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8화. 군대에서 맞이하는 생일 (1)
제48화. 군대에서 맞이하는 생일 (1)
상병이 되고 나면서부터 이강진은 서서히 선임 근무자로 외 곽 근무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단 불침번 근무자로 투입될 때에는 아직까진 선임 근무자 포 지션으로 투입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불침번은 주로 병장급들이, 특히 말년들이 많이 배치되기 때 문이었다.
불침 번 근무는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그와 반대로 외곽 근무자는 선임 근무로 투입되기 때문에 몸 은 불편해도 마음은 편하다.
다 장점과 단점 이 있었다.
탄약고 초소에 오르는 이강진과 곽분섭.
전번 근무자가 두 사람에게 암구호를 요구했다.
"기러기!"
이강진은 슬쩍 곽분섭을 바라봤다.
만약 이강진이 후임 근무자로 투입되었다면 지체 없이 그가 바로 답어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강진은 선임 근무자다.
후임 근무자가 암구호를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곽분섭은 과연 오늘의 암구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 여부에 따라 탄약고 초소 근무지가 갈굼의 장소가 될지 말 지가 결정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곽분섭은 바로 답어를 외쳤다.
"바위!"
"누구냐?"
"후번 근무자!"
"용무는?"
"근무 교대!"
알아서 척척척.
가만히 있어도 후임 근무자가 다 대답해 준다.
'편하네, 편해.'
이등병, 일병 시절 때에는 하루하루가 좆같았지만, 상병을 달 고 나니까 그나마 군 생활이 좀 편해진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좆같은 건 여전했다.
근무 교대를 마치고 탄약고에 들어선 이강진과 곽분섭.
곽분섭과 함께 근무를 서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종 내려놔도 돼."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강진과 첫 근무를 서서 그런 걸까, 곽분섭은 총을 내려놓아 도 된다는 이강진의 제안을 한 번 물렀다.
이강진은 작게 웃었다.
"어차피 외곽 근무 설 때 총 내려놓고 서잖아. 다 알고 있으니 까 그냥 내려놓아도 돼."
살살 눈치를 보던 곽분섭은 이내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다 음에 좋을 내려놓았다.
이강진의 경우에는 2번까지 튕기다가 3번째에 좋을 내려놓았다.
이름하야 삼고초려 전법. 그러나 이건 이강진의 방식이지, 곽 분섭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좋을 내려놓은 후에 이강진은 거의 1 년 가까이 봐 온 탄약고 초소 풍경을 응시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록색으로 무성했던 풍경이 노 란색, 붉은색이 섞인 단풍 풍경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휑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언제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겠군.'
머지않아 눈이…… 아니, 악마의 똥가루가 내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흰색으로 지배당할 것이다.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제초보다도 힘든 게 제설이다.
제초의 경우에는 그래도 일과 시간에만 하는 작업이지만, 제 설은 눈이 온다 싶으면 설령 주말이라 하더라도 제설 도구를 가지고 튀어 나가야 한다.
이것 때문에 제초보다 제설이 더 빡세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강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번 년도는 폭설이 좀 안 왔으면 좋겠는데.'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
미래의 제설 작업 때문에 고민이 많은 이강진과 다르게 곽분 섭은 크게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강진 상병님, 저, 다음 달에 신병 위로 휴가 나가기로 예정 되어 있는데. 혹시, 휴가 나갈 때 준비해야 할 거 있습니까?"
"준비할 거라……."
문득 하나가 떠올랐다.
"4.5초의 아쉬움을 견딜 수 있는 결심. 그것만 있으면 될 거다."
"4.5초가 뭡 니까?"
"신병 위로 휴가가 4박 5일이잖아. 근데 막상 나갔다가 복귀하면 4박 5일이 아니라 체감상 4.5초같이 느껴져서 그렇게 부르 곤 하지."
"아하……."
"그거 말고는 다른 건 필요 없을 거다. 아, 휴가 나가기 전에 밖에서 뭐 할지 버킷리스트 같은 거 미리 만들어 두고 가면 도 움이 되긴 할 거야."
계획을 세우고 나가는 게 좋다. 이게 이강진이 할 수 있는 중 고였다.
"전 나가면 일단 친구들하고 프로야구 경기 보러 갈 겁니다. 이미 애들이 제 티켓도 예매해 뒀습니다."
"야구라, 나쁘지 않지."
이강진은 야구에 푹 빠진 적은 없었다. 그냥 티비 틀다가 나 오면 보는 정도, 딱 그 선이었다.
대신 축구는 열심히 챙겨 봤다. 한때 프로 선수를 지망했던 적 이 있었던 터라 야구보다 축구에 더 관심이 가곤 했다.
휴가 이야기를 하면 항상 기분이 업 된다.
설 령 남의 휴가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곽분섭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 이강진 상병님, 다음 주 토요일에 생일 아니십니까?"
"어. 용케도 기억하고 있네?"
"휴가 나갈 날짜 정하려고 생활관에 걸려 있는 달력 보는데, 다음 주 토요일에 파란색으로 이강진 상병님 생일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미리 생일 축하 드립니다, 이강진 상병님!"
"그래, 고맙다."
축하를 받아도 기분은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
'군대에서 생일을 보내야 하다니.'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냥 휴가를 쓸 걸 그랬다.
너무 주식 위주로 휴가를 짜다 보니 자신의 생일을 미처 신경 스스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결말이 나오고 말았다.
'뭐, 어차피 생일 때 나간다고 해도 특별할 건 없으니까.'
그의 어머니와 황민수, 이렇게 셋이서 같이 외식 한 번 하는 것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래, 휴가 써 봤자 별거 없을 테니까. 아쉬워하지 말자.'
그냥 얌전히 행복 회로를 돌리기로 했다.
* * *
또다시 시작된 평일 일과 시간.
날씨가 쌀쌀해져서 그런지 이제는 야상을 거의 필수로 입어 야 했다.
추위에 약한 병사들은 안에 깔깔이까지 껴입어야만 했다.
겨울이 오고 있음을 다시금 체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나 마냥 안심할 순 없다.
언제, 어디서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군대다. 군대 날씨를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
눈이 오기 전에 병사들은 행보관의 지도에 따라 제설 도구를 미리 정비하거나 벌목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주말이 찾아왔다.
토요일 오전.
이강진 탄신일의 아침이 밝았다.
딱 아침 점호를 받을 시간에 이강진은 외곽 근무에 투입되었 다.
점호를 마치고 돌아온 1분대원들.
황지웅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분대원들의 시선을 모았다.
"오늘 강진이 생일인 거, 다들 알지?"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저녁 때 강진이 생일 파티 할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생활관 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그리고 우호하고 태강이는 4시쯤에 내가 분과 운영비 줄 테니까, 필중이랑 같이 PX 내려가서 먹을 거 사 오고. 나도 같이 내려가고 싶은데, 난 그때 외곽 근무 나가야 할 거 같아서. 그냥 너희들한테 맡길 테니까 강진이가 좋아하는 것 들로 잘 챙겨 와라."
"네, 알겠습니다."
"저희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들 중에서 이강진과 가장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해 온 사람이 바로 백우호다.
이강진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입맛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 다도 잘 안다.
PX에 갈 멤버들을 정할 때, 오종한이 슬쩍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마. 강진이 생일인데, 뭐라도 해야지."
이강진에게 크나큰 빚을 진 오종한.
만약 이강진이 없었더라면, 오종한은 여전히 외로운 말년 생 활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전역하기 전에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오종한까지 포함해서 총 4명이 오후에 PX를 들리기로 결정했 다.
백우호와 함께 화장실로 향하던 성태강은 문득 궁금해졌다.
"군대에서 케이크는 따로 주문 못 하지 말입니다?"
"못하지, 외부 음식 반입 금지니까."
"케이크 하나 있으면 그래도 생일 파티 분위기가 확 살아날 텐데, 그게 좀 아쉽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군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케이크가 있 으니까."
메이드 인 ROKA.
케이크가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된다.
* * *
저녁 식사 집합을 위해 병사들이 사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당직사병이 나와 외쳤다.
"집합 끝난 분대는 알아서 식당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력.
얼른 식사 끝내고 막사로 올라와서 쉬는 게 좋다.
1분대도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인솔자 위치에 서 있던 황지웅이 이강진을 따로 불렀다.
"강진아, 오늘 저녁, 조금만 먹어라. 저녁에 네 생일 파티 할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 메뉴 상태가 완전 별로였다.
똥국에 조기튀김, 배추김치.
최악의 메뉴로 손꼽히는 날이었다.
'잘됐네.'
오늘이 생일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강진- 생 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생일 축하 노래와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동시에 미리 준비한 이강진 생일 케이크가 마침내 모습을 드 러 냈다.
"짜잔!"
초코파이를 5단으로 쌓아 기본 베이스를 만들고, 막대 과자들 로 사이사이를 채워 데커레이션까지 완성시켰다.
위에는 초 대신 성냥을 꽂아 불을 붙였다.
장작 마냥 활활 타오르는 성냥들을 바라보면서 이강진은 쓴 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군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어울려 주기로 했다.
화력이 너무 세서 그런지 한 번 부는 걸로 쉽게 불을 끌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추가로 두세 번 후후 불어서야 겨우 성냥불을 제압할 수 있었다.
초코파이 케이크를 중심으로 냉동과 과자 등, 이강진이 평소 즐겨먹는 것들 위주로 세팅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이강진보다 후임들이 더 신났다.
정신없이 생일 파티를 보내는 1분대원들.
부족한 것투성이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생일 파티가 되었 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강진은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군대에서 욕심은 덧없는 사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 *
일요일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이강진은 교회로 내려갔다.
오늘도 변함없이 군종병으로서 종교 행사 준비를 도와야 했다.
교회로 내려가자, 한지윤이 이강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진 씨, 강진 씨! 이쪽으로 와 보세요."
"네?"
한지윤은 이강진을 목사가 타고 온 차량이 있는 쪽으로 데려 갔다.
"잠깐 거기서 기다려 주세요."
뒷좌석 문을 연 뒤에 상반신을 차 안쪽으로 밀어 넣는 한지윤.
뭔가를 바삐 찾는 모습을 보였다.
"지윤 씨, 저도 도와줄까요?"
"아니에요. 어디다 뒀더라……. 아, 찾았다!"
그녀의 손에 작은 종이 상자가 들려 나왔다.
작은 리본으로 포장된 그런 상자였다.
"강진 씨, 어제 생일이었죠? 제가 드리는 생일 선물이에요."
한지윤이 주는 생일 선물.
어떤 선물일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뜯어봐도 됩니까?"
"물론이죠."
귀여운 종이 상자 안에는 디지 털 손목시계 하나가 담겨 있었 다.
"군인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해서요. 기능이 많은 디지털 시계가 좋다고 추천받아서 그걸로 샀어요. 마음에 드세요?"
"예,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한지윤이 주는 선물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 자신이 있다.
평범하게 끝날 거라 생각했던 이강진의 생일.
하지만 그녀의 선물로 인해 아주 특별한 생일로 변했다.
< 제48화. 군대에서 맞이하는 생일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