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우리 동네 슈퍼스타 (1)
소대장이 언급한 건 훈련도, 뭐도 아니었다.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해서."
"잘못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다큐멘터리라니.
이강진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군대를 소재로 만드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예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연예인들이 군대에 가서 군인으로서 받는 훈련 체험 기가 절찬 방영 중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웬 다큐멘터리?
소대장이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을 들려줬다.
"버스 전복 사건 있잖아? 그거를 집중 취재해서 특선 다큐멘 터리 형식으로 만들고 싶대, 국방부에서도 오케이했고."
국방부는 얼씨구나 싶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군대 이미지가 엉망진창인데, 이미지 쇄신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하나 이강진은 국방부에게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만약 출연한다면, 사단장님 특별 지시 사항으로 출연진에게 전원 포상 휴가를 지급하겠다고 하더라."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사단장님, 사랑합니다! 충성!"
군대에서 포상 휴가는 치트키다.
이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결국 이강진은 다큐멘터리 촬영 일정을 피해 휴가를 쓰기로 했다.
촬영이 끝난 바로 다음 날, 휴가를 나가기로 결정했다.
부대 즉에서도 이강진이 그날 바로 휴가를 나갈 수 있게 배려 를 해줬다.
다큐멘터리 촬영에 주로 얼굴을 비칠 병사들은 당연히 1중대 병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민 영웅으로 거듭난 이강진은 반드시 나 와야 하는 등장인물이 었다.
드라마, 영화로 따진다면 주연급이라 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작진과 가진 미팅에서 도 이강진의 출연은 누누이 강조되었다.
"강진 씨를 최대한 많이 내보낼 거예요. 촬영은 바로 다음 주 에 진행될 예정이니까, 그때까지 최대한 컨디션 관리에 집중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특선 다큐멘터리의 종책임 역할을 맡게 된 황문형 PD는 촬영 이 어떻게 진행될지, 인터뷰는 어떤 식으로 촬영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들려줬다.
이강진과 함께 불려 나오게 된 1중대 병사 몇몇은 설명을 듣 는 내내 졸음의 함정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대대장한테 정신교육을 받을 때보다도 더 졸렸다.
그렇게 2시간에 가까운 미팅이 끝났다.
황문형 PD는 대대장 그리고 1중대 중대장과 잘 부탁한다는 의미가 담긴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예, 조심해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저 미팅 한 번 한 것에 불과한데도 대대장부터 시작해서 병사들까지 진이 다 빠졌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하려다 보니 그랬다.
사실 이들 중에서 방송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강진이 유일했 다.
그러나 이강진도 제대로 된 방송은 백두원의 푸드기행 한 번 뿐이었다.
그 한 번조차도 이강진이 메인은 아니었다.
주연은 어디까지나 바라 식당과 사장인 황민수였다.
미팅을 하고 나니 갑자기 근심과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생활관으로 돌아온 고필중은 갑자기 후회를 했다.
"아…… 난 그냥 카메라 울렁증 있어서 촬영 못 하겠다고 빠질 걸 그랬네."
그러나 돌아오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오고 말았다.
제작진과 미팅을 하면서 출연진을 전부 다 확정짓고 왔는데,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을 꺼내는 즉시 대대장이 무슨 엄벌을 내릴지 모른다.
그게 무서워서라도 그냥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게 있었다.
"이번 한 번만 견디면 포상 휴가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것만 믿고 버티시기 바랍니다, 고필중 상병님."
이강진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포상 휴가 하나만 보고 가자!
그 말 덕분에 고필중은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그래, 포상 휴가가 있었지. 잊을 뻔했네. 고맙다, 강진아."
"아닙니다."
같은 배를 타게 되었으니, 이제 이들은 서로 돕고 도와야 한다.
* * *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가하게 된 1중대 병사들은 총 15명.
행보관을 비롯한 1중대 간부들은 전원 참석이었다.
원래 중대장과 대대장은 그곳 현장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있었던 것처럼 슬쩍 말을 맞추기로 했다.
그래야 장교들의 체면이 조금이나마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를 통해 이강진은 다시금 깨달았다.
'역시 방송은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최종적으로 모든 점검을 끝낸 뒤.
드디어 본격적으로 촬영일에 들어갔다.
휴가, 면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전투화에 광을 내야만 했다.
티비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전투복도 휴가 때만 입는 A급을 챙겨 나왔다.
방송 작가가 이강진을 다급하게 불렀다.
"강진 씨! 메이크업은 다 받으셨죠?"
"네."
살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메이크업을 받아 봤다.
백두원의 푸드기행 때에도 이렇게까지 과하게 메이크업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매번 돼지기름이 좔좔 흐르는 위장크림만 바르다가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받으니 신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군인도 아름답게 변할 수 있다는 걸 체감했다.
"현장 촬영부터 시작할 거라고 하시네요! 저랑 같이 위병소로 가요!"
"알겠습니다. 바로 갈게요."
버스 전복 사건 현장을 방문한 제작진.
그곳에서 이강진, 고필중과 몇몇 병사들 그리고 중대장, 행보관과 함께 당시 사건의 일을 회상하면서 대화를 이어 가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황문형 PD도 카메라 앞에 섰다.
촬영 시작 신호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문형 PD는 버스가 전복되었던 위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여기가 사건이 벌어졌던 당시의 현장이죠?"
대답은 중대장의 몫이었다.
"예, 사고가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지체 없이 병사들을 바로 위병소로 내려보냈습니다. 그 덕분에 더 큰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중대장은 마치 자신이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처럼 말했다.
얼굴에 철판을 몇 개나 깔았는지 가히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원래는 행보관이 병사들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행보관은 허허 웃으면서 중대장의 증언을 반박하지 않 았다.
간부들 사이에선 이미 말이 다 맞춰져 있을 터.
이강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카메라 뒤에선 대대장과 연대장이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메라의 동선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출연진들.
"옆에 보니까 논두렁이 있네요? 딱 여기에 버스가 걸쳐 있었 던거죠?"
이번에는 이강진이 대답할 차례였다.
"예, 현장으로 출동하니까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행보관님께서 그때 버스가 옆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부터 막자고 하셔서 병사들이 힘을 합쳐서 버스를 먼저 고정시키는 작업을 서둘러 했습니다. 그다음에 저하고 고필중 상병을 포함해서 몇 몇 병사들이 버스 위로 올라갔습니다."
"미디어에도 공개되었던 그 장면이군요."
"그렇습니다."
라인혁과 안준렬도 현장에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좀 더 늦게 전역했더라면, 그들도 티비에 얼굴 도장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 때문에 전역을 미룬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설명뿐만 아니라 당시에 어떤 식으로 인명 구조 작전을 펼쳤 는지 직접 몸동작으로 재연까지 했다.
100퍼센트 완벽하게 재연한 건 아니었다.
판쵸우의로 만든 밧줄을 이용해서 부상자들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간단하게 재연만 했다.
현장 검증 촬영만 하더라도 30분이 걸렸다.
"오케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게요."
황문형 PD의 외침과 동시에 제작진들은 촬영 장비를 빠르게 챙겨들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피곤함을 느끼는 이강진.
하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했다.
오후에는 인터뷰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장소는 대대장실, 이곳이 1075대대에서 가장 깔끔하고 정돈 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인터뷰 장소로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이강진은 베레모를 고쳐 쓰면서 의자에 앉았다.
조명이 상당히 눈부시다.
'방송이라는 게 참 힘든 거로군.' 벌써부터 지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 황문형 PD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 15-1 들어갑니다. 3, 2, 1, 큐!"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황문형 PD가 카메라 밖에서 질문을 하면, 이강진은 그에 맞 춰서 대답만 하면 된다.
대답은 웬만한 건 대본으로 다 짜여 있었다.
작가가 들고 있는 커닝 페이퍼를 보고 생각하는 척 연기하면 서 읽는 게 인터뷰에 임하는 자들의 역할이었다.
"버스 전복 사건이 방송을 타고 난 다음부터 국민적 관심을 한 몸에 받았잖아요. 주변에서 강진 씨의 활약에 대해 뭐라고 하 던가요?"
"잘했다, 대단하다, 대체적으로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해외 언론에서도 강진 씨의 활약을 집중 조명해서 방송했더군요.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스타가 된 기분이 어떤가요?"
"하하, 스타는 아닙니다. 전 그저 대한민국을 지키는 한 명의 군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생활도 이제 1 년 남짓 남았다.
전역하고 나면 이강진은 당분간 1075대대가 있는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황문형 PD가 대본에 없는 질문을 했다.
"전역하시고 나면 당분간 방송 활동을 이어 가시는 건 어떤가요? 보니까 말씀도 잘하시는 거 같고, 여러 프로그램에서 강진 씨를 많이 탐낼 거 같은데요."
이 질문은 아마 편집될 것이다.
애초에 다큐멘터리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근 들어서 유독 이런 질문을 많이 듣고 있었다.
방송인 쪽으로 이미지를 잡아 보는 건 어떤가.
연예인이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강진의 경우에는 거의 천운이 따른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좋은 기회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처음에는 방송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이강진이었지만, 요즘은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황민수와 사업자 등록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었다.
황민수가 내부에서 회사를 운영하고, 이강진이 방송 일을 통 해서 이미지를 높인 다음에 그를 적극 지원한다면 시너지가 나지 않을까?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네.'
이강진은 씨익 웃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친 후에 이강진은 곧장 휴가를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이강진이, 그리고 내일은 고필중이 휴가를 나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고필중 상병님, 저 먼저 휴가 나가 보겠습니다."
"오냐, 복귀일 때 보자."
"예, 알겠습니다."
휴가를 나가는 날은 다르지만, 복귀하는 날은 같다.
훗날을 기약한 후에 이강진은 위병소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청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타고, 마지막으로 시 내버스를 탔다.
집에 도착한 뒤에 스마트폰을 켰다.
그와 동시에 벨이 울렸다.
황민수한테서 온 전화였다.
"예, 아저씨."
-여보세요? 강진이냐?
"네, 저예요. 무슨 일 있어요?"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가게로 와라, 최대한 빨리!
심상지가 않다.
설마 가게에 안 좋은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아니, 어쩌면 어머니에 관련된 일일지도 몰랐다.
"불안해!' 이강진은 옷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가게로 냅다 달 려 갔다.
< 제46화. 우리 동네 슈퍼스타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