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1화. 다시 만나다 (1) >
제51화. 다시 만나다 (1)
전역까지 딱 일주일 남은 오종한은 토요일 오전, 한가롭게 침 상에 누워 티비를 시청했다.
평일 내내 행보관이 숙제처럼 내준 작업을 소화하느라 정신 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말만 되면 피로가 밀려왔다.
그럼에도 오종한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대체로 1 중대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 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당직사관을 맡은 행보관이 1 생활관을 찾았다.
"얼씨구, 날도 좋은데 가서 운동이나 좀 할 것이지. 젊은 것들이 생활관에 퍼질러 누워서 티비나 보고 있구먼."
"충성!"
분대장인 황지웅이 대표로 거수경례를 했다. 행보관은 고개 를 한 번 끄덕인 뒤에 오종한을 불렀다.
"오종한."
"병장 오종한!"
"잠깐 나 좀 보자."
순간 오종한은 불길함을 감지했다.
'설마 주말에 작업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행보관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각오를 굳히고 행보관을 따라 행보관실로 향한 오종한.
서 랍에서 무언가를 꺼 낸 행보관은 그것을 오종한에게 넘 겼다.
"이거 받아라."
"이게…… 뭡니까?"
"4박 5일 포상 휴가증이다."
"자, 잘못 들었습니다?"
귀를 의심했다.
뜬금없이 포상 휴가증을, 그것도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자신한 테 왜 준단 말인가.
행보관은 너 털웃음을 흘리 면서 말했다.
"농땡이 안 피우고 이 행보관이 지시한 작업을 잘 했으니까 상으로 주는 거다."
"아, 아닙니다! 포상 휴가를 바라고 열심히 한 거 아닙니다. 저 보다는 다른 병사들한테 주시는 게 더 좋을 거 같습니다."
오종한은 포상 휴가에 욕심이 없었다.
어차피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알게 모르게 1중대에서 생활하는 것에 적응이 되어 버 렸다. 게다가 이곳이 한결 편안해져서 그런지 반드시 휴가를 나 가야겠다는 욕심도 거의 사그라들었다.
물론 휴가를 준다고 하면 싫어할 사람은一 아니, 싫어할 군 인은 없다.
행보관은 거의 강제로 오종한에게 휴가증을 넘겼다.
"휴가 보내 준다고 싫다고 하네, 이 녀석. 아무튼 다음 주 월요일에 휴가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둬라. 내가 철이한테는 미 리 이야기해 뒀으니까 넌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다시 1생활관으로 돌아온 오종한.
고필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행보관님이 작업하립니까?"
"아니, 이거 주셨더라."
오종한은 포상 휴가증을 이들에게 보여 줬다. 순간 1분대원들 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거! 포상 휴가증 아닙 니까!"
"어, 맞아. 나 일 잘했다고 행보관님께서 특별히 챙겨 주신 거래."
"우리 행보관님이 그런 면모가 있다니…… 오늘 뭐 잘못 드셨 나?"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행보관만큼 병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는 사람 또한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포상 휴가 를 이렇게 덥석 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종한같이 경험 많고 말 잘 따르는 인력은 끝까지 데 리고 다니면서 작업을 시키려고 했다.
그러니 더더욱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행보관의 변덕은 전부 다 이강진한테서 비롯된 것이었 다.
하나 이강진은 행보관에게 자신이 이런 계칙을 꾸몄다는 사 실을 절대로 말해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행보관님이 약속을 잘 이행하셨군.'
이강진은 아무것도 모른 척 연기를 하면서 오종한에게 말을 걸었다.
"죽하드립니다, 오종한 병장님. 그럼 월요일에 바로 휴가 나 가시는 겁니까?"
"어, 갔다가 금요일날 복귀하고, 토요일에 바로 전역하면 된 다고 하더라. 철이가 그랬어."
"그럼 이번 주 주말에 개인 짐 챙기시고 짬 처리할 거 짬 처리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래야지. 맞다, 내 깔깔이 가질 사람? 완전 A급인데."
오종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들기 시작 했다.
"일병 기운상!"
"이병 곽분섭!"
"상병 백우호!"
"우호, 넌 상병이면서 뭐 하러 내 깔깔이를 노리냐. 하하!"
원래 가진 자가 더 욕심을 부리는 법이다.
백우호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낡은 깔깔이를 버리고 상태가 양호한 깔깔이로 갈아 탈 생각이었다.
본의 아니게 경쟁이 붙은 1 생활관은 한동안 떠들썩한 분위기 가 계속 이어졌다.
사얄대 앞을 빙빙 돌면서 달리기 운동을 하던 이강진.
혼자서 달리던 그의 곁에 어느새 일행이 하나 추가되었다.
"강진아, 나도 같이 해도 돼?"
행정병 김철이었다.
"운동할 시간이 돼?"
주말에 거의 행정반에서 시간을 보내는 김철이 오늘은 웬일 로 한가해 보였다. 게다가 평소에 안 하던 운동을 하겠다고 하 니 더욱 의외였다.
김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고 매번 주말에 일하란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밑에 후 임이 좀 들어와서 그런지 이제는 제법 여유가 생겼어."
"축하한다."
"죽하는 무슨,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달리기를 중지하고 걷기 시작하는 이들.
이 틈을 타 김철은 이강진에게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오종한 병장님한테 휴가 챙겨 주게 행보관님한테 바람 녕은 거, 네가 한 거지?"
숨길까, 말까 고민했으나. 이강진은 이내 그렇다고 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
"네가 행보관님 찾았던 때 있잖아? 너 나가고 난 다음에 행보관님이 중대장님한테 전화 걸더니 휴가 이야기를 하더라고. 오종한 병장님한테 휴가 하나 챙겨 주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그래 서 혹시 했던 거야."
행정반에 거의 하루 종일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보니 김철은 중대가 돌아가는 소식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접 할 수 있었다.
거의 1중대 소식통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너도 참 대단하다. 대체 행보관님한테 어떻게 이야기를 했길 래 포상 휴가를 다 따내냐?"
"그건 영업 비밀이야."
이건 차마 말해 줄 수 없었다.
지금은 말 못 하지만, 나중에 전역하면 웃으면서 썰을 풀 때 가 오지 않을까.
이강진은 그런 기대가 들었다.
* * *
일요일 오전.
이강진은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교회로 향했다.
오늘은 한지윤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목사가 이강진을 따로 불렀다.
"지윤이가 자네한테 전해 달라고 하더군. 크리스마스 당일에 는 종교 행사에 참가할 예정이니 그때 보자고."
그렇다, 목사가 말한 대로 바로 다음 주 일요일. 그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당일이다.
생일 때처럼 이강진은 이번 크리스마스도 군대에서 보낼 예 정이었다.
회귀 이전에나 이후에나 이강진은 바깥에서 단 한 번도 크리 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었다.
황지웅처럼 여자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든 크리스마스를 밖에 서 보내려고 발악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강진은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누군가를 만날 예정도 없었다.
한지윤 정도가 다였다.
처음에는 한지윤과 크리스마스에 만날 생각으로 한 번 이야 기를 꺼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방송 일 정이 잡혀 있는 탓에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일에는 종교 행사가 잡혀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에 서 상당히 중요한 대형 이벤트다. 그러다 보니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목사에게 크리스마스 행사 준비를 모두 떠넘길 수는 없었기에 이강진과 한지윤의 크리스마스 데이트는 자연스럽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지윤 씨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죽복받은 거니까.'
이강진은 목사의 말에 알았다고 답했다.
'다음 주를 기약해야겠군.'
이번 크리스마스는 쓸쓸하게 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 * *
월요일 아침 해가 밝았다.
곧 휴가를 나갈 예정인 오종한은 아직도 뒤숭숭한 표정을 짓 고 있었다.
행보관은 그런 오종한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휴가 나가는 녀석이 표정이 왜 그러냐?"
"병장 오종한, 제가 정말로 휴가를 나가긴 하는 건지 실감이 안 들어서 그렇습니다."
"왜, 휴가 다시 자를까?"
"아닙 니다! 꼭 나가고 싶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보급품 짬 처리도 다 끝내 뒀다. 휴가 나가 서 만날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일정도 다 짜 뒀는데, 이 제 와서 휴가가 없던 걸로 처리되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
행보관은 오종한의 어깨를 강하게 토닥여 줬다.
"가서 재미있게 놀다 와라."
"예,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행정반을 나선 오종한.
다른 말년 병장들이었다면 그대로 빠르게 위병소 쪽으로 달 려 나갔을 테지만, 오종한은 그러지 않았다.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다시 1중대를 찾은 오종한은 병사들에게 물었다.
"내가 휴가 복귀할 때 사올 물건 같은 거 있으면 말해 줘."
"스파링 1월 호만 사 오시 면 됩 니다."
"스파링? 오케이, 접수 완료했고……. 다른 건?"
성태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병 성태강! 일병 계급장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병 계급장이라……. 그러고 보니 네가 다음 달에 일병 진급 하던가?"
"예, 그렇습니다!"
드디어 성태강이 일병으로 진급한다. 이제 1분대에 남은 이등 병은 곽분섭 한 명밖에 없다.
곽분섭은 자신만 남기고 일병의 세계로 올라가려고 하는 성태강에게 아쉬움을 드러냈다.
"성태강 이병님이 일병 되시면 저 혼자지 않습니까. 저하고 같이 나란히 일병 진급하시면 안 됩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소름 끼치니까."
하루라도 빨리 이등병 생활을 청산하는 게 성태강의 목적이 었다.
계급장에 작대기가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그만큼 전역일이 가 까워진다는 코리아니겠나. 계급장이 바뀔 때마다 이런 사실이 확 체감된다. 그래서인지 성태강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스파링 1월호에 일병 계급장까지.
사 올 물건들을 수첩에 적어 둔 오종한은 그제야 걸음을 재촉 했다.
"그럼 금요일에 보자!"
"예, 휴가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충성!"
"오케이, 충성!"
가벼운 발걸음으로 막사를 나서는 오종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강진은 포상 휴가의 기회를 그에게 양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집합 때 행보관은 자신과함께 위병소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면회실을 보수하기 위한 병력을 선줄했다.
원래 위병소와 PX 그리고 옆에 붙어 있는 휴게실 겸 면회실 은 본부중대가 관할한다.
하나 본부중대가 연대 검열을 받는 중이었기에 1중대가 잠시 본부중대를 도와주기로 했다.
면회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안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 들을 밖으로 빼내는 작업부터 들어갔다.
"조심해서 옮겨라! 테이블 살 돈 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군대에 머물고 있는 테이블과 책상 들.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옮기는 동안, 차량 한 대가 위병 소를 통과했다.
군용 트럭 뒤에 오밀조밀 몸을 붙인 채 부대 전경을 빠르게 훑는 병사들.
고필중은 저들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신병 왔나 보네."
걔 중에는 이강진이 아는 얼굴도 보였다.
'드디어 왔구나.'
이강진이 그토록 기다리던 후임.
바라 식당에서 이미 한 번 이강진과 만났던 남자, 죄영고.
그가 마침내 1075대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 제51화. 다시 만나다 (1) > 끝
하자마자 1075대대로 오게 된 신병들.
이들에겐 상당히 낮선 부대였다.
하지만 동시에 익숙해져야 하는 부대이기도 했다.
인사 장교는 신병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어서 와라! 안 그래도 신병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주 잘 왔다!"
눈앞에 있는 신병들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동안 신병 전입이 상당히 뜸했던 만큼, 이번에 들어온 신병들의 숫자는 만만치 않았다.
신병이 들어올 때마다 항상 각 중대 간의 신경전이 연례행사 처럼 펼쳐진다.
하나 이번에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신병이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아서 인사과에 다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몇몇은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최영고도 그중 한 명이었다.
"어휴, 추워라!"
몸을 파르르 떠는 죄영고.
입대 전에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던 그였지만, 지금은 두상 이 버젓이 드러나는 삭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깔깔이와 귀마개, 목 토시까지 다 하고 있었으나, 군대 특유 의 칼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할 순 없었다.
"여기 우리나라 맞아? 뭐 이리 추워!"
"그러게, 러시아인 줄."
같이 들어온 신병 교육대 동기도 추위에 몸서리를 치면서 최영고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날씨가 추워지니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아……! 한 대 피고 싶다."
최영고는 진성 골초다. 하나 신병 교육대에서는 흡연이 금지 되어 있다. 입대하기 전부터 가장 걱정이었던 것이 바로 담배를 어떻게 참느냐였다.
하루에 반 갑은 피워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과연 신병 교 육대의 금연 생활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처음에는 엄청나게 걱정했지만, 막상 하다 보니 그래도 참을 만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것이 군대의 방식이다.
죄영고는 다행스럽게도 이 군대의 방식에 적응했다.
용케도 잘 참아 냈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례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담배를 참았다.
하지만 자대에 오자마자 담배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때마침 밖으로 나온 인사 장교가 최영고의 혼잣말을 들었다.
"한 대 피울래?"
"이, 이병 최영고!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긴 신병 훈련소처럼 금연을 강조하는 곳이 아니니까 피워도 돼. 거기 옆에 있는 너도 피우고 싶으면 말하고. 담배 하나 정 도는 줄 수 있으니까."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결국 인사 장교가 건네준 담배를 고이 받기로 했다.
치익
담배를 입에 문 뒤 불을 붙인 순간.
그리고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순간.
황홀함이라는 감정이 최영고를 감쌌다.
'여기가 천국인가.'
아니, 군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지옥이다.
군대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일순간 천국의 맛을 본 최영고.
즐거운 시간은 늘 그렇듯 순식간에 지나간다.
어느새 담배 하나를 다 피운 최영고.
아쉬운 듯 입맛만 다셨다. 그러면서 슬쩍 인사 장교 쪽을 바라봤다.
재수도 없게 인사 장교와 제대로 아이 컨택을 해 버리고 말았 황급하게 시선을 돌리는 최영고였으나, 이미 늦었다.
"왜, 하나 더 줄까?"
이성은 아닌 척하라고 하지만, 본능은 어서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적 갈등을 펼치는 동안, 인사 장교는 이미 담배 하나를 더 꺼냈다.
"자, 펴라."
"감사합니다!"
"하하, 이 녀석."
원래 강제로 참았다가 다시 접하면, 반작용처럼 그동안 참았 던 욕구가 폭발하곤 한다.
지금의 최영고가 딱 그랬다.
* * *
부대로 돌아가는 동안, 이강진은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영고 녀석, 담배는 어떻게 참았대?'
이강진은 최영고가 골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병 교육대 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게 할 텐데, 무슨 방법을 써서 그 기간을 견뎠는지 신기했다.
'뭐, 그건 나중에 천천히 물어보는 것으로 하고.'
이강진이 아는 미래 지식에 의하면, 죄영고는 1중대 1분대로 배정될 것이다.
일단 1075대대로 전입한 것까지는 이강진의 눈으로 직접 확 인했다. 이강진은 차에 올라타 있는 죄영고를 바로 발견해냈지 만, 최영고는 이강진을 보지 못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후임들이 들어오는 건 여태껏 이강진 이 알고 있는 미래의 흐름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법칙을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영고도 우리 분대로 오겠지.'
생활관에서 잠시 쉬는 동안, 소대장이 당직 병과 함께 인사과 로 내려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신병 배정이 끝났다는 것을 뜻했다.
머지않아 소대장과 함께 1중대로 걸어오는 신병들.
그 숫자가 자그마치 10명에 달했다.
신병들의 숫자를 확인한 1중대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야……! 저게 대체 몇 명이야?"
"이번에 신병들이 한꺼번에 확 들어오네."
"저 녀석들 다음으로 들어오는 신 병은 꼬여도 제대로 꼬였네."
"그러게, 맞선임만 10명이니까. 크큭!"
그 불쌍한 신세가 누가 될지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였다.
잠시 뒤 행정반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각 분대 분대장, 혹은 최고 선임자들은 지금 즉시 행정반으 로 모이도록 한다.
통신반장의 목소리였다.
어느 분대가 어느 신병을 데려갈지 정하려는 듯했다. 고필중은 황지웅의 등을 '탁!' 하고 내려쳤다.
"가서 똘똘한 놈으로 골라 와라."
"짜식, 더럽게 아프네. 알았다, 인마. 걱정 붙들어 매."
불행하게도 이강진은 미래를 알고 있다.
황지웅이 기대에 못 미치는 신병을 데려올 거라는 사실까지 전부다.
'영고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영고가 A급 신병은 아니 지.'
곽분섭보다도 못하다.
이상하리만치 죄영고는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지른다. 이강진 이 갈굼을 받았던 이유 중 20퍼센트의 지분을 최영고가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성태강 이후로 영 괜찮은 신병들이 안 들어온다.
물론 교육을 잘 시키면 된다. 최영고도 나중에 가면 그래도 사람 노릇은 제대로 한다.
곧 신병으로 누가 들어올지, 백우호는 벌써부터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진아, 이번에는 똘똘한 녀석으로 들어오겠지?"
이강진이 해 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냥 마음을 비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 * *
1생활관의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건 황지웅이었다.
"애들아, 신병 왔다."
황지웅이 데려온 신병이 거수경례를 펼쳤다.
"충성!"
역시 이강진의 예상대로 최영고가 들어왔다.
생긴 건 평범했다.
고필중과 서일주는 최영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모양인지 최영고는 애써 다른 곳으로 고개 를 돌렸다.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전역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신병."
"이 병 최영고!"
"너 어디서 왔나?"
"고향 말씀하시는 겁니까?"
질문자인 고필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는다는 표현을 보였
"청주에서 왔습니다!"
"청주? 그러면 강진이랑 같은 곳 아니야?"
"예, 그렇습니다!"
최영고는 입대 전에 이미 이강진과 바라 식당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고향뿐만이 아니었다.
최영고는 이강진과 같은 복만초, 복만중, 복만고를 나왔다. 즉, 이강진에게 있어선 학교 후배가 되는 셈이었다.
소위 말해서 학연, 지연이라는 것이다.
하나 최영고의 진면목은 이강진과의 관계성이 아니다.
내무 생활을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영고는 선임들로부터 크게 갈굼을 받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최영고의 가족에 있었다.
기운상 때문인지 1분대에는 특이한 검증 절차가 생겼다.
서일주가 직접 그 검증 과정을 주도하기로 했다.
"혹시 가족 중에 군 관계자이신 분은 안 계시지? 예를 들어서 아버님이 투 스타라든지……."
"없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기운상 같은 케이스는 한 명이면 충분했다.
이번에는 백우호가 질문할 차례였다.
백우호가 항상 하는 고정 질문이 있었다.
"가족 중에 누나 있냐?"
아마 대부분의 선임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질문일 것이다.
1분대에서 누나가 있던 사람은 몇 없었다.
이강진은 외동아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이 던 최영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있습니다."
"오, 그래?"
"몇 명?"
보통은 한두 명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 최영고의 가족 구성원은 클라스가 달랐다.
"다섯 명 있습니다."
"뭐어?"
"다, 다섯 명이나!"
누나가 자그마치 다섯 명!
장녀가 29세, 그 밑으로 28세, 26세, 25세, 23세. 이렇게 나열되어 있었다.
최영고는 올해로 딱 22세였다.
"아버님이 참… … 정력이 좋으신가 보구나."
"정력이 좋다기보다는, 아들을 가지고 싶어서 계속 낳으시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선임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혹시 가족사진 있냐?"
"예, 여기 있습니다."
황지웅과 이강진, 성태강을 제외한 나머지 1분대원들이 하이 에나처럼 우르르 몰려들었다.
"와, 씨발……!"
"미쳤다, 미쳤어!"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이다.
최영고의 누나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미인들이다. 심지어 차녀는 미스코리아 대회 본선 무대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었다.
막내인 최영고는 평범할지라도 그의 누나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갑자기 고필중이 최영고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서 이렇게 말했다.
"처남!"
"이, 이 병 최영고!"
"어허! 편하게 있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분섭아! 운상 아! 뭐 하냐! 귀하신 분 오셨는데 얼른 자리 깔아 드리지 않고!"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기운상보다도 더 귀한 대접을 받는 죄영고.
이것이 최영고의 인기 비결이었다.
* * *
최영고의 전투화에 광을 내주기 위해 이강진과 백우호는 각 각 오른쪽, 왼쪽 전투화를 들었다.
라이터로 구두약에 불을 붙이는 백우호.
화르륵!
녹아든 구두약을 천으로 훔친 백우호는 그것을 그대로 전투 화에 묻혔다.
"강진아, 영고 누님들 대박이지 않냐?"
"다들 이쁘시지."
"아니, 누님들은 그렇게 예쁜데, 영고는 뭐 그리 평범하게 생 겼는지 모르겠다. 누님들이 우수 유전자들을 다 빼앗아 갔나?"
"글쎄다. 낸들 알겠나."
아무리 이강진이 모르는 것 없는 척척박사라 하더라도 유전 학까진 알지 못했다.
죄영고의 누나들이 다들 한 미모 한다는 건 이강진도 인정하 는 바다.
하지만.
'그래도 지윤 씨가 제일 예쁘지.'
애초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최영고의 누나 들은 일반인 기준에서 봤을 때 예쁜 편이지만, 한지윤은 그 단 계를 이미 뛰어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톱 여배우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 는 한지윤. 그러다 보니 이강진에겐 최영고의 누나들이 그렇게 까지 매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성태강도 이와 비슷했다. 주변에 널린 게 아이돌 걸그룹 아닌 가. 눈이 안 가는 게 당연했다.
황지웅은 여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 친구가 없는 솔로 군인들은 벌써부터 최영고를 미래의 처남 대하듯 하고 있었다.
이강진은 이런 현상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영고가 가족 덕을 많이 보겠군.'
예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것처럼 보였다.
이제 문제는 면회다.
만약 최영고의 면회에 누나들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부대에 피바람이 불겠군.'
여자에 굶주린 늑대들끼리의 전쟁이 펼쳐질 것이다.
< 제51화. 다시 만나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