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화. 하극상 (1) >
제42화. 하극상 (1)
초록 견장을 뗀 안준렬은 가벼운 기분으로 작업을 나섰다.
매번 작업을 나갈 때마다 그가 작업반장을 도맡곤 했는데, 이 제는 그것도 열외 되었다.
그렇다고 작업 자체에서 열외 된 건 아니었다.
작업은 말년 휴가를 나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같이 작업을 나선 최철현 상병은 후임들과 함께 열심히 삽질 중인 안준렬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준렬 병장님, 다음 주에 말년 휴가 나가시지 않습니까?"
"어, 그렇지."
"그때까지 어디 적당한 곳에 짱 박히셔도 될 텐데…… 굳이 여기서 땀을 흘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라인혁은 그렇게 하는 중이었다.
행보관을 피해서 공병 창고로 짱 박힌 라인혁.
그러나 안준렬은 자발적으로 작업에 나섰다.
"행보관님한테 들키면 괘씸죄가 붙어서 더 빡센 작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럴 바에야 그냥 행보관님이 작업 분류하신 거 얌전히 따르다가 말년 휴가 가는 게 더 좋지."
안준렬은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안전을 지향한다.
그리고 짱 박힌다고 해도 편하게 쉴 수가 없다.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언제 행보관한테 들킬까 조마조마 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운동한다는 셈치고 그냥 얌전히 작업이 나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안준렬이 내린 결정이었다.
실로 안준렬다운 방식이었다.
본인이 일을 하고 싶다는데, 후임 된 입장에서 안준렬을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안준렬이 같이 작업을 해 준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했 이것이 짬밥의 위력이었다.
작업한 지 1시간가량 지났을까.
최철현이 병사들에게 외쳤다.
"다들 고생했다. 15분 동안 쉬었다가 다시 작업 시작할 테니 까 물 마시고 싶은 사람 있으면 추진해 온 거 마시고, 소변 볼 사람은 저쪽 가서 싸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죄철현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준렬은 자리에 앉아서 쉬는 걸 택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산에 올라오기까지는 굉장히 고되지만, 그래도 막상 올라오 면 나쁘지만은 않았다.
바람도 불고, 경치도 좋고.
가끔 멧돼지의 흔적 같은 게 보인다는 게 좀 문제이긴 했지 만, 안 만나면 그만이지 않겠나.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아래쪽 수풀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안준렬의 얼굴이 굳어졌다.
멧돼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에게 조심하라고 외치려고 할 때였다.
수풀 안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도 멧돼지는 아니었다.
1부소대장임을 확인한 안준렬은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충성."
"어, 준렬이 여기 있었구나. 마침 잘 됐네."
1부소대장은 그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행보관님이 너 찾으시더라. 행정반으로 가 보너."
"지금 말입니까?"
"어."
"예, 알겠습니다."
행보관이 이제 더 이상 안준렬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1분대 분대장은 황지웅에게 넘겼으니까. 분대에 볼일이 있다면 황지웅을 찾을 것이다.
왜 부른 것인지 감이 안 잡혔다.
'가 보면 알겠지.'
일단 부소대장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 * *
중대장실로 향한 안준렬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분위기가 좋진 않다고.
"앉아라."
"예."
일단 중대장의 말에 따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짝 긴장한 안준렬, 싸한 느낌이 계속 그를 압박했다.
드디어 중대장이 말문을 뗐다.
"2중대에서 병사 한 명을 전출시켰다. 오종한이라고, 영창 끝나고 조만간 우리 부대로 올 거다."
"전출입니까?"
"그래."
영창이라는 단어가 안준렬의 귀에 굉장히 거슬렸다.
특정 병사가 전출, 전입하는 건 사실 엄청 희귀한 일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무생활에선 상당히 많은 문제들이 발생 한다.
겉으로 봤을 땐 병사들이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선임, 후임 가 릴 것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지만, 한정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보는데 감정 중돌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사람이지 않은가.
작한 성격의 병사가 있는 반면, 불같은 성격을 가진 병사가 있 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폭발할 때가 있다.
마치 지뢰처럼.
2중대 병사들은 잘못된 곳을 밟았다. 그래서 터진 것이다.
중대장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오종한, 계급은 병장이고, 너보다 2달 늦게 입대했으니까 너한테는 후임이 될 거다."
전역이 두 달 남짓 남았는데 전출이라니.
부대 부적응 문제는 아닌 것으로 확신하는 안준렬이었다.
대충 예상 가는 게 있다.
"혹시 마음의 편지로 누가 긁었습니까?"
가끔 마음의 편지에 자신이 싫어하는 선임의 이름을 적고, 못 살겠다, 괴롭다, 하루하루가 힘들다 등의 의견을 피력하는 후임 들이 있다.
안준렬은 아직까지 그런 경우는 당해 본 적이 없다.
대놓고 후임들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는 이상, 마음의 편지에 적힐 일은 없었다.
만약 마음의 편지로 인해 전출당했다고 한다면…….
'오종한이라는 녀석, 보통 문제아가 아닌가 보군.'
하지만 중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안준렬의 추즉을 부정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거다."
"어떤 겁니까?"
마음의 편지로 긁힌 것보다 심각한 게 무엇일까? 안준렬은 당장 떠올리지 못했다.
해답을 들려주는 중대장.
"하극상이다."
말년에 이런 위기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 * *
황지웅과 고필중은 처음 보는 낯선 병장 한 명이 1생활관에 멋대로 앉아 있어서 당황했다.
잠시 후 둘은 생활관을 찾은 안준렬에게서 자초지좋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 아저씨가 맞선임과 몸싸움을 벌여서 이곳으로 전출 오게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안준렬은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웅, 고필중은 서로를 바라봤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하극상으로 왔다니.
게다가 자신들보다 선임이다.
안준렬, 라인혁이 다음 주에 말년 휴가를 나가면 이다음부터 는 황지웅, 고필중의 세상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 와중에 오종한이 다 된 밥에 제대로 재를 뿌려 버린 것이
"너희 둘의 마음도 잘 알아, 나도 이해해. 하지만 종한이는 이 제부터 우리 1중대니까, 가급적이면 선임 대접해 줘라. 전역 2 달 남았다고 아저씨 취급해 버리면 서열이 꼬여 버리니까. 군대 에서 중요한 건 짬과 계급이라는 거, 너희들도 잘 알잖아."
"예, 그렇습니다."
"그래, 짜증나겠지만, 그래도 2달 만 참아. 특히 지웅이, 네가 분대장이니까 애들한테 잘 설명해 줘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 이제부턴 황지웅이 분대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장은 안준렬을 소환했다.
이유는 오종한이 분대장인 황지웅보다 선임이었기 때문이다.
안준렬이 나서서 중대장 대신 황지웅에게 잘 말해 달라는 뜻 이었다.
안준렬도 그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최대한 너희들이 양해 좀 해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안준렬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황지웅과 고필중의 입에서 한숨 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짧은 머리를 벅벅 긁어 대는 고필중.
"진짜 운 한 번 더럽게 없네. 하필이면 우리 중대로 오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황지웅은 안준렬의 말을 최대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오종한이 1분대로 오기로 한 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 이다.
여기서 싫다고 거절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주어진 상황에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수밖 에 없다.
"안준렬 병장님 말대로 일단 그 아저씨…… 아니, 오종한 병장 님도 이제 우리 1중대의 일원이 되었으니까 선임 대하듯 하자."
"그래야지, 뭐. 그나저나 하극상 때문에 왔다니, 무서운 사람 이네."
"그러게 말이야."
황지웅도 그게 신경 쓰였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맞선임과 몸싸움을 벌였던 걸까.
그건 안준렬도 전해 듣지 못했다.
그래서 황지웅에게 말해 주고 싶어도 말해 줄 수가 없었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황지웅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업을 모두 마친 병사들은 식사 집합을 위해 각 생활관으로 모여들었다.
1분대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된 1분대원들.
동시에 오종한 병장에 대한 것을 전해들을 수 있게 되었다.
황지웅이 앞으로 나서서 오종한 병장을 직접 소개했다.
"앞으로 우리 1분대에서 같이 생활하게 될 오종한 병장님이다. 오종한 병장님, 애들하고 인사라도 나누시는 건 어떻습니 까?"
"괜찮은데……."
작게 한숨을 내쉰 오종한은 마지못해 1분대원들 앞에 서게 되 었다.
"어차피 두 달 후면 바로 전역할 테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말 고 대해 줘. 난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전역하는 게 목표니까. 그 리고 막 너희들에게 말년 꼬장 부리거나 그러진 않을 테니까 걱 정 안 해도 되고, 라인혁 병장님이나 안준렬 병장님도 말년 꼬 장 부리는 거 없이 얌전히 계신다며? 그런데 다른 중대에서 온 내가 난리 피우면 안 되겠지, 하하하."
조용히 있다가 가겠다.
이것이 오종한의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오종한이 하극상을 저지른 탓에 이곳 1 중대로 전출을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회귀를 한 이강진조차 마찬가지 였다.
'그때도 오종한 병장이 오긴 했었지만,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 게 되었는지는 끝내 이야기 안 해줬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강진은 굳이 에너지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왜 냐하면 오종한은 정말로 자신이 공약했 던 것처럼 흣날 아 주 조용히 있다가 전역을 하기 때문이었다.
하극상을 저지르고 영창까지 갔다 왔었기에 남아 있는 휴가 도 없었다.
그냥 부대에서 얌전히 생활하다가 혼자 집에 갔다.
병사들이 오종한을 열렬하게 배웅해 주고 이런 것도 없이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오랜 시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이도 아니고, 타 부대에서 온 아저씨다 보니 그런 것까진 따로 해 주지 않게 되었다.
전출은 민감한 문제다.
차라리 오종한이 원하는 것처럼 신경 끄고 조용히 그를 보내 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개인 정비 시간에 라인혁은 자신의 활동복을 들어 올렸다.
"이거, 완전 A급 활동복인데 가질 사람?"
"일병 백우호!"
"일병 서일주!"
"이병 성태강!"
경쟁률이 아주 치열했다.
라인혁은 활동복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건의 대 부분을 후임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안준렬도 비슷했다.
"강진아, 이거 사제 전투환데, 네가 쓸래? 전마등 병장한테 받았던 건데, 의외로 쓸 만하더라. 가벼워서 작업용으로도 괜찮고.
야간 행군할 때도 몰래 신고 가도 좋고."
"일 병 이강진,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강진은 안준렬의 전투화를 탐내고 있었다.
길이 잘 들여진 데다가 안준렬의 말대로 매우 가볍다.
이거를 신으면 산행도 문제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샘솟았다.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둘씩 짬 처리하는 두 말년.
이강진은 이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이 정말로 전역할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체감했다.
< 제42화. 하극상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