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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숨겨 야 산다 (3)
고필중의 스마트폰과 백우호의 MP3를 고무줄로 잘 연결시켜 뒀다.
이것들을 위로 올리는 건 키가 가장 큰 기운상이 맡기로 했다.
손전등을 든 기운상은 천장 합판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 다.
그러곤 황급히 머리를 뱄다.
의자를 붙잡고 있던 고필중이 기운상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왜 그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쥐, 쥐가 있습니다!"
"난 또 심각한 문제라고……. 야, 군대 와서 쥐 처음 보냐? 초짜 도 아니고 왜 이래?"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는 군인인데, 쥐를 처음 본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천연기념물인 고라니는 기본이고, 독수리뿐만 아니라 두더지 도 보는 게 군인의 일상이다.
심지어 백우호는 화장실에서 큰 것을 보다가 바로 아래에 쥐 가지나가는 불상사(?)를 겪기까지 했다.
이제는 쥐가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숨을 크게 내쉰 기운상은 다시 용기를 냈다.
고개를 들이밀고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기운상은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바로 코앞에 스마트폰과 MP3를 뒀다.
그 순간 뒤통수 쪽에서 '찌직!'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허 !"
어느새 쥐가 바로 근처까지 와 있던 것이다.
호기심이 넘치는 녀석인 모양인지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 았다.
오히려 기운상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기운상은 황급히 머리를 뱄다.
파르르 떠는 기운상의 등을 다독여 주는 이강진.
"잘했다."
"이, 일 병 기운상…… 가, 감사합니 다…… 하하하……."
그에겐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 * *
반입 금지 물품들은 천장에 잘 숨겨 뒀다.
이제 거친 파도가 얌전히 지나가기 만을 기다리 면 된다.
점심을 먹고 막사로 복귀한 병사들은 각자 개인 정비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계획을 짰다.
몇몇은 PX로, 몇몇은 휴게실로 그리고 몇몇은 사열대 앞에서 축구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하나 그것도 잠시.
오후 13시 30분에 방송이 흘러나왔다.
-행정반에서 알립니다. 전 병력은 지금 즉시 사열대 앞으로 집 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병사들의 행동이 일제히 멈췄다.
드디어을 게 왔다.
오늘 죄소 한 번 이상은 집합이 걸릴 것으로 다들 예상을 굳 힌 상태였다.
사열대 앞으로 전부 집합한 병사들. 이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 이 감돌았다.
행보관은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 같은 표정으로 이들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소지품 검사를 실시한다. 이 시간부로 생활관에 있 는 모든 물품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사열대 앞으로 꺼내 나열하도록 한다. 실시!"
"실시!"
평일도 아니고 주말에 소지품 검사라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원망을 하려면 본부중대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다가 걸린 신 원미상의 병사를 원망해야만 했다.
때 아닌 소지품 검사에 병사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소지품을 가져오기 전에 우선 분대별로 판쵸우의를 펼쳤다. 나중에 서로 물건들이 뒤섞이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 었다.
군장과 의류대를 가져온 병사들은 안에 담은 내용물들을 판 쵸우의 위로 우수수 쏟아 냈다.
황지웅은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입에서 쌍욕을 뿜어냈다.
"씨발, 근무 휴식도 못 하고 이게 무슨 개지랄이래……!"
어제 당직 근무를 서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주말 내내 꿀잠으로 시간을 보낼 거라는 행복한 망상에 빠져 있었으나, 소지품 검사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한편 개인 물품들을 모두 진열하던 와중에 성태강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물건을 발견해 냈다.
"아, 이게 여기 있었구나. 어디 갔나 한참을 찾았었는데."
"그게 뭔데?"
바로 옆에서 짐을 풀던 백우호가 관심을 보였다.
A4용지 위에 다수의 메시지 같은 게 적혀 있었다.
"롤링 페이퍼입니다. 소속사 후배들이 저 군대 간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 적어서 모아 둔 거라고 들었습니다."
"가만, 소속사 후배라고?"
"예, 밀라이언, 트윙클 바니, 걸즈 레볼루션하고 또……."
죄다 요즘 잘나가는 걸그룹들뿐이었다.
백우호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병사들 모두가 성태강에게 몰 려들었다.
"이게 트윙클 바니가 직접 쓴 메시지라고?"
"우와, 이거, 혜연이가 쓴 거잖아!"
"우리 부대에 이런 보물이 있을 줄이야!"
병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름만 들으면 누군지 다 아는 그런 연예인들이 직접 적은 롤링 페이퍼.
이 정도면 액자에 따로 담아서 1중대 사열대 앞에 소중하게 전시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태반이었 다.
그러나 개인 물품이기 때문에 그런 걸 강요할 순 없었다.
대신 다른 건 가능했다.
"황지웅 병장님, 혹시 이거, 우리 생활관 한쪽 구석에 붙여 둬 도 됩니까?"
"우리 생활관에?"
"예, 힘든 일 있을 때마다 이거 보면 힘이 좀 날 거 같아서 말 입니다. 안 된다고 하시면 제 관물대에다가 붙여 두……."
"태강아, 아니, 성태강 님! 왜 안 됩니까? 당연히 되죠! 우리, 섭섭하게 이러지 맙시다, 하하하!"
걸그룹들의 친필 메시지를 성태강 혼자서 독점하게 할 순 없었다.
이것은 1분대의 보물이다.
개인 소지품 검사 덕분에 때 아닌 보물을 발견하게 된 1분대 원들.
시끌벅적해진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행보관이 다시 사열대로 나와 쓴소리를 날렸다.
"퍼뜩 물건들 안 깔고 뭐하냐! 계속 그렇게 농땡이 피우면 일 광건조에 대청소까지 시킬 테니 후딱 하는 게 좋을 거다! 알겠 냐!"
"아, 알겠습니다!"
"행보관님이 말씀하시잖아! 빨리빨리 안 움직이 냐!"
"손발이 안 보이도록 움직이란 말이야!"
병사들은 순간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아직 거친 파도 속에서 표류 중이란 사실을.
* * *
사열대에 병사들의 개인 물품이 전부 쫙 나열되었다.
그야말로 진풍경이 따로 없었다.
대청소를 할 때에도 이런 장면은 보기 힘들다.
오로지 개인 소지품 검사를 할 때에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현상이다.
모든 작업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행보관이 다시 사열대에 등장했다.
"다 꺼냈겠지?"
"예!"
병사들의 대답은 당연히 거짓말이다.
1분대만 하더라도 고필중과 백우호의 반입 금지 물품이 생활관 천장 위에 보관되어 있었다.
행보관은 병사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려줬다.
"대대장님께서 15분 후에 우리 부대에 오셔서 직접 소지품 검 사를 시행하겠다고 하시니, 그때까지 사열대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행보관이 소지품 검사를 할 줄 알았건만. 대대장이 직접 시행 할 줄은 예상 못 했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큰일인데.'
만약 대대장에게 고필증과 백우호의 물건이 걸린다면.
두 병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창이다.
어쩌면 전출까지 가능할 수도 있다.
간접적으로 이강진한테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
1 차적으로 병장급, 상병급 인재를두 명이나 한꺼번에 잃어버 리는 건 큰 손실이다. 분대 운영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 러면 이강진은 덩달아 바빠질 것이다.
어쩌면…….
'휴가를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상황이 올지도 몰라!'
그뿐만 아니라 절친이자동기인 백우호를 전출시키고 싶지 않 았다. 같은 분대에 마음이 통하는 동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상 당히 심하다.
군 생활이 힘들 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 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이강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안 들키기만 하면 되는데.'
아까부터 이강진은 자꾸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이강진을 압박했다.
왜 이런 감각이 드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오늘 벌어진 소지품 검사 자체가 회귀 이전에는 없었 던 에피소드였다. 그래서 사건이 어떻게 종결될지 이강진조차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행보관이 다시 행정반으로 들어가고 난 뒤.
병사들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주말에 대대장님이 막사 방문하는 것도 짜증 나는 일 인데, 소지품 검사까지 직접 하신다니……."
"최악의 주말이네."
아니, 아직 아니다.
더 최악의 경우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입 금지 물품이 대대장의 눈에 띄었을 때, 그때는 최악 이 상의 날이 될 것이다.
위화감을 견디다 못 한 이강진은 결국 다른 수단을 마련하기 로 했다.
"황지웅 병장님."
한창 졸음과의 싸움에 매진하던 황지웅은 비몽사몽 한 얼굴로 '왜?'라고 답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갔다 와라."
"예."
화장실로 향하던 이강진은 도중에 방향을 틀었다.
처음부터 목적지는 화장실이 아니었다.
1 생활관이었다.
조용히 생활관으로 들어서는 이강진.
그의 걸음걸이에서 자신이 생활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남들 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듯한 조심성이 느껴졌다.
의자를 가져온 이강진은 분리되는 합판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스마트폰과 MP3가 들려져 나왔다.
"혹시 모르니까 좀 더 확실하게 해야겠어."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편이 좋지 않겠나.
지금이 바로 그런 태도가 필요한 때다.
정확히 15분 뒤, 대대장이 1중대를 찾았다.
"충성!"
"충성."
행보관의 거수경례를 받아 준 대대장은 사열대에 집합해 있 는 병사들과 발밑에 있는 소지품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행보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병사들 개인 소지품들입니다."
"생활관에 남아 있는 건 없습니까?"
"예, 제가 마지막으로 다 돌아다니면서 확인했습니다."
침대 밑까지 다 확인했다.
만약 백우호의 말대로 그곳에 스마트폰과 MP3를 숨겼다면, 행보관 선에서 바로 탈락했을 것이다.
대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장 먼저 1분대원들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맨 앞줄에 있던 황지웅이 관등성명을 외쳤다.
"병장 황지웅!"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대대장 앞에선 바 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대대장은 평상시 병사들이 알던 대대장이 아니다. 본부 중대 사건 때문에 분노 스텟 MAX를 달성한 대대장이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나라도 보였다간 바로 군기교육대로 끌려갈 수 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황지웅의 개인 물품은 대다수가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들, 혹 은 그 사진들로 만든 굿즈밖에 없었다.
그밖에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그렇게 황지웅을 시작으로 나머지 1중대 병사들의 개인 소지 품들을 쭉 훑은 대대장.
그런 그가 갑자기 불길한 말을 꺼냈다.
"생활관도 한번 봐야겠군, 분대장급만 나를 따라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1분대는 황지웅이 대표로 대대장과 함께 이동했다.
물론 행보관도 그와 동행했다.
1생활관에 먼저 들어선 대대장.
텅텅 빈 생활관을 바라보던 대대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 었다.
"본부중대 2생활관을 보니까 천장이 들리는 부분이 있더군."
황지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잠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말을 마친 대대장은 지휘봉을 거꾸로 들었다.
그러더니 지휘봉으로 합판을 하나씩 일일이 들어 올리기 시 작했다.
그것을 본 황지웅은 속으로 절망했다.
'씨발! 좆됐다!'
거친 파도가 1분대를 급습하기 일보직전이었다.
< 제47화. 숨겨야 산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