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숨겨 야 산다 (4)
지휘봉으로 이곳저곳을 찔러 보던 대대장.
그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여기도 마찬가지군."
갑자기 손에 힘을 주는 대대장.
그러자 지휘봉이 누르고 있던 합판이 위로 들려지기 시작했황지웅은 헛숨을 삼켰다.
다른 분대장들을 비롯해서 행보관 역시 좋지 않은 표정을 지 었다.
대대장이 15분 내로 온다고 했기에 행보관은 미처 천장 위까 지 확인하지 못했다.
물론 생활관 중에서 저런 식으로 소위 '들리는 합판'이 있다 는 건 행보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시간이 문제였다.
좀 더 대대장이 늦게 온다고 했더라면.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행보관은 저곳까지 직접 확인해 봤 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확인을 못 한 건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저곳에 반입 금지 물품이 정말로 있느냐, 없느냐다.
없으면 된다, 그러면 아무 문제없다.
하지만.
'있으니까 문제지!'
황지웅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2분대 분대장이 황지웅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물었다.
"야, 지웅아. 혹시 저기에
황지웅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 었다.
2분대 분대장은 한숨을 삼켰다.
망했다.
그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절망감이 몰려올 때, 대대장이 그를 가리켰다.
"거기 너."
"병장 권진욱!"
"의자 가져와 봐라. 내가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병사는 적어도 이 자리엔 없었다. 행보관조차도 대대장의 행보를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 대대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다. 일부러 그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
"읏샤!"
직접 의자를 밟고 올라서는 대대장.
안은 생각보다 깜깜했다.
"손전등 남는 거 있나?"
당직사병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단독 군장에 달려 있 는 작은 손전등을 대대장에게 건넸다.
딸칵!
불이 켜졌다.
안쪽까지는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먼지와 거미줄로 자 욱했다.
대대장은 안쪽까지 손전등 불빛을 세세하게 비추면서 근처를 살폈다.
이렇게 된 이상, 황지웅이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제발 눈치 못 채라! 제발!'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깊숙하게 숨겨둘걸.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제 하늘에 자신의…… 아니, 1중대 전체의 운명을 걸어 봐야 했다.
잠시 뒤.
대대장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작고 검은 비 닐 봉지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행보관과 분대장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안에 뭐가 들었나 봐야겠군."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대대장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손에 잡힌 건 바로…….
"쓰레기가 왜 여기에 있나?"
빵 봉지와 아이스크림 껍데기 몇 개가 비닐봉지 안에 담겨져 있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었다.
그때 행보관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쥐들이 먹을 것인 줄 알고 물어다가 놓은 거 같습니다."
"흐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대대장은 천장 안쪽에서 쥐 몇 마리가 활보하고 다 니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병사들이 쥐가 다니는 통로까진 어찌할 수 없었을 터.
"여기 생활관 책임자가 누군가?"
"병장 황지웅!"
"이거, 치워라."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한테 쓰레기가 담겨 있는 비 닐봉지를 건네받은 황지웅.
동시에 그는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위에 스마트폰과 MP3를 숨겼다. 그런데 대체 그것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 * *
대대장이 직접 1중대 막사를 탈탈 털어 보려고 노력해 봤으 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반입 금지 물품은 보이지 않았다.
탄약고 초소까지 확인을 해 봤지만, 아주 깨끗했다.
대대장은 다음 행선지인 2중대를 향해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전에 행보관을 따로 불렀다.
"사열대에 있는 소지품들, 다시 생활관으로 옮기게 한 다음에 병력 쉬게 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충성!"
"어흠!"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대대장이었다.
의심은 드나 물증이 없다.
분명 말년 몇몇이 스마트폰 같은 걸 몰래 반입해 와서 사용하고 있을 게 뻔한데.
물증이 나오질 않으니 제아무리 대대장이라 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께름칙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떼는 대대장 일행.
다시 사열대로 돌아온 행보관은 병사들에게 대대장의 지시 사 항을 그대로 전달했다.
"현 시간부로 개인 물품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키고 쉴 수 있 도록 한다. 실시!"
"실시!"
각자 개인 물품들을 가지고 생활관으로 향했다.
복구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황지웅은 생활관 문을 걸어 잠갔다.
선임이 문을 잠글 때마다 후임들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 거 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 '갈굼 타임인가?' 하고 오해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천장 공간에 있던 스마트폰하고 MP3, 다른 곳으로 옮긴 사람 누구냐?"
"응? 그게 뭔 소리야?"
고필중은 아직 이곳에서 대대장이 무슨 행동을 벌였는지에 대 한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부터 먼저 설명해 주는 게 순서라고 판단했는지 황지웅 은 아까 있었던 아찔한 순간을 짧게 죽약해서 말해줬다.
"대대장님이 천장 위까지 살펴보셨다."
"뭐!"
"지, 진짭니까?"
"대대장님은 천장 공간을 어떻게 알고 계셨던 겁니까?"
후임들로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하나 유일하게 의문을 표하지 않는 병사가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이강진이었다.
황지웅은 그제야 반입 금지 물품을 옮긴 이가 누군지 알아차 릴 수 있었다.
"강진이, 너구나."
"상병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역시 이강진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다.
혹시나 해서 옮겨 두길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이강진이 미리 선수를 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대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1중대의 제삿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강진이 1중대를 구한 셈이었다.
하나 그건 둘째 치고.
궁금한 게 있었다.
"어디다가 숨긴 거야?"
스마트폰의 주인인 고필증은 물건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백 우호도 마찬가지였다.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신 행보관님한테 절대로 들키면 안 되니 조용히 이동하셔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강진만의 비 밀의 장소. 그곳으로 병사들을 안내하기로 했다.
* * *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하면 행보관에게 들킬지도 모 른다.
그래서 고필중, 백우호, 이렇게 둘만 이강진과 함께 움직이기 로 했다.
"이쪽입니다."
이강진은 빨래 건조대를 지나서 탄약고 초소로 향하는 길 쪽 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분리수거장이 있는 곳이었다.
"저기 뒤쪽에 있습니다."
잠깐 제초병으로 일할 때, 이강진은 분리수거장 뒤쪽에서 혼 자 제초 작업을 했었다.
막사와 가깝고, 의외로 사람들의 눈에 거의 안 띄고.
이 조건에 부합되는 최적의 장소였다.
"저기 뒤에다가 놓아 둔 거야?"
"그냥 놓아 두진 않았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까?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분리수거장 뒤가 아닌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강진.
잠시 후 이강진의 손에 삽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고필증과 백우호는 '설마?' 했다.
그 설마가 맞다.
분리수거장 뒤로 돌아간 이강진은 땅을 유심히 살피더니, 어 느 지점 위로 삽을 깊게 푹 찔러 넣었다.
그리고 냅다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파내면서 이강진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사실 군대에서 가장 숨기기 좋은 장소는 바로 '땅 속에 묻어 두는 거'입니다. 이렇게 물건들을 파묻어 두면, 제아무리 행보관 님이라 하더라도 못 찾을 겁니다."
"하긴……."
"맞는 말이네."
행보관도 만능은 아니다. 이 넓디넓은 1075대대 땅 전체를 다 헤집을 순 없을 터.
땅을 파자, 봉지로 잘 감싼 스마트폰과 MP3가 모습을 드러냈 다.
물건이 무사한지 다시 한번 확인을 마친 두 사람.
이강진은 다시 지면을 메꾸기 위해 삽을 들어 올렸다.
그때 였다.
"강진아."
고필중이 잠시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이것도 같이 묻어 줘라."
"잘못 들었습니다?"
기껏 열심히 팠더니, 다시 묻어 달라는 건 대체 어느 경우인 가.
그러나 고필증은 결심했다.
"나 혼자 편하자고 이거 계속 가지고 있다가 괜히 너희까지 …… 아니, 1중대 전체가 휘말리는 꼴은 사실 싫거든. 오늘로서 확실하게 깨달았어. 그냥 전역 때까지 여기 묻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
백우호도 고필증과 같은 생각이었다.
"내 것도 묻어줘, 강진아."
"노래 들어야 한다며?"
"됐어, 고필중 병장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내가 어찌 이걸 다시 막사로 가져가겠냐. 그냥 휴가 나갈 때나 챙겨가야지, 뭐."
올바른 결정이었다.
비록 오늘은 그냥 넘어갔지만, 나중에 갑자기 상급 부대에서 기습 검열을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 되면 또다시 불안에 떨어야 한다.
매번 그런 스트레스를 느낄 바에야 차라리 그냥 속 편하게 아 무도 찾지 않는 장소에 잠시 묻어 두는 편이 좋아 보였다.
적어도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바로 묻어 버리기에는 좀 그렇고, 물 같은 게 들어가지 않도록 제대로 밀봉한 다음에 묻어 두는 편이 좋을 거 같습니다. 비라도 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이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참 늦은 근무 휴식을 취한 황지웅은 스마트폰과 MP3를 분 리수거장 뒤에 묻어 두고 왔다는 말을 해가 떨어지고 난 이후에 야 들을 수 있었다.
그도 이강진과 같은 말을 했다.
"그래, 잘했어. 나중에 말년 휴가 나갈 때 잊지 말고 챙겨 가 면 되겠지. 여하튼 어려운 결정했네."
"그러게 말이야.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폰 가져오지 말 걸 그랬다."
안 가져온 것만도 못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대대장에게 안 들킨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이번에도 이강진이 대활약을 해줬다.
이강진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
기지개를 쫙 켜 면서 완전히 잠에서 깬 황지웅은 비어 있는 이강진의 자리를 확인했다.
"강진이는? PX 갔나?"
"아니, 분섭이랑 같이 외곽 근무 나갔어."
"아, 그래? 짜식, 이제 상병 달았다고 선임 근무자로 나가고 그 러나 보네."
이제 이강진과 백우호는 어엿한 선임 라인이 되었다.
오종한이 전역하고, 황지웅과 고필중이 말년이 되면 그때부 터는 두 사람이 1분대를 이끌어 가야 한다.
이강진은 분대의 미래다. 아니, 1중대 전체의 미래다.
달력을 슬쩍 바라본 황지웅은 파란색으로 체크되어 있는 날 짜를 확인했다.
표시되어 있는 날짜는 다음 주 토요일.
"잊을 뻔했네."
"뭔데? 무슨 날이냐, 그거? 여자 친구 생일?"
"아니."
고개를 가로저은 황지웅은 고필중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미래의 1분대를 책임질 우리 A급 후임의 생일이지."
< 제47화. 숨겨야 산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