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공포의 대대 ATT (1)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포상휴가를 얻게 된 이강진.
하지만 이 휴가는 지금 당장 쓸 생각이 없었다.
'나가봤자 재미를 못 보니까.'
단타 하기 좋은 때가 있다. 이 시기에 맞춰서 나갈 생각이었 다.
2중대 중대장 조카 사건 덕분에 1075 대대에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2중대 중대장이 오대기를 소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병사들에게 미안해서 그런 듯했다.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게 있었다.
'내가 오대기 떼기 전에 그랬어야지.'
오대기를 떼고 나니까 이제 일부러 상황을 안 걸게 되었다고 하니 왠지 모르게 배가 아팠다.
남 좋은 꼴만 시켜준 셈이었다.
그래도 3박 4일 포상휴가는 챙기지 않았는가. 이것으로 만족 하기로 했다.
다시 개인정비 시간에 활동복을 입을 수 있게 된 이강진은 황 민수로부터 예상치도 못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이강진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어머니로부터 전화기를 넘겨받 은 황민수가 대뜸 이렇게 말을 했다.
-가게를 이전할까 하는데.
예상은 하고 있었다.
가게가 너무 잘 되다보니 본의 아니게 확장 이전을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위치다.
"어디로 이사하시게요?"
-청고 앞에 큰 도로 있잖냐. 거기 맞은편 상가 건물 중에서 매 물 좋은 게 하나 나와 있더 라. 2층짜리 인 데, 그곳으로 가게 옮기 려고.
가게가 너무 잘 된 덕분에 매출이 훌쩍 뛰어버린 건 좋다.
하지만 여기에 따른 문제점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기 시작한 것이다.
바라 식당은 민가 안쪽에 위치한 가게다. 대기하는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인근 주민들의 불만이 폭주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사가 잘 되 니까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겠다 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왔다. 문제가 겹겹이 터지니 황민수는 결국 가게를 이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함도 있었다.
-원래 찾아오던 손님들이 이전한 이후에도 계속 찾아줄지. 이 게 좀 걱정이 되더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강진에게 비책이 있었다.
"아저씨, 용진이 형 아시죠?"
-조연출 맡으시 던 분?
"네. 용진이 형이 안 그래도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었거든 요. 바라 식당 편이 반응이 너무 좋다보니 나중에 또 한 번 가서 촬영할 수 없겠냐고. 가게 이전하고 나면, 확장 이전 특집으로 한 번 더 찍으면 돼요. 그러면 가게 이전한다는 걸 몰랐던 사람 들도 방송 보고 알게 되겠죠."
이강진의 대답은 황민수의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고맙다, 강진아. 내가 너한테 도움을 줘야 하는데, 오히려 이 아저씨가 매번 너한테 도움만 받고 있으니 체면이 영 안 서는구 나. 허허.
"아저씨도 저하고 엄마한테 도움 많이 주셨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서로 돕고 돕는 이런 관계가 좋다.
"저희 어머니도 가게 일 계속 도울 거라고 하셨죠?"
-응? 어, 그랬지. 미영 씨 혼자로는 너무 버거울 거 같아서 추가로 같이 일할 사람들을 더 뽑을 생각이야.
"너무 예쁜 아줌마들만 뽑지 마세요. 우리 어머니가 보기와는 다르게 질투심이 심하거든요."
이강진이 하는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스마트폰 너머로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건 황민수도 마찬가지였다.
-괘,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말어! 끊는다!
"하하, 알았어요. 저, 다음 달에 휴가 나갈 예정이니까 그때 봐 요, 아저씨."
-그, 그래! 어흠!
나이로 따지 면 이강진보다 한참 위일 텐데도 불구하고 늘 황 민수는 이강진의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황민수나 이강진의 어머니나. 둘 다 귀여운 면이 있다.
통화를 마친 후에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간 이강진은 다른 분 대원들과 함께 바로 청소에 돌입했다.
분대장 교육대에서 무사히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온 황 지웅은 선임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분대원들에게 역할을 분배했다.
"강진아, 넌 태강이, 분섭이 데리고 쓰레기 좀 버리고 와라. 나 는 애들하고 같이 마룻바닥 청소부터 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분대장 교육대를 다녀와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서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려는 자세가 많이 보였다.
좋은 현상이다. 황지웅이 분대장으로서 확실하게 자신의 역 할을 해줘야 밑에 있는 후임들이 고생을 안 하는 법이니 말이다.
황지웅의 달라진 면모를 느낀 건 이강진뿐만이 아니었다.
양 손 가득 쓰레기봉투를 쥔 성태강이 말했다.
"황지웅 상병님, 달라지신 거 같지 않습니까?"
그의 물음에 이강진은 고개를 두세 차례 끄덕여줬다.
곽분섭도 성태강의 말에 동의했다.
"예전에 비해서 듬직해지신 그런 느낌입니다."
책임감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허당이라 불리던 황지웅은 더 이상 없다. 이제는 차기 분대장, 황지웅만 있을 뿐.
'그래도 나중에 가면 다시 예전 모습들이 나오겠지.'
이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년이 되면 다들 그렇게 원래대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황지웅만 그런 건 아니다.
?너도 마찬가지고.'
그것이 말년 매직(Magic)이다.
통합 점호 때, 소대장은 병력들에게 중요한 전달 사항을 언급 했다.
"다음 주부터 대대 ATT가 시작된다. 다들 알고 있겠지?"
"예!"
"이 번에는 중대 ATT에 비해서 훨씬 규모가 큰 훈련인 만큼 다들 최선을 다해 임할 수 있도록 한다. 중간에 연대장님도 오신 다고 하니까 정신 바짝 차리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중대 A「T가 중대장이 평가를 받는 훈련이라면, 대대 ATT는 대대장이 평가를 받는 훈련이다.
1분대에게도 이번 훈련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점호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안준렬은 황지웅과 고필중을 따로 불렀다.
"저번에도 너희에게 말한 적 있지만, 대대 ATT 끝나고 앞으로 큼지막한 훈련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 둘이 이번 기회에 나 하고 인혁이가 하는 거 보고 배우면서 확실하게 인수인계 받을 수 있도록 해. 그래야 나중에 너희가 편해지니까."
"네, 알겠습니다."
"훈련 도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나도 그렇 고 인혁이도 친절하게 알려줄 거야."
그러나 라인혁은 안준렬의 말을 부정했다.
"난 불친절하게 알려줄 건데?"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건 다들 잘 안다.
막상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준다. 라인혁만큼 잘 알려주는 선임도 드물 것이다.
저녁 10시 정각이 되자마자 생활관에 불이 꺼졌다.
취침소등 후에 이강진은 자리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대대 A「T가 끝나고 나면, 안준렬 병장하고 라인혁 병장도 전역하는 건가.'
점점 선임들이 줄어든다.
이별은 분명 아쉽지만, 그렇다고 슬프기만 하진 않았다.
오히려 기쁘다.
'선임들이 많이 전역할수록 내 차례가 빨라진다는 뜻이니까.'
잠자리에 들 때마다 매번 드는 생각이 있다.
'아, 빨리 전역하고 싶다.'
군인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대대 ATT 준비로 한창인 1075 대대.
탄약고 초소 근무를 마치고 행정반으로 돌아오던 중에 이강진은 대대 유일의 여성 간부, 오이향을 만나게 되었다.
"충성!"
"충성. 근무 복귀하고 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근데 화학장교님이 여긴 어떻게……."
오이향 소위, 아니 오이향 중위는 본부 중대 소속이다. 그런 그녀가 여기에 있다는 건, 특별히 1중대에 볼 일이 있다는 뜻이 었다.
"훈련물자 조사 좀 하려고. 마침 잘 됐네. 지금 한가하지?"
순간 이강진은 고민했다.
'작업 시키려고 하는 거 같은데.'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일까.
운이 지지리도 없다.
딱 오전 집합 시간 때 외곽 근무를 서고 돌아왔기에 이강진에게 할당된 작업은 없었다.
오후 집합 전까지 대충 눈치 보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그랬던 그의 계획이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하나 이강진이 누군가.
이미 한 번 병장 만기 전역을 마치고 다시 재입대까지 한 백 전노장이다.
'이깟 위기는 쉽게 극복할 수 있지!'
다른 일이 있다는 식으로 둘러댈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방해꾼이 난입했다.
"할 일 없습니다! 저나 강진이나 한가하니까 무슨 일이든 시 켜만 주시기 바랍니다!"
이강진은 같이 근무를 서다가 복귀한 마인정 병장을 매섭게 노려봤다.
평소 같으면 어디에 짱박혀 있을까 궁리만 하던 사람이 느닷 없이 스스로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니 어이가 없었다.
오이향은 환하게 웃었다.
"그럼 각 생활관 돌아다니 면서 방독면 주머니에 있는 것들, 다 꺼내서 진열해줄 수 있어? 방독면 마스크하고 정화통, 수통마 개, 보호두건. 이 순서대로 펼쳐놓으면 돼."
"네, 알겠습니다! 가자, 강진아! 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마인정과 다르게 이강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인정 병장 여자 타입이 화학장교 같은 사람인가 보군.'
여자 앞에선 한없이 약해지는 존재가 바로 남자다.
오이향 중위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간부들에게도 인기가 상당 히 많은 여성이다.
군대라는 한정된 장소 덕분에 인기가 많은 게 아니었다. 오이향 정도면 사회에 나가도 남자들에게 고백 깨나 받을 정도로 인 기 있을 것이다.
마인정 때문에 이강진은 강제로 훈련 물자 조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1생활관에 가서 분대원들의 방독면 마스크를 다 꺼냈다.
라인혁 병장의 방독면 주머니를 여는 순간.
우르르!
다수의 포장지들이 떨어졌다.
'쓰레기는 그때그때 처리 좀 하지.'
만약 이대로 대대 ATT 훈련에 나섰다가 연대장 앞에서 방독 면 주머니를 까보기라도 했다면 큰일 났을 것이다.
'나 때문에 살은 줄 아십시오, 라인혁 병장.'
분대원들의 방독면 주머 니를 모두 나열했을 때.
뒤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이향이 수첩을 들고서 1생활관을 찾았다.
"다 끝났어?"
"일병 이강진. 예, 끝났습니다."
"고마워."
방독면 부수물자들이 알맞게 다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하는 오이향.
반 절 가까이 체크를 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오대기 때 거수자 잡은 게 너라며?"
"예, 그렇습니다."
"역시 대단해."
오이향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강진의 영웅담이 나올 때마다 유독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잡은 거야? 처음에 겁도 많이 났을 텐데, 그때는 무슨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병사와 간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오이향의 롤 모델 이 되어버린 이강진.
그녀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이강진은 난감했다.
'어쩐다.' 오이향은 간부다. 노골적으로 이강진의 활약상을 듣고 싶어 하는데, 그렇다고 '이야기하기 싫습니다.'라고 퇴짜를 놓을 순 없었다.
당시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탄약고 초소 근무자가 거수자를 발견하고 저한테 어느 방향 으로 도주했는지 알려줬습니다. 막상 거수자 모습이 눈에 들어 오니까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막 뛰었 습니다."
"그래서? 다음은?"
"그 뒤엔……."
마치 호기심이 왕성한 어린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기 분이었다.
슬슬 귀찮아지려고 할 때였다.
"화학장교 님."
지나가던 행보관이 오이향을 불렀다.
"간부들 부수물자부터 확인해주시면 어떻습니까? 계속 창고 열어두기가 좀 거시기해서 그렇습니다. 허허."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이향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행보관도 오이향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전에 행보관은 이강진이 있는 쪽을 돌아보면서 한 쪽 입 꼬 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강진은 바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행보관님."
"천만에."
행보관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서로 돕고 돕는 관계는 이강진, 황민수만 형성된 게 아니었다.
이강진과 행보관도 같은 관계였다.
< 제38화. 공포의 대대 ATT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