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백색 전쟁 (1)
하늘에서 눈이 내려온다.
이 소식은 1075대대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눈 온다!"
"씨발, 좆됐네!"
"이 눈, 안 쌓이겠지?"
올 겨울 첫 눈.
다른 사람들이라면 낭만에 젖어 들지도 모르지만, 군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눈은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다. 초록색, 국방색보다도 더 싫은 게 흰색이라는 대답이 나올 정도로 군인들은 눈을 굉장히 싫 어한다.
내리자마자 바로 녹는 눈이라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죄악은 역시 쌓이는 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었다.
"눈발 보니까 쌓이는 눈은 아닌 거 같은데."
위병소 초소 선임 근무자의 말에 후임 근무자는 안심했다.
"그러면 근무 끝나고 제설 투입되는 일은 없지 말입니다?"
"몰라. 갑자기 눈발 굵어지기 시작하면 또 쌓일지도. 어차피 자연 현상을 우리 같은 일개 군인이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 니 까 그냥 얌전히 기도나 해라. 제발 눈 쌓이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말이야."
선임 근무자의 말대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다.
한편 이강진은 서서히 위병소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위병소 초소 근무자들과 같았다.
"수고하세요."
"네, 고생하세요."
서로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이강진은 조장실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소지품 검사를 시행했다.
본부중대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다가 걸린 사건의 여파가 아 직도 1075대대에 남아 있었다.
이제는 외박, 외출을 나갔다 온 병사들도 빡세게 소지품 검사 를 받아야 했다.
간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 봐도 좋다."
"예,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조장실을 나온 순간, 이강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전보다 눈발이 더 굵어진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는데.'
불길하다.
안 좋은 예감을 애써 뒤로한 채 이강진은 막사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 * *
아직 1분대원들은 밖에 눈이 오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외출 나갔다가 복귀한 이강진은 걸그룹 특별 스테이지에 푹 빠져 있는 1분대원들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했다.
"지금 밖에 눈 옵니다."
"뭐?"
"씨발, 진짜냐?"
"예. 한번 확인해 보시 면 알 겁니다."
가림막을 치운 순간, 가장 먼저 어두컴컴한 하늘이 병사들을 반겼다.
먹구름 아래로 낙하 훈련은 거행하고 있는 수많은 눈들.
병사들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좆됐네."
"아니, 왜 벌써부터 눈이 내리고 지랄이야."
"하늘도 무심하시지."
게다가 하필이면 일요일에.
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제설 작업하러 사열대 앞으로 집합하 라는 방송은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오종한이 불안해하는 분대원들을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원래 첫눈은 거의 안 쌓이고 다 녹더라, 작 년에도 그랬고. 선임들 있을 때에도 그랬어, 첫눈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티비나 보자."
중대 왕고가 된 오종한이 하는 말이라 그런지 왠지 믿을 만했 다.
다들 오종한의 말에 따라 걸그룹 스테이지에 눈과 귀를 집중 시켰다.
그러나 잠시 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 전 병력은 즉시 제설 도구 챙기고 사열대 앞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지금 전 병력은 즉시 제설 도구 챙기고 사열대 앞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병사들은 일제히 오종한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오종한.
"뭐…… 가끔 빗나가는 경우도 있지."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 * *
병사들은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채 사열대로 집합했다.
이강진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고의 생일이었느니 뭐니 생각했지 만, 눈 한 번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요일 하루, 당직사관을 맡게 된 소대장이 당직병을 찾았다.
"집합 다 끝났나?"
"예, 인원 파악 끝났습니다. 휴가, 근무자 제외하고 다 모였습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소대장은 병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 목소리를 높였다.
"왜 집합시켰는지 다들 알고 있겠지?"
"예!"
"점점 눈발이 거세지고 있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하루 종일 눈 온다고 하니, 더 쌓이기 전에 미리 제설 작업을 실시하겠다. 각 분대별로 작업 구역 할당해 줄 테니 분대장이 통솔해서 제설 작 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1분대는 탄약고 초소 근처를 맡게 되었다.
황지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분대원들을 집합시켰다.
"다들 집합해라. 제설 도구는 다 챙겼겠지?"
"예!"
"어디 보자……. 운상아."
"일병 기운상!"
"눈삽은 필요 없으니까 그거 두고 빗자루나 챙겨라. 눈삽이나 넉가래는 눈이 엄청 쌓여서 눈을 퍼야 할 때나 쓰는 도구니까."
"네, 바로 바꾸겠습니다!"
군대에서 제설 작업을 처음 하다 보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기운상이 빗자루를 가지러 간 동안, 황지웅은 분대원들의 복 장을 챙겼다.
"날씨 추우니까 목 토시나 귀마개 꼭 착용하고. 그리고 목장 갑 없는 사람은 나한테 말해라. 내가 묶음으로 받아 왔으니까."
"황지웅 병장님, 저, 목장갑 하나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작업을 하든 목장갑을 하면 도움이 많이 된다.
이강진도 새로운 목장갑을 착용했다.
이로써 제설 준비 완료.
기운상의 합류와 함께 이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제설 작전 에 투입되었다.
* * *
선임 근무자로 투입된 김철은 펑펑 내리기 시작한 눈을 보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눈 멈출 때까지 외곽 근무 서고 싶다."
만약 내려가면, 예외 없이 곧바로 제설 작업에 투입될지도 모 른다.
김철과 함께 초소 근무에 투입된 조형국 이병이 아래쪽을 가 리 켰다.
"김철 상병님, 제설 작업 병력 을라오고 있습니다."
"그래? 행정반에다 키 넣어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조형국이 키를 넣는 동안, 김철은 1분대 병력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충성! 고생이 많으십니다."
"엥? 그 목소리, 혹시 철이냐?"
고필중이 가장 먼저 김철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상병 김철. 예, 그렇습니다."
"캬! 근무 타이 밍 봐라, 기가 막히네. 완전 꿀 빨고 있잖아?"
"평소에는 꿀 못 빨았던 거, 이번 기회에 제대로 빨고 있습니 다, 하하하!"
김철도 이제는 붙임성이 좋아졌다.
신병 교육대 시절에는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못 붙이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사람을 강제로 변하게 만드는 곳이다.
게다가 행정병을 맡고 있다 보니 여러 병사들과 이야기할 기 회가 잦았다. 그 덕분에 김철은 점점 외향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강진도 김철에게 말을 붙였다.
"부럽다, 철아."
"난 오히려 네가 더 부럽던데, 외출 나갔다 왔다며?"
"어."
"목사님하고 나갔지? 지윤 씨도 같이?"
이강진은 대답 대신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면서 쉬잇 하는 제 스처를 취했다. 아직 분대원들한테도 말 안 한 사실이 니 비밀을 지켜 달라는 신호였다.
김철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 게 끄덕였다.
잡담은 이제 끝.
본격적으로 제설 작업에 돌입해야 한다.
황지웅이 분대원들에게 지시했다.
"탄약고 초소로 올라오는 길부터 먼저 작업해라. 다른 곳은 둘 째 치 더라도 초소 가는 길은 무조건 사수해야 해. 나중에 눈 쌓 여 있는 거, 행보관님이 보시면 부대 뒤옆을 수도 있으니까 최 대한 신경 써서 작업해라."
"예!"
제설 작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통이다.
눈이 쌓이는 걸 그대로 방치하면 도로를 이용할 수가 없게 된 다. 그렇게 되면 식량 조달은 물론이요, 혹여나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에는 자주포 운영에 커다란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언제, 어느 때든 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야 한다. 그것이 군인들의 사명이자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다.
탄약고 초소도 마찬가지다.
눈이 쌓여 버리면 초소 근무 투입이 어렵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탄약고가 무방비 상태가 된다.
호기심이 왕성한 민간인이나 무장공비가 와서 탄약고를 건들 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게 되면 사단장부터 시작해서 요직을 맡고 있는 간부들은 죄다 군복을 벗게 될 것이다.
그만큼 제설이 중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중요한 거고.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악마의 똥가루!"
싹, 싹, 싹!
빗자루로 눈을 쓸어 내는 병사들의 입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 작했다.
일요일 저녁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생각할수록 열이 뻗혔다. 빗자루로 눈을 쓸어 내던 와중이었다.
곽분섭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강진에게 물었다.
"이강진 상병님, 쓸어도 쓸어도 눈이 계속 쌓이는데, 차라리 눈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치면 그때 눈 쓸어 버리는 게 훨 씬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눈이 내리는 와중에 작업해 봤자 다시 원상 복구될 뿐.
이런 방법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물론 이강진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눈이 쌓인 동안에는 차량이 통제되잖아. 그 통제되는 시간조 차 용납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실시간으로 눈을 치우라는 거 야. 너도 나중에 짬 먹으면, 후임이 방금 네가 한 것처럼 똑같이 질문해 올 수 있으니까 잘 기억했다가 내가 말해 준 거 고스란 히 대답해 줘."
"네, 알겠습니다!"
이강진도 곽분섭처럼 의심이 많을 때가 있었다.
하나 군대에서는 의심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의심하는 순간, 자신만 손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바꾸면 좀 더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군대는 병사의 건의 사항 같은 건 들어주지 않는다. 지 금까지 해 오던 방식을 끝까지 고집한다.
대한민국 조직 중에 가장 융통성이 없는 곳이 바로 군대다.
그래서 이강진은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제설 작업도 마찬가지다. 의심하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하 는 게 가장 편하다. 그래야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그렇게 1시간 동안 눈과의 싸움을 펼쳤다.
그제야 눈발이 서서히 약해지더 니, 마침내 완전히 그쳤다.
동시에 탄약고 초소 쪽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황지웅 병장님! 눈 그쳤으니까 작업 마무리 되는 대로 막사 로 복귀하라고 하십니 다!"
"좋아! 후딱 쓸고 들어가자!"
"예!"
종공격 찬스다.
분대원들은 미친 듯이 눈을 쓸어 내기 시작했다.
흰색 대신 갈색이 드러날 때까지 열심히 쓸고 또 쓸었다.
그제야 병사들은 다시 막사로 복귀할 수 있었다.
막사로 돌아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당직병이 나와 복귀 중인 병사들에게 외쳤다.
"식사 집합은 따로 안 한다고 합니다. 바로 식당으로 내려가 시면 됩니다."
"오냐."
화장실에서 손을 씻은 후에 숟가락 통을 챙기고 다시 사열대 로 나온 1분대원들.
황지웅의 인솔에 맞춰 대대 식당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중에 백우호가 걱정을 표했다.
"저녁 때 또 눈 오면 어떻게 하지?"
곧장 이강진의 쓴소리가 날아들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다가 진짜로 눈 내릴라."
자나 깨나 눈 걱정.
이번 겨울은 험난할 것 같아 보였다.
< 제49화. 백색 전쟁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