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악습 (3)
마음의 편지를 받겠다는 말에 병사들은, 특히 상, 병장급 선 임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마음의 편지에 긁히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었 다.
군기 교육대뿐만 아니라 죄악의 경우에는 영창을 다녀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군 생활이 늘어나는 기적을 몸소 체험하게 될 것 이다.
하나 별로 겪고 싶지 않은 기적이다.
게다가 영창만 갔다 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모아 뒀던 휴가까지 잘릴 수 있다.
지금의 오종한처럼 말이다.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이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하는 선임급들.
내가 누구에게 잘못한 적이 있었나? 혹은 마음의 편지로 긁 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있을까?
때 아닌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의 편지에 관한 전파 사항을 끝마친 뒤, 행보관의 작업 분 배가 이루어졌다.
작업 인력을 나누고 나서야 해산하는 병사들.
그때 최칠완 병장이 2분대원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어디 가지 말고 잠깐 생활관으로 가 있어라."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말없이 최칠완과 2분대원들을 지켜봤다.
'최 칠완 병장, 지금 똥줄 엄청 타겠군.'
그들의 불만이 얼마나 클지, 이강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최칠완도 어쩌 면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2분대원들만 따로 집합시키기로 한 것이다.
불안하니까.
'평소에 잘 좀 하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 * *
당직 근무자인 박태중을 제외하고 남은 2분대원들이 전부 2 생활관으로 몰래 집합했다.
최칠완은 굳은 표정으로 맨 뒤에 있는 일병에게 지시했다.
"문 닫아라, 꽉 잠가."
"에……. 알겠습니다."
일병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최칠완은 이들에게 경고했다.
"대대장님 마음의 편지에 나 긁는 녀석, 분명히 나올 거다. 틀림 없이."
"아, 아닙니다!"
분대원들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최칠완은 가소롭다 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긴 개뿔. 나, 상병 때에도 너희들이 똑같이 아니라고 했 던 거, 기억하지? 근데 결국 나왔더라? 그것 때문에 내가 군기 교육대 간 거는 굳이 말해 봤자 입만 아플 테고."
예전에 1중대 중대장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마음의 편지를 받 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최칠완의 내무 부조리에 대해 고발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 자세하게.
죄칠완에게 직접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를 것들까지 상세하게 다 적었다.
그 상세함이 오히려 마음의 편지를 적은 당사자의 발목을 잡 게 되었다.
결국 최칠완은 범인이 누군지 밝혀냈다.
같은 2분대에 속해 있던 배명철 일병이었다.
최칠완은 배명철 한 명만 집중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배명철은 견디다 못해 스스로 전출을 택했다.
그 일로 인해 최칠완은 영창까지 갔다 오게 되었지만, 반성은 커녕 오히려 더 악독해져서 부대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이번에도 누가 나 긁는다면…… 저번처럼 얌전히 안 끝날 거다."
2분대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성격 안 좋기로 소문 난 최칠완. 그가 칼을 빼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2분대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중대장 마음의 편지 사건 때 이미 겪었으니 말이다.
최칠완이 2분대원들을 협박하고 있을 때.
생활관 밖에서 안의 상황을 몰래 염탐하는 병사가 한 명 있었 다.
박태중이었다.
'강진이에게 들었을 때에는 설마 했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 네.'
최칠완과 같은 병장 계급을 달고 있지만, 박태중과 최칠완은 2개월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말년이 되었어도 최칠완은 박 태중에게 말 놓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박태중도 쉽게 나설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한숨으로 표현되었다.
"하아……."
군 생활, 참 더럽다.
* * *
약속했던 대대장 마음의 편지 시간이 다가왔다.
점심 식사를 끝낸 대대장은 약속된 시간에 1중대를 찾았다.
"충성!"
중대장 일행이 그를 맞이했다.
그의 거수경례를 받아 준 중대장은 마음의 편지 준비 상황을 체크했다.
"용지는?"
"행정반에 준비해 뒀습니다."
"계급별로 병사들 따로 집합시키도록 해. 이등병은 이등병끼리, 일병은 일병끼리.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중대장은 당직들을 불러 계급별로 생활관에 집합할 수 있도 록 지시를 내렸다.
마이크를 든 이강진은 대대장이 명령한 내용 그대로 방송을 진행했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대대장님 마음의 편지를 진행할 예정이니 이등병은 1생활관으로, 일병은 2생활관으로, 상병은 3 생활관으로, 병장은 휴게실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상, 병장 들은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각각 3생활관, 휴게 실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죄칠완은 2분대원들뿐만 아니라 일, 이병들 전체에게 압박을 가하는 눈빛을 쏘아 냈다.
병사들은 애써 최칠완의 시선을 못 본 척했다.
집합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대대장은 이강진을 지목했다.
"강진이."
"상병 이강진."
"자네가 나하고 같이 생활관 돌아다니면서 마음의 편지를 받 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용지와 펜을 병사들에게 나눠 주고, 다 쓴 마음의 편지를 일 일이 수거하는 등의 잡일을 중대장에게 맡길 순 없었다.
중대장도 체면이 있지 않겠나.
그래서 부사관 중 몇몇을 대동하려 했으나, 죄다 파견을 나가 거나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대대장은 당직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동안 박태중은 중대장과 함께 행정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대대장과 이강진은 가장 먼저 1생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대장이 행정반을 나선 순간, 중대장은 불안감을 표줄했다.
꼭 이런 걸 하면 한 번씩 안 좋은 내용을 담은 마음의 편지가 하나씩 튀어나온다. 그러면 대대장의 불호령을 피할 수 없을 터.
"불안한데."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떠는 중대장.
하나 일은 이미 벌어졌다. 중대장 입장에선 조용히 넘어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대장이 1생활관에 들어서자, 이등병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충성!"
이등병 중에서 가장 선임인 성태강이 대표로 대대장에게 거 수경례를 펼쳤다.
고개를 짧게 끄덕인 대대장은 병력을 주목시켰다.
"다들 주목."
"주목!"
"마음의 편지가 뭔지 모르는 병사들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군 생활을 하면서 겪은 힘든 일이 있으면 쓰면 된다. 솔직하게, 숨김없이. 알겠나."
"예!"
"관등성명은 적을 필요 없다. 그러니 괜히 이거 적었다가 선 임한테 들켜서 갈굼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비 밀은 무조건 보장해 주마."
이 말을 믿을 상병, 병장은 없을 것이다.
아니, 일병만 되도 안 믿는다.
뻔한 거짓말이다.
신원을 보장해 준다곤 하지만, 어떻게든 다 밝혀지게 되어 있 다.
예전에 누군가가 마음의 편지로 자신의 선임을 찔렀던 적이 있었다. 그 선임병은 군기 교육대를 다녀온 다음, 문제의 마음 의 편지를 확보해 낸 뒤 필체를 비교, 분석해서 기어코 자신을 찌른 후임병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후임병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군대는 한정되어 있는 공간이다. 마음의 편지로 누가 누구를 긁었는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결국 밝혀지게 되어 있다. 단 조금 시간이 걸릴 뿐.
대대장의 낚시에 걸려드는 이병들이 가끔씩 존재한다. 최칠 완을 긁었다가 결국 덜미가 잡히게 된 배명철처럼 말이다.
마음의 편지, 그것은 양날의 검이다.
대대장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간 이병들이 있을지.
이강진은 한편으론 궁금했다.
"용지하고 펜 나눠 주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이강진은 이등병들에게 종이와 볼펜을 지급했다.
이등병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충분히 줄 테니까 생각나는 거 있으면 다 적도록 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동안 자네는 나가 보도록 하게."
이강진은 대대장의 명령대로 생활관 밖으로 나가 대기하기로 했다.
같은 부대 선임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으면 누가 마음 의 편지를 적겠나.
그것까지 고려해서 대대장은 일부러 이강진을 밖으로 보낸 것 이었다.
복도로 나온 이강진.
때마침 최칠완이 1생활관 앞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마음의 편지, 시작했냐?"
"상병 이강진. 예, 방금 막 시작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이미 한 번 마음의 편지로 긁혀 본 적이 있었기에 그의 신경 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최칠완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했다.
'마치 독사 같군.'
내무 부조리라는 이름의 맹독을 품고 있는 독사 최칠완.
언젠간 처리해야 할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만약 최칠완이 이강진보다 후임이었더라면, 일은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죄칠완보다 선임인 사람은 거의 없다.
'딱 한 명 있네.'
오종한.
지금 그가 중대 유일의 왕고다.
하지만 오종한은 처음부터 1중대에서 군 생활을 해 온 병사 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오종한을 1중대원으로 받아들 이지 않는 병사들이 더러 있었다.
영향력이 별로 없는 그가 최칠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이강진이 보기엔 힘들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의 시간은 꽤 길어졌다.
10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이강진은 다시 1생활관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역할은 마음의 편지와 볼펜을 수거하는 것이다.
마음의 편지는 안의 내용이 보이지 않게 죄소 2번 이상 접게 만들었다.
마음의 편지를 전부 다 수거한 이강진은 대대장과 함께 2생활관으로 넘어갔다.
1생활관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이어 3생활관으로 향하는 대대장과 이강진.
3생활관은 이등병, 일병만 모여 있던 1, 2생활관에 비해 분위 기가 사뭇 달랐다.
여유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느껴졌다.
대대장도 상병들에게는 자잘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적고 싶은 거 있으면 적어도 된다."
상, 병장 들의 마음의 편지는 주로 간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 오곤 한다.
'어느 어느 간부가 잘해 줍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예전에 2부소대장이 이런 마음의 편지 덕분에 대대장에게 크 게 칭찬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칭찬만 나오진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런 때에는 해당 간부를 따로 불러 경고, 주의를 주는 식의 조치가 취해진다.
상병들 차례가 끝난 뒤에 마지막으로 병장들이 기다리고 있 는 휴게실로 향했다.
병장들은 상병들에 비해 더욱 여유를 보였다.
1중대원들이 적은 마음의 편지는 종이 박스에 따로 담아 뒀내용물은 오로지 대대장만이 확인할 수 있다.
대대장은 업무를 마치고 뒤늦게 합류한 인사 장교에게 종이 박스를 넘겼다.
"내 사무실에 놓아 둬라."
"예, 알겠습니다."
무엇이 담겨 있을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1중대의 손을 떠났다.
< 제50화. 악습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