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취사 지원 (1)
이강진의 눈으로 확인한 외부인들의 숫자는 총 다섯.
그중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뿔테 안경의 남자가 자초지좋을 설명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여기 폐가 주인분 되십니까?"
"아닙니다만."
군복만 봐도 폐가 주인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을 터.
남자는 그제야 이강진의 복장을 확인했다.
어두워서 그런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미안합니다. 제가 착각했군요."
"그보다 다들 여기서 뭐하고 있던 겁니까?"
남자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영화 촬영지 찾으려고 답사 좀 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요?"
"예. 소개가 늦었군요."
턱수염의 남자는 명함을 꺼내 이강진에게 건넸다.
"영화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류철진이라고 합니다."
류철진. 들어본 적이 있다.
공포, 추리, 미스터리 영화 장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 주는 영화감독이다.
이강진도 그의 영화를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천만을 넘은 영화가 자그마치 둘이나 있다.
하지 만 류철진이 감독으로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 작한 것은 2018년도부터다.
2013년, 5년 전인 지금의 기준으론 무명의 감독에 불과하다.
'미래의 스타 감독과 만나게 될 줄이야. 영광이네.'
설마 그 스타 감독이 귀신의 정체일 줄은 몰랐다.
류철진 일행이 소동의 주범이었다.
그는 스태프들과 함께 이곳 폐가를 들락날락 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죄송합니다. 설마 저희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폐를 끼쳤을 줄 은 몰랐군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셨을 테니까요. 하, 하하하."
중대장은 그의 사과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와 좋게 좋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뒤에 류철진은 이강진을 따로 찾았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혹시 이강진 씨 아닙니까?"
"예? 아, 네. 맞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류철진은 난데없이 이강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네?"
뜬금없는 감사 표현에 이강진은 당황했다.
뭐가 감사한지 잘 몰랐다.
류철진은 이강진이 모르는…… 아니, 사람들 대다수가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를 몰래 흘렸다.
"강진 씨가 버스 전복 사건 때 구해주신 분 중에서 다리를 다 치셨던 할머니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저희 할머니시거든요."
"아!!!"
그런 우연히 있을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부모님하고 같이 저도 따로 강진 씨를 찾아봬서 감사 인사를 드리 려고 했는데, 제가 갑자기 드라마 쪽에 일이 생겨서 저는 미쳐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운이 좋네요."
대한민국 땅이 좁다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좁을 줄은 몰랐다.
"아무튼 할머니를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게는 정 말 소중하신 분이거든요.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 르겠네요."
대한민국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을 감독이 이강진에게 고맙다 는 말을 연신 들려주고 있었다.
황당한 경험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너무 그렇게 부담 가지지 않으 셔도 돼요."
"나중에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 주세 요. 제가 꼭 은혜 갚겠습니다!"
"하하, 네. 알겠습니다."
1075 대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폐가 사건은 이로서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아니,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감독님."
행보관이 도중에 류철진 감독에게 물었다.
"이 폐가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며칠 동안 이곳을 계속 왔다 갔다 하셨을 정도니. 허허허."
훈련 첫째 날부터 오늘까지.
이곳 폐가에서 불빛이 몇 차례 보였다.
이강진을 포함해서 행보관과 간부, 그리고 병사들은 그 불빛 이 류철진 감독 일행의 것이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예? 저희는 오늘 여기 처음 왔습니다만."
으슥한 한기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한 차례 훑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월요일 저녁때부터 보였던 불빛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 인가.
이강진은 지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대대 ATT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대대로 귀환한 병사들. 이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중대장은 1중대 병력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훈련 받느라 고생 많았다! 오늘은 자유 시간 충분히 보 장해줄 테니까 쉬고 싶은 사람들은 쉬어도 좋다. 전원 해산!"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로 샤워다.
땀에 쩔은 이 몸을 깨끗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고 난 다음에 쉬든 잠을 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샤워실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인 사람은 바로 이강진이었다. 그 다음으로 라인혁이 샤워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강진이야. 우리 중대에서 가장 빠른 남자!"
"빨리 씻어야 빨리 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쏴아아!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이 이강진의 몸을 적셨다.
'이제야 살 거 같네.'
무난하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했던 대대 ATT훈련이었으나, 생 각보다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중에서 폐가 사건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그것 때문에 고필중은 아직도 자면서 악몽을 꾸곤 한다고 고 민을 털어놓았다.
류철진 말고 다른 사람들이 폐가를 찾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보였던 그 불빛의 정체는…-….
'아니, 생각하지 말자. 다 끝난 일인데, 뭘.'
군대에서 귀신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필수 요소다.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에도 같은 생활관을 쓰던 훈련병들이 외곽 근무를 서면서 귀신을 봤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었다.
이강진은 본인의 눈으로 직접 귀신을 본 경험이 없었다.
'회귀 트럭은 봤어도.'
어쩌면 그것이 귀신보다 더 보기 힘든 존재일지도 모른다. 쓴웃음을 흘리면서 샤워에 열중하는 이강진.
그러던 때에 라인혁이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곧 있으면 대대 체육대회 있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많은 포상 휴가들이 걸려 있다. 포상 휴가 사냥꾼, 이강진에 겐 놓칠 수 없는 절호의 찬스나 다를 바 없었다.
"너는 어디로 출전할 거냐?"
"저는 당연히 축구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라인혁은 순간 괜히 물어봤다는 반응을 보였다.
"라인혁 병장님도 축구로 출전하시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지. 근데 족구도 있어서 좀 고민 중이지. 대대 체육대 회가 중복 출전이 안 되잖아. 족구도 최근에 재미를 붙였는데, 축구 때문에 포기하기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내가 축구 명단 에서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되고. 여러모로 생각 좀 해보려고."
대대 체육대회 가 슬슬 코앞이다.
지금부터 명단을 짜둬야 나중에 혼선이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종목이 전부 다 중복 출전 불가입니까?"
이강진의 기억으론 아니었다.
유일하게 딱 한 종목만 예외였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라인혁에게 다시 물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라인혁은 뒤늦게 떠올렸다.
"딱 하나 아닌 종목이 있네."
역시.
이강진의 기억력이 더 정확했다.
회귀하기 이전에 이강진은 대대 체육 대회에서 두 종목을 연 달아 출전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던 것 이다.
혼자만 특별 취급받는 종목.
동시에 대대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
"이어달리기는 중복 출전이 가능할 거야. 혹시 모르니까 나중 에 확인해보고 다시 알려줄게."
"예, 알겠습니다."
"만약에 중복 출전이 가능하다면, 이어달리기도 나갈 거야?"
이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갈 겁니다."
1중대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이강진이 달리기 종목에 빠진다 면 섭섭하지 않겠나.
이번에도 그는 주인공 자리를 꿰찰 자신이 있다.
샤워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그대로 침대에 뻗 었다.
대대 체육 대회는 어차피 나중의 문제고.
지금은 일단 휴식을 취하면서 좀 쉬고 싶었다.
잠을 청하기 전이었다.
익숙한 노래가 티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를 향한 내 마음~ 아직 불타오르고 있어서 파워풀한 보이그룹의 퍼포먼스가 노래 가사에 맞춰 펼쳐지고 있었다.
군대에서 보이그룹은 걸그룹에 비해서 별로 크게 관심을 받 지 못한다.
하지만 1075 대대 한정으로 관심이 높은 보이그룹이 하나 있었다.
KGE.
성태강이 리더로 있던 보이그룹의 이름이다.
KGE의 무대를 바라보던 성태강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들. 안무 연습 많이 했나 보네."
그들은 성태강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 면서 퍼 포먼스를 펼치고 있었다.
성태강이 저 자리에 있었더라면 더 완성도 있는 무대가 만들 어졌을 텐데. 그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 다고 군대에 있는 성태강을 무대로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까.
남은 이들끼리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적어도 그 진심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강진은 그런 성태강의 뒷모습과 티비를 번갈아 봤다.
"태강아. 너, 슬슬 신병위로휴가 쓸 때 되지 않았어?"
"에, 그렇습니다. 이번 달 말에 쓸까 고민 중입니다."
"쓸 수 있을 때 써야지. 너도 이제 곧 일병 달잖아. 그전에는 무조건 써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이강진 일병님은 휴가 언제 나가실 생각이십니 까?"
"나? 대대 체육대회 끝나고 나갈까 생각 중인데."
순간 성태강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면 저하고 휴가 같이 맞춰서 나가시면 어떻습니까? 매 니저가 저 픽업하러 온다고 했으니까 이강진 일병님 터미널까 지 바래다드리게끔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괜찮아. 괜히 부담스럽게……."
이강진은 거절을 하려고 했다.
만약 다른 병사들의 가족이나 친구, 애인의 차를 얻어 타고 나 갈 수 있다고 한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받아들였을지도 몰랐 다.
하지만 성태강은 연예인이다.
그래서인지 부담감이 매우 컸다.
그러나 성태강은 한사코 자신과 같이 맞춰서 나가야 한다며 강하게 주장을 펼쳤다.
"이강진 일병님한테 매번 도움만 받지 않았습니까. 이런 걸로 라도 조금이나마 보답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강진은 기운상과 성태강, 곽분섭까지. 후임들에게 사랑 받 는 선임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첫 내무생활로 해맬 때, 곁에서 이강진이 핵심만 절묘하게 지적해서 알려줬으니 말이다.
이강진의 조언은 그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덕분에 1분대 이병 라인들은 다른 분대 이등병들에 비해 선 임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처음에 자대에 전입하자마자 사건과 사고를 연달아 터트렸던 곽분섭조차도 A급 이등병으로 만든 이강진이다.
그의 손이 닿으면, 아무리 폐급이어도 A급 신병으로 거듭나 리라.
성태강의 고집 앞에서 이강진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대신에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후임들에게 너무 열렬한 사랑을 받아도 문제였다.
< 제39화. 취사 지원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