싸여져 있기 때문이었다.
멧돼지 같은 덩치 큰 동물이 영내로 오기에는 힘들 터.
'그러고 보니 저쪽 방향은 짬타이거 집 아닌가.'
예초병으로 잠깐 활동했을 때, 이강진은 본의 아니게 짬타이거 집을 알아냈다. 어쩌면 짬타이거가 움직이다가 난 소리일지 도 모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서 다시 막사 쪽으로 내려가는 이강진.
이강진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수상한 소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 * *
문제의 화요일이 다가왔다.
2중대 중대장, 권빈수 대위가 당직사령을 서는 날. 오대기들 은 반짝 긴장했다.
그러나 저녁 시간이 지나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이강진은 벽시계를 응시했다.
오후 8시.
30분 후면 청소 시간이다.
'오늘은 얌전히 넘어갈 생각인가 보네.'
그래준다면야 참 고맙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싶어서 자리에 누우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생활관 문이 거칠게 열렸다.
황지웅이 튀어나오더니 1생활관에 있던 사람들에게 외쳤다.
"지금 트리 니 티 스타 나왔답니다!"
"뭐가 채널 몇 번이야!"
"7번입니다!"
라인혁은 리모컨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리모컨을 쥐자마자 바로 7번으로 채널을 변경했다. 그러자 아 리따운 미녀들이 노출도가 높은 무대 의상을 입고서 댄스파티 를 벌이고 있었다.
"오오오오오!"
"백우호 일병님, 트리니티 스타 나옵니다!"
"진짜?! 어디, 어디!"
걸그룹만 나오면 눈이 뒤집어지는 군인들. 그 과묵하던 안준 렬조차 트리 니티 스타가 나왔다고 하니 고개를 티비 쪽으로 돌 릴 정도였다.
이중에 한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지웅이 가장 먼저 한 명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필중이는 어디 갔어?"
"샤워하러 갔습니다."
"운도 없는 녀석."
트리 니티 스타의 무대를 못 보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나 고필중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누가 운이 없다는 거냐!"
사타구니 부근에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생활관으로 뛰어온 고 필증.
머리에는 샴푸 거품이 가득했다.
안준렬은 고필증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쳤냐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친 놈 맞다.
걸그룹에 미친 놈.
샤워를 하더라도 이 무대는 반드시 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트리니티 스타의 컴백 무대였기 때문이다.
새 싱글 앨범을 가지고 돌아온 트리 니티 스타. 그녀들의 줌추 는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은 열광했다.
겉으로 티를 많이 내진 않았지만, 이중에서 가장 열광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이강진일 것이다.
'이번에도 MVW 주가가 또 뛰겠군.'
이강진이 기억하는 바로는, 이다음 앨범이 발표되었을 때까 지가 최고점을 찍는 때일 것이다.
그때부터는 잠시 정체기를 겪은 후에 소폭 하향한다.
정체기 때가 매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민수 아저씨한테도 미리 알려둬야겠네.'
행보관도 잊어선 안 된다.
챙겨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통신반장은 안 챙겨도 되겠고.'
이강진의 예상대로 통신반장은 그가 추천한 종목에 돈을 넣 어두고서 '좀 더, 좀 더!'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원금의 절반을 날려 먹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주식에 손을 안 댈 줄 알았다.
그러나 통신반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식으로 잃은 돈은 주식으로 되찾아주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참 희한한 사람이야.'
군대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모여드는 것 같았다.
트리니티 스타의 무대가 계속 펼쳐질 때였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이들의 죽제 분위기에 초를 쳤다.
-에에에에엥!
-오대기 비상!
병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뒤에 병사들은 매뉴얼에 따라 외쳤다.
"오대기 비상!"
"오대기 비사아앙!"
이강진의 몸이 바로 반응했다.
관물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장구류들을 빠르게 착 용했다.
문제는 고필중이다.
"이 런 씨 발! 좆됐네!"
알몸 차림으로 생활관까지 와서 걸그룹 무대를 구경하던 고 필중에겐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라인혁 병장님이 시키신 거 아닙니까?"
"임마. 당직사관님이 소대장님인데, 이런 장난을 어떻게 치냐."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스리슬쩍 가져봤던 고필중 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상황이 걸린 건 진짜였다.
샤워실로 뛰어가는 고필중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황지웅은 또 다시 '운도 없는 녀석.'이라는 말을 흘렸다.
한편, 준비를 끝마친 이강진은 사열대 앞에 정차되어 있는 두 돈반 자량에 올라탔다.
이강진이 첫 번째였다.
그를 필두로 다른 분대의 오대기들이 하나둘씩 두돈반 뒷좌 석에 탑승했다.
가장 나중에 합류한 고필증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째 곱게 넘어가는 법이 없냐."
"그러게 말이다. 2중대 중대장님도 너무하시지."
누가 상황을 건 것인지 이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의 당직사령, 권빈수 대위다.
덜그럭거리며 지휘통제실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는 군용 트럭.
본부중대 다음으로 1중대가 빨리 도착한 순위 2위를 달성했 다.
꼴찌는 2중대였다.
권빈수 대위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2중대를 바라봤다.
"놀고 있네. 다른 중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담당하는 부대가 제일 늦는 꼴은 난 절대로 못 본다. 니들은 오대기 다음 주 까지 한 번 더 찬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이상하게 오대기한테는 굉장히 엄격한 남자, 권빈수.
이강진은 벌써부터 그가 당직을 맡게 될 토요일이 걱정되었< 제37화. 5분대기조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