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5화. 찾아야 산다 (1) >
제45화. 찾아야 산다 (1)
1075대대에는 작은 사격장이 하나 존재한다.
각 사로별로 표적지가 자동으로 올라오는 그런 죄첨단 기능을 갖준 곳은 아니다.
그냥 북한군 표지판 하나 세워 둔 게 다인 곳이었다.
사로는 총 10사로까지, 다시 말해서 동시에 10명의 사수들이 사격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3중대를 시작으로 한동안 사격이 시행될 예정이었 다.
목요일이 3중대, 금요일이 2중대, 1중대는 본부중대와 같이 월요일, 화요일에 사격 훈련 일정이 잡혔다.
작업을 하러 움직이는 와중에 대대 한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이강진과 같이 움직이던 곽분섭은 바짝 긴장했다.
"오, 오대기입 니까?"
오대기 비상을 외쳐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곽분섭.
그러나 이강진은 침착하게 후임을 진정시켰다.
"아니, 오대기 비상 아니야. 사격장 사이렌 소리니까 안심해 도 돼."
"사격장에서 사이렌을 울립니까?"
"너, 신교대에 있을 때 기억 안 나? 사격 훈련 시작하기 전에 혹시 근처에 사람들이 있을까 봐 미리 경고의 의미에서 사이렌을 울리고 안내 방송하잖아. 사격 훈련이 시작될 예정이니까 멀리 떨어지라고. 신교대에서도 했을 텐데?"
"아……! 이강진 상병님 말씀 들으니까 이제 기억이 나는 거 같 습니다."
사격은 굉장히 위험한 훈련이다.
한 번의 오발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훈 련.
그 때문에 간부들과 선임들은 사격 훈련만 되면 날이 바짝 설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신병 교육대에 있을 때에도 같았다.
수류탄 훈련과 더불어 조교들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몇 안 되는 훈련.
그중 하나가 사격 훈련이다.
자대라고 다를 건 없었다.
"자, 우린가던길이나 가자."
"예, 알겠습니다."
1중대 사격 훈련은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다.
다른 부대가 훈련하는 거 봐서 무엇 하랴.
지금은 행보관이 시킨 작업에만 열중해야 한다.
한주가 흘렀다.
1075대대에 다시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아침 점호를 위해 사열대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하는 병사들.
밖으로 나온 순간, 이강진은 무심코 하늘을 보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오늘 비올 거 같은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늘에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그런 날씨였다.
아침에 비가 오면 보통은 실내 점호를 하곤 한다.
그러나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비는 오지 않았다.
국군도수체조를 넘어 아침 구보를 할 때까지도 야속하게 비 는 내리지 않았다.
이강진은 잠시 잊고 있었다.
비가 오라고 할 땐 절대로 안 오고, 오지 말라고 할 땐 죽어라 오는 게 군대 날씨라는 사실을.
'사격 훈련 할 때에도 비 안 오겠네.'
보나마나 뻔했다.
내심 짬 처리를 기대했지만, 그러면 군대 날씨가 아니다.
이강진의 예상대로 사격 훈련이 예정되어 있는 오전 10시까지 비는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열심히 사격하세요!'라고 군인들을 응원하는 듯 했다.
물론 이런 응원은 달갑지 않았다.
단독 군장을 착용한 채 사격장으로 향하는 1중대 병사들. 성태강과 곽분섭은 1075대대 사격장에 처음 와 봤다.
그동안 대대 사격장에서 사격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필중이 두 사람에게 소감을 물었다.
"어때? 우리 대대 사격장. 솔직하게 말해도 돼. 다시 말해서, 신랄하게 까도 된다는 뜻이지."
어차피 1중대가 관리하는 곳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작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좀…… 더 럽습니다."
좀이 아니었다.
'많이'였다.
표적지는 다 녹슬었고, 사로 바닥에는 초록색 이끼가 드문드문 보였다.
관리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고필중 역시 다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마.부대 검열 온다고 하면 본부중대 아저씨들이 알 아서 깨끗하게 치워 줄 테니까. 자, 일렬로 서라. 우리 분대가 먼 저 사격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모처럼 사격을 하러 왔는데, 그냥 방아쇠만 당기다가 돌아가 면 재미없지 않은가.
서일주가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저희, PX 내기 어떻습니까? 꼴찌가 PX 쏘기."
"한 명만?"
"한 명은 너무 적은 거 같고, 두 명 어떻습니까?"
오래간만의 PX 내기여서 그런 걸까, 병사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케이, 콜!"
"저도 하겠습니다!"
"일병 기운상!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외곽 근무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된 오종한을 제외한 1분대 원 모두가 다 내기에 참가하기로 했다.
다들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막내인 곽분섭조차 자기는 무조건 꼴등이 아니라고 확신할 정도였다.
다들 사격 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잠시 후.
2부소대장이 1분대에게 손짓했다.
"1 사로부터 올라와라."
"에, 알겠습니다."
사격장에 진입할 때에는 자신이 몇 사로인지 크게 외치고 들어가야 한다.
"1 사로!"
"2 사로!"
"3 사로!"
이강진은 5사로에 배정되었다.
4사로에는 백우호가, 6사로에는 성태강이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다.
'나만의 페이스대로 가자!'
여기서 이강진이 가장 많이 방아쇠를 당겨 봤다.
경력자답게 1등을…… 아니, 20발 만발을 노리기로 했다. 중대장이 확성기를 들었다.
"탄창 결합! 노리쇠 전진! 조정간 단발!"
철컹!
사수들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개시!"
초탄은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타앙
방아쇠를 가장 먼저 당긴 사람은 바로 이강진이었다.
그의 첫 발을 시작으로 한동안 총성이 계속해서 사격장에 메아리 쳤다.
20발을 전부 소진한 이강진은 총을 두고 뒤로 물러섰다.
모든 사수들이 전부 사격을 끝냈을 때.
각각 왼쪽, 오른쪽에 있던 간부들이 붉은 깃발을 크게 휘둘렀 다.
중대장은 다시 한번 확성기를 들고서 사수들에게 지시했다.
"사수들 표적지 확인."
자신이 몇 발이나 맞혔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격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강진은 표적지를 보고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완벽해.'
20발 전부 다 범위 안에 들어왔다.
종과 표적지를 들고서 퇴장하는 1분대원들.
탄창을 전부 반납한 뒤에 황지웅이 분대원들에게 물었다.
"만발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이강진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상병 이강진."
"오시 역시 이강진, A급답네."
"감사합니다."
"19 발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백우호.
1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1등을 놓치고 말았다.
황지웅과 서일주는 18발을, 성태강과 기운상, 곽분섭은 사이 좋게 16발을 기록했다.
꼴찌는 15발을 기록한 고필중이었다.
자신의 동기가 꼴찌로 확정되자, 황지웅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달에 병장 되는 녀석이 이등병한테 사격 기록이 밀리면 어쩌자는 거냐?"
"시, 시끄러워! 병원에서 너무 오랫동안 쉬다 와서 그렇다고!"
고필중에게 병원은 만능 핑계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단독 꼴찌를 차지하게 된 고필증.
원래는 2명을 선출하기로 했었다.
고필증을 제외하고 남은 한 명을 어떻게 정할지가 문제였다. 고필중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16발 기록한 애들 중에서 한 명 고르면 되잖아. 섯다 어때?"
디지털 손목시계의 초시계 기능을 활용한 간단한 놀이다.
원래는 화투로 하는 놀이 방식이지만, 군대엔 화투가 없기 때 문에 디지털시계로 해야만 했다.
방식은 간단하다.
버튼을 누르고 속으로 5초를 샌 뒤 다시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나온 수의 끝자리 숫자 두 개를 가지고 누가 더 높은 수를 만들었는지를 겨룬다.
룰은 섯다에서 사용되는 룰이 그대로 적용된다.
대신 1댕잡이라든지 암행어사 같은 건 없고 49는 적용된다.
49가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돌려야 한다.
하나 그렇게 되면 너무 길어진다.
"49 없이 가자, 49 나오면 7끗으로 치는 거. 오케이?"
"예, 알겠습니다."
시계는 공평하게 서일주의 시계를 사용하기로 했다.
기운상이 먼저 돌렸다.
삑!
처음 나온 숫자는 66.
"6땡 나왔습니다."
"첫 판부터 강하게 나오네."
땡이 나온 이상, 다음 타자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성태강의 차례.
익!
"……앗차!"
탄식을 먼저 내뱉었다.
결과를 확인한 서일주가 '푸웁!' 하고 웃었다.
"다섯 끗!"
미묘하다.
마지막으로 곽분섭이 시계 버튼을 눌렀다.
삑!
마지막 수의 정체는…….
"여섯 끗입니다!"
그야말로 한 끗 차이였다.
결국 고필증과 성태강이 나란히 꼴찌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칫 지루하기만 할 뻔했던 사격 훈련.
그러나 PX 내기와 아슬아슬하게 승자, 패자가 갈린 섯다 덕분 에 1분대원들은 잠시나마 재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사격을 마친 1분대는 생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총기 수입에 들어갔다.
그동안 다른 분대들이 사격을 진행하고 있었다.
총기 수입을 하는 동안, 서일주는 고필중과 성태강에게 무엇을 얻어먹어야 좋을지 행복한 고민에 휩싸인 상태였다.
"고필중 상병님, 저, 초코파르페 먹어도 됩니까?"
"뜬금없이 무슨 초코파르페냐?"
"얼마 전에 오종한 병장님이 초코파르페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거대로 한번 만들어서 먹어 볼까 합 니다만."
"……그래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헤헤, 감사합니다!"
PX에서 가장 비싼 아이스크림으로 손꼽히는 초코파르페.
맛은 있지만, 내 돈 주고 사먹기는 아까운 그런 아이스크림이 기도 했다.
그런 건 이렇게 얻어먹을 때 사야 더 맛있는 법이다.
이강진도 서일주처럼 오종한의 방식으로 초코파르페를 먹어 볼 생각을 해 보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또 먹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한편 사격장에서는 마지막 조의 사격 훈련이 개시되었다.
그동안 좋기 수입을 끝낸 병사들은 식사 집합을 위해 사열대 로 향했다.
맨 앞에 서 있던 황지웅이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아직 오종한 병장님, 복귀 안 하셨지?"
"예."
"이상하네, 행정분과하고 마지막 사격 훈련 들어간 지 꽤 되 었을 텐데…… 사격이 아직도 안 끝났나?"
고필중이 사열대로 나오면서 알게 된 것을 황지웅에게도 공 유해줬다.
"아직 복귀는 안 한 거 같던데?"
"뭐지?"
곧 있으면 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사격 조였던 병사들과 간부들은 여 전히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이강진은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그때 일이 그대로 반복되나?'
어렴풋이 들여다 본 기억의 흔적. 그리고 보게 된 금빛 반짝임.
이강진이 느낀 불길함은 곧 현실이 되었다.
소대장이 사격장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열대에 도착한 소대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병사들에게 외쳤다.
"지, 지금 당장 사격장으로 향한다! 어서 움직여!"
마치 비상사태라도 걸린 것 같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병사들의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소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겨우 호흡을 진정시킨 소대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병사 들에게 절망적인 소식을 들려줬다.
"탄피 하나가…… 분실되었다."
< 제45화. 찾아야 산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