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4화. 상병의 품격 (1) >
제44화. 상병의 품격 (1)
안준렬과 라인혁이 전역한 이후.
이강진은 백우호와 함께 진급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이번에 진급 시험을 보는 사람은 1분대에선 3명밖에 없다.
황지웅과 고필중은 다음 달에 병장 진급 시험을 치룰 예정이 었다.
상병 진급 시험 때에는 이강진과 같은 달에 봤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075대대는 상병을 일병보다 한 달 더 오래 차게 되어 있었 다.
그러다 보니 황지웅과 고필중의 병장 진급 시험은 다음 달로 잡혔다.
이강진과 백우호는 상병 진급에, 그리고 기운상은 일병 진급 에 도전하게 된다.
바로 5일 뒤에 진급 시험이 진행될 예정이다.
기운상은 백우호를 찾아갔다.
"백우호 일병님."
"엉? 나?"
"예, 이번에 제가 진급 시험을 처음 보는데, 혹시 어떤 거 준비하면 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준비야 별건 없어. 필기, 화생방 그리고 체력 테스트, 이렇게 만 보니까. 필기는 어차피 예시 문제하고 답안 나눠 줄 거니까 그거 외우기만 하면 될 테고. 화생방은 방독면만 제한시간 내에 잘 쓰기만 하면 끝. 사격하고 체력 테스트는 뭐……. 네가 알아서 해야지."
필기나 화생방의 경우에는 단기간에 어찌저찌 해결을 볼 수 있지만, 체력 테스트는 그럴 수가 없다.
이강진처럼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해 왔다면 체력 테스트는 별다른 문제가 안 될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얌전히 듣고 있던 이강진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무언가가 떠오르려고 했다.
'뭐지?'
너무 두루뭉술해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급 시험에 관한 기억인 건 틀림없다.
일병 때까지는 사실 진급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상병 진급 시험 때, 이강진은 꽤 고생한 기억을 가지 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하게 된 것인지 쉽사리 떠오 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진급이 누락되거나 그러진 않겠지.'
이전에도 진급이 누락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회귀 이후의 일이 이전처럼 그대로 흘러가라는 법은 없었다.
바라 식당만 봐도 알 수 있다.
설마 바라 식당이 방송을 타서 전국구 맛집으로 거듭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조심해도 나쁠 건 없겠지.'
이강진은 조용히 필기 문제집을 꺼내들었다.
정신교육 때 매번 나오던 것들이었다.
무슨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이런 것만 잘 외워도 반은 먹 고 들어간다.
'방독면 쓰는 건 일도 아니 니까.'
일병 진급 시험 때에도 이강진은 중대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방독면을 착용했었다.
긴장만 안 하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방독면 부수 물자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
방독면은 제시간 안에 잘 썼는데, 부수 물자들이 바닥에 우수 수 떨어져 있으면 바로 탈락이다.
체력 테스트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근데 왜 고생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됐다.
진급 시험에 관한 잊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였다.
-곧 저녁 점호를 시작하겠습니다.
생활관 책임자인 황지웅이 병사들을 독촉했다.
"매트리스, 신발 정리 다 하고. 오늘 통신반장님 기분 안 좋으 니까 최대한 눈에 거슬리는 거 없이 행동해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당직사관의 그날 기분이 어떠냐에 따라 저 녁 점호의 분위기 가 결정된다.
오늘 통신반장의 텐션은 별로 좋지 않다.
이유가 있었다.
'또 돈 날려 먹었나 보군.'
굳이 눈으로 확인 안 해도 이강진은 알 수 있었다.
최근에 통신반장이 새롭게 눈여겨보고 있는 종목이 하나 있었다.
엔토르라고 하는 제법 규모가 있는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다.
한 달 전에 그곳에 투자해서 재미를 좀 본 통신반장은 어디서 이상한 찌라시를 듣고 오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이번 주 월요일 에 대부분의 돈을 그곳에 투자했다.
그리고 결과는?
'망했지.'
엔토르에서 개인 정보 유출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사건의 여파로 인해 엔토르는 한동안 포털 사이트 검색 랭 킹에 계속 오르락내리락 했었다.
좋은 의미에서 올랐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게 많이 아쉬웠 다.
그것 때문에 통신반장은 이번 주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통신반장도 참 불쌍한 사람이군.'
이강진이 마이더스의 손이라면, 통신반장은 마이너스의 손이다.
어떻게 투자하는 족족그렇게 망할 수가 있는지, 참 신기한 사람이다.
'이쯤 되니 불쌍해질 지경이네.'
나중에 필요에 따라 통신반장에게 괜찮은 정보를 살짝 흘려 주는 것도 좋아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필요에 따라'다.
통신반장이 1생활관에 들어서자, 생활관 분위기가 바짝 얼어 붙기 시작했다.
"충성!"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하는 황지웅.
그러자 통신반장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황지웅은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기라도 했나?' 하는 불 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통신반장은 황지웅의 거수경례에 딱히 태클을 걸지 않 았다.
"충성 소리만 들으면 경기가 날 거 같아서 말이야, 미안하다."
처음에는 왜 저런 말을 하나 싶었다.
군인이 충성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면 안 되지 않은가.
그러나 이강진은 뒤늦게 그 이유를 눈치챘다.
'엔토르 대표 이름이 황충성이었지.'
뜻하지 않게 황지웅이 통신반장의 트라우마를 건드려 버린 것 이다.
한동안 충성의 '충' 자도 듣기 싫은 통신반장.
황지웅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보고 계속 드려도 되겠습니까?"
"보고는 됐고."
통신반장이 중간에 말을 끊어 버렸다.
"여기 이번 달에 진급시험 보는 사람, 몇 명이냐?"
"일병 이강진!"
"일병 백우호!"
"이병 기운상!"
도합 3명이었다.
"이번 진급 시험 때 종목이 하나 추가되었다."
듣도 보도 못 한 소식이었다.
순간 이강진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흐릿한 장막이 점점 사라 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였어!'
회귀하기 전에 이강진을 애먹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
통신반장이 마침내 추가된 새로운 종목을 공개했다.
"태권도다."
* * *
원래는 사격, 필기, 화생방, 체력 테스트, 이렇게 4개의 종목 만 보면 될 일이었다.
하나 이강진이 상병 진급 시험을 보려고 할 때쯤, 갑자기 태 권도라는 종목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그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이강진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태권도의 경우에는 단증이 있으면 굳이 시험을 안 봐도 바로 합격 처리가 된다.
그러나 이강진은 단증이 없다.
그래서 애를 먹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백우호가 짧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일 났네."
어제 저녁 점호 당시 통신반장이 했던 말을 떠올린 백우호는 이강진처럼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백우호도 단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운상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올라오자마자 기운상은 고민에 빠진 이강진과 백우호를 찾았다.
"저희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 태권도 시험 봐야지, 뭐."
백우호의 말대로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태권도 단증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 단증이 없는 사람들은 진급 시험을 보는 당일 날 측정관에게 직접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것 때문에 일과 시간이 끝나자마자 다 같이 모여서 강제로 태권도 수업을 받았던 것이 이강진의 흐릿했던 기억 속에서 떠 올랐다.
'그래도 해야지.'
태권도 수업받기가 귀찮다고 진급 시험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군대에선 자유 의지가 허용되지 않는다.
위에서 시키면 해야 한다, 그것이 군대의 법칙이다.
불합리한 법칙 속에서 어떻게든빨리 탈줄하려면 전역밖에 답 이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었다.
'어떻게 해야 무사히 태권도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 알고 있 다는 거지.'
회귀 이전에 개고생을 한 덕분에 지금의 이강진은 편한 길을 택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강진.
백우호와 기운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강진에게 향했다.
"이강진 일병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너, 설마 우리들 몰래 태권도 연습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강진은 두 사람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습할 필요도 없어."
"엥?"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권도를 잘 못해도 합격할 수 있는 방법을 이강진은 알고 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그러면 태권도만큼은 무 조건 합격할 테니까."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이강진은 그들에게도 비법을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진급 시험 당일.
진급 즉정 대상자로 지정된 병사들은 전투복이 아닌 활동복을 입고 사열대 앞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강진과 백우호, 기운상, 1분대 트리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병사들과 함께 작업에 나서기 위해 정글모와 목장갑을 챙겨 든 고필중이 세 사람을 응원했다.
"진급 누락당하지 말고 한 번에 붙어라. 알겠냐?"
"죄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그 기세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고필증.
하나 바로 다음 달에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게 될 거란 사실을 고필중은 당장 깨닫지 못했다.
첫 번째로 시작된 건 필기시험.
진급할 계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합격 점수 기준 또한 높아진 다.
하나 이건 진급에 큰 방해가 되지 못했다.
웬만하면 죄다 만점이기 때문이었다.
문제지, 답안지를 주고 그것을 외우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 한 시험이다.
약간의 기억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다 만점을 받을 수 있었기 에 필기는 가장 걱정이 없는 진급 시험 과목으로 평가받고 있었 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서 바로 채점을 시작한 인사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 면서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16명 전원 만점."
예정된 결과였다.
이 다음은 화생 방이다.
화생방은 오이향이 즉정관이 되어서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녀는 평가판을 들고서 화생방 즉정 테스트에 나선 병사들 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방독면을 9초 내로 쓰기만 하면 된다. 부수 물자 이런 거 바 닥에 떨어뜨리면, 떨어뜨린 개수마다 1초씩 더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도록."
"예, 알겠습니 다!"
"그럼…… 시작!"
병사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안경을 착용하고 있던 병사들은 테스트가 시작되기 전에 미 리 안경을 상의 주머 니에 넣어 뒀다.
이강진은 안경을 안 썼기에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후드득!
방독면 주머 니를 거의 뜯다시피 한 이강진은 곧장 머 리끈 뭉 치를 잡고서 자신의 뒷통수에 위치시켰다.
머리끈을 위에서부터 아래 것까지 확실하게 잡아당긴 후에 마 지막으로 정화통 연결이 잘 되어 있는지 검사했다.
그리고…….
"까스, 까스, 까스!"
구호까지 외쳐 주면 완벽하다.
모두의 예상대로 이강진이 가장 빨랐다.
백우호도 이미 몇 차례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제한 시간 내에 무사히 방독면을 착용했다.
단, 기운상이 문제였다.
"헉
수통 마개를 떨어뜨린 것이다.
이런 실수를 오이향이 놓칠 리가 없었다.
"거기 너."
"이, 이병 기운상!"
"테스트 시작하기 전에 내가 말했었지? 떨어뜨린 부수 물자 하나당 1초 추가라고. 수통마개 떨어뜨렸으니까 1초 추가할 거 야.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알겠습니 다!"
이강진, 백우호와 다르게 기운상은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 만회할 기회는 많다.
인사 장교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다음, 태권도 시험 볼 테니까 사열대 앞으로 집합해라."
드디어 대망의 태권도 차례다.
이강진은 백우호, 기운상과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에게 용기를 줬다.
괜찮다,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하면 무조건 합격할 거라고. 이강진이 전수한 비법.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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