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3화. 두 명의 전역자 (1) >
제43화. 두 명의 전역자 (1)
오늘도 변함없이 1075대대에 아침 해가 떠올랐다.
다른 병사들에게는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예외 로 두 명에게는 특별한 아침이었다.
바로 안준렬과 라인혁이었다.
말년 휴가를 나가기 전에 두 사람은 마지막 아침 점호를 받았다.
애국가를 제창하고 국군도수체조까지 전부 끝마쳤다.
아니, 아직 피날레가 남았다.
"전체 상의 탈의한다. 실시!"
"실시!"
2부소대장은 아침 점호를 할 때, 대부분 아침 구보를 시키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병사들도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얌전히 상 의를 탈의하기 시작했다.
그때 라인혁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병장 라인혁!"
"어, 왜?"
"저하고 준렬이도 구보 뜁니까?"
오늘 두 사람은 말년 휴가를 나갈 예정이다.
2부소대장은 씨익 웃었다.
"앞으로 살면서 전투복, 전투화 갖추고서 아침에 구보 뛸 날 이 언제 오겠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니들도 뛰어라. 이것도 다 추억이니까."
그런 추억, 필요 없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냥 참기 로 했다.
결국 안준렬과 라인혁도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구보를 뛰기로 했다.
"전체 뛰어!"
"엇!"
"가!"
"하나! 둘! 셋! 넷!"
구보를 뛰면서도 라인혁은 자신의 신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씨발, 말년 휴가 나가는 당일 아침에 구보 뛰고 가는 병사는 우리밖에 없을 거다. 그치, 준렬아?"
"몰라, 그런 거 생각하지 마라. 괜히 짜증만 나니까."
이럴 때에는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뛰는 게 죄선이다.
아침 구보를 마친 뒤에 두 사람은 씻지도 않고 군복을 입은 채 행정반으로 향했다.
씻을 시간조차 아깝기 때문이었다.
2부소대장은 안준렬과 라인혁의 전신은 쭉 훑었다.
"총기 현황판은?"
"수정했습니다!"
"말판은?"
"옮겨 놨습니다!"
"짐은?"
"어제 창고로 다 올려 뒀습니 다!"
"좋아, 그럼 신고는 생략하고 바로 휴가 나가라."
비록 아침 구보를 시키긴 했지만, 1중대 중에서 2부소대장이 가장 빨리 휴가를 보내 주는 간부이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군말 없이 구보를 뛴 것이다.
1생활관으로 다시 돌아온 둘은 마지막으로 1분대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우리 돌아올 때까지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그리고 지 웅이."
"상병 황지웅."
안준렬은 황지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애들 잘 보살펴 주고, 무슨 일 있으면 종한이한테 상담해. 저 녀석, 보기엔 저래도 심성은 꽤 착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의 중재 덕분에 오종한의 주가는 처음에 비해 많이 올 랐다.
황지웅과 고필중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오종한을 대하기로 했다.
위병소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안준렬과 라인혁.
미리 부른 택시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라인혁은 곧장 목적지를 이야기해줬다.
"우주 약국 사거리로 가 주세요. 팍팍 밟아 주세요!"
"하하, 예- 예시"
택시 기사도 휴가를 나온 군인들의 심정을 익히 잘 아는 모양 인지 최대한 빠른 속도로 택시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된 마지막 휴가.
안준렬과 라인혁은 마치 첫 휴가를 나가는 것처럼 설렛다.
* * *
안준렬과 함께 아침을 먹은 라인혁은 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라인혁의 집이 서울역에 있는 건 아니었다.
집에 가기 전에 따로 만날 사람이 있었기에 잠시 들른 것에 불과했다.
서울역 2번 줄구로 향하는 라인혁.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손을 들어 올리며 그를 반겼다.
"야, 라인혁!"
오랜만에 보는 얼굴.
전마등이었다.
"마등이 형! 간만이야. 어째 살이 더 찐 거 같은데?"
"몇 킬로 안 쪘어. 그리고 살이 쪘다는 표현보단 살이 붙었다 는 표현을 쓰라고. 그래야 듣는 사람 기분이 덜 나쁘지."
"하하하! 여하튼 말은 잘해."
전역 이후에 한동안 못 보다가 오늘에서야 만나게 되었어도 전마등은 여전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점심 먹을래?"
"준렬이랑 아침 먹은 지도 얼마 안 됐어."
"그래? 어제 알바비 나와서 오늘 제대로 쏘려고 했는데, 아쉽 네. 그럼 커피나 마시자. 근처에 괜찮은 카페 있더라."
전마등과 함께 나란히 카페로 향하는 라인혁.
카페 안에는 그처럼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꽤 보였다.
군인은 군인을 알아보는 법.
"저 사람, 천둥부대네."
"야야, 그만해라. 짬내 난다."
키득키득 웃는 전마등을 보면서 라인혁은 그제야 뒤늦게 자 신의 행동을 깨달았다.
"자꾸 나도 모르게 군인이 눈에 들어오네."
"군인이니까. 그래도 나랑 같이 있을 때에는 저 사람이 몇 사 단 어느 부대인지, 계급이 뭔지, 전투화는 불광 냈느니 물광 냈 느니 하는 건 따지지 마라. 안 그래도 어제 저녁에 재입대하는 꿈꾸고 왔으니까."
전마등의 말을 들은 라인혁은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 그러다가 나중에 진짜로 재입대하는 거 아니야?"
"끔찍한 소리하지 마라. 미쳤다고 재입대를 하냐?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군필자는 분명 자살을 택할 거다. 씨발."
물론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다.
이강진처럼.
회귀했더 니 입대 전날이었지만, 그래도 이강진은 재입대를 선 택했다.
하지만 전마등은 재입대라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부대 분위기는 어떠냐?"
군대라는 특수한 장소 때문에 자주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수 가 없었다.
보안 문제도 있고 말이다.
"평범해, 군대라는 게 뭐 그렇지."
"분대장은 누가 달았어?"
"지 웅이."
"필중이가 아니라?"
"준렬이가 지웅이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
"흠, 그래?"
안준렬의 선택이다.
전역한 전마등이 이제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는 입장이 었다.
"아, 최근에 사건이 하나 있었네. 2중대에서 전출 온 녀석이 하나 있어. 오종한이라고, 지웅이보다 선임이야."
"어쩌다가 전출 왔대?"
"몰라, 선임하고 몸싸움 벌여서 영창 갔다가 우리 부대에 왔다고 하던데."
"문제아가 하나 또 들어왔나 보네."
1분대는 평범한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더 힘들다.
이젠 하극상을 일으킨 전출자까지 오게 되었으니, 왠지 특이 하다 싶은 사람들은 죄다 1분대로 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라인혁은 오종한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이야기 좀 해 봤는데, 괜찮은 녀석이더라고. 하극상 때문에 전출당했다고는 하는데, 선임들을 굉장히 깍듯이 대했어. 그거 보고 나하고 준렬이는 바로 알아차렸지. 분명 뭔가 속사정이 있 겠구나 하고. 강진이도 눈치챈 거 같더라고."
"강진이, 그 녀석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병장급은 되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딱딱 알아차리고 말이야."
"지금도 여전히 신기한 녀석이지."
"뭐…… 그 오종한이라는 친구가 무슨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인간관계라는 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많은 법이야."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전마등은 이런 걸 깨닫게 되었다.
"가끔 부대가 그립기도 하더라."
순간 라인혁은 입에 머금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뿜을 뻔했다.
"……정신 나갔네, 이 형. 재입대는 싫다고 방금 말했잖아."
"오해하지 마. 군대가 그립다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그립다는 뜻이야."
군대에 쌓은 인연.
전마등은 그것을 계속 이어 가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절로 멀어지는 법.
아무리 통신이 잘 발달되어 있는 시대라 하더라도 자주 얼굴을 보지 않는 이상, 인연의 끈은 점점 얇아지게 된다.
지금 이렇게 라인혁과 만나는 것도 언젠가는 추억의 한 페이 지로 남게 될 터.
전마등은 그게 가장 아쉽게 느껴졌다.
그 마음이 어렴풋이 전달되기라도 한 걸까.
라인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역하고 나면 또 연락할게."
"그래라, 그때는 제대로 한 턱 쏠 테니까 준렬이도 데리고 와."
"알았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것뿐이 말년들이 휴가를 간 동안, 1중대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벌목 작업하러 갈 테니까 톱 챙겨라."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백우호, 기운상과 함께 벌목팀으로 분류되었다.
톱질은 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저 톱을 들고 앞뒤로 왔다갔다 움직이기만 하면 될 줄 알았 던 기운상은 제대로 피를 보고 말았다.
"헉, 헉, 헉……."
선선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시작된 지 10분 만에 기 운상은 땀에 흠뻑 젖고 말았다.
벌써부터 힘을 빼면 안 된다.
이강진은 기운상을 따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운상아."
"이병 기운상!"
"초반부터 너무 빡세게 달리지 마. 오늘 하루 내내 작업해야 하는데, 벌써 지치 면 안 돼지. 이건 내가 썰 테니까 너는 일단 저 것들부터 옮겨라."
"네, 알겠습니다!"
톱을 건네받은 후에 기운상이 하던 작업을 이어받아서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슥삭슥삭슥삭.
리드미컬한 톱질 소리에 백우호조차 감탄했다.
"소리 좋네, 갑자기 한 곡 뽑고 싶은 기분인데?"
"프리 스타일 랩이냐?"
"엉, 요즘 들어서 창작 욕구가 마구 샘솟는 중이거든."
"너도 할 거 더럽게 없나 보긴 하구나."
"군대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그건 이강진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있는 시간이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거의 2년 가까운 시간을, 그것도 한창인 20대의 시간을 군대 에서 소비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아까울까.
그래서 시간이 남을 때마다 이강진은 자기 개발에 힘쓰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물론 이건 모든 병사들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말년 휴가를 나가 있는 안준렬과 라인혁도 그렇게 군 생활을 보냈다.
툭!
이강진이 잘라낸 나뭇가지가 밑으로 떨어졌다.
낙엽들 사이에서 나뭇가지를 챙긴 백우호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준렬 병장님하고 라인혁 병장님은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친구 만나고 있거나 아니면 자고 있거나 그러겠지."
"좋겠다, 나도 빨리 전역하고 싶네."
지금까지 해 온 군 생활보다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이 더 많은 게 이강진과 백우호의 입장이었다.
전역은 물론 하고 싶다.
하지만 굳이 전역일을 일일이 새진 않았다.
새다가 지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분이 모레에 복귀하지?"
"어."
이강진은 옆 나무로 옮겨 다시 톱질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백우호의 혼잣말이 BGM처럼 계속 들려왔다.
"좋겠다, 와서 하루만 자고 바로 전역이라니."
"그날 전역 기념 파티할 거니까 그것도 준비 미리미리 해 둬 야지."
"그러게, 이번에도 식당에 가서 라면 파티하는 거야?"
"글세, 그건 황지웅 상병님하고 논의해 봐야 할 거 같은데."
안준렬과 라인혁이 전역 준비를 하는 것처럼, 1분대원들도 이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서둘러야만 했다.
한 주 내내 벌목 작업만 계속 매진했다.
물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터벅터벅.
병사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막사를 향해 걸어갔다.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자신의 팔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강진아, 내 팔, 멀쩡히 붙어 있냐?"
"설령 떨어졌다고 해도 다시 붙이면 되니까 걱정 마."
"그러고 또 벌목 작업에 투입되겠지?"
"행보관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지."
"하아……."
진지 공사 시즌 2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빡센 나날들이 이어 졌다.
하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는 주말이다.
이틀은 벌목 작업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행복감이 병사 들을 다독였다.
막사로 내려왔을 때.
익숙한 얼굴들이 병사들을 반겼다.
"벌목 작업하고 왔냐? 고생했겠네."
"충성!"
두 사람을 보고서 곧바로 거수경례를 하는 병사들.
내일 전역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안준렬과 라인혁이 드디어 복 귀했다.
< 제43화. 두 명의 전역자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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