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2화. 특별한 전역 (1) >
제52화. 특별한 전역 (1)
휴가를 마치고 부대 인근 시내에 도착한 오종한은 1075대대 1중대 사이에서 '약속의 장소'라 불리는 곳으로 향했다.
같은 날에 복귀하는 자들이 있으면 항상 이곳에서 만나곤 한다.
오종한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2중대는 길 건너편 옆에 위치한 패스트푸드점 앞이 약속의 장 소였기 때문이었다.
"같은 대대여도 이런 건 미묘하게 다르군."
이곳에 오기 전에 2중대 약속의 장소로 슬쩍 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혹여나 자신의 분대원들과 만날까 기대해 봤지만, 야속하게 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군인이다 보니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휴가를 맞춰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었다.
"시간이 아직 20분 정도 남았군."
그는 오늘, 행정병인 김철과 같이 복귀하기로 했다.
김철은 오종한이 휴가를 나간 바로 다음 날에 휴가를 떠났다. 4박 5일이었던 오종한보다 하루 짧은 3박 4일 휴가였다.
김철과 만나기 전에 오종한은 분대원들이 부탁했던 것들을 미 리 사 두기로 했다.
가장 먼저 용사의 집에 들렀다.
"일병 계급장이 어디 있더라."
다음 달부터 달고 다닐 성태강의 일병 계급장을 구입했다.
이후에 그는 다음 목적인 스파링 1월 호를 사기 위해 움직였서점에 들어선 뒤에 스파링이 꽂혀 있는 잡지 코너로 이동했다.
'찾았다.'
군인들의 애용품이다 보니 몇 권 안 남아 있었다.
잡지 코너로 향하는 와중에 맞은편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 는 군인이 한 명 있었다.
이강진과 매번 스파링을 두고 자웅(?)을 겨루던 바로 그 군인 이었다.
군인은 오종한보다 먼저 빠른 손놀림으로 스파링 1월 호를 낚아쟀다. 그러더니 오종한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왜 저래?'
오종한은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간에 이상한 일이 있었지만, 스파링 1월 호까지 무사히 구 입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이동을 시작했다.
마침 김철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충성!"
"거수경례는 됐어. 어차피 나, 내일 나갈 사람인데. 그냥 형이 라고 불러."
"그럼 종한이 형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그래."
전역까지 하루도 안 남았다
오늘 들어가서 마지막 짬밥을 먹고, 저녁에 마지막 하루를 보 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바로 전역하면 된다.
둘이서 나란히 택시에 올랐다.
김철은 오종한에게 물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글쎄, 매번 복귀할 때마다 좆같은 기분이었는데, 이번 복귀는 그것보다 뭐랄까. 아쉬움이 많네. 기왕이면 2중대 애들도 만나 고 싶었는데, 얼굴도 못 보고 전역할 거 같아서 그게 좀 걸려."
비록 지금은 1분대 소속이지만, 오종한의 태생은 1075대대 2 중대다.
2중대원들의 얼굴이 그립게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말없이 창밖 풍경을 응시하는 오종한.
지금 보는 이 풍경들은 여태껏 지겹도록 보아 왔다.
하나 이제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못 볼 풍경들이기도 했다.
김철이 천천히 말문을 뗐다.
"나중에 전역하시고 난 다음에 2중대로 면회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
김철의 말대로였다.
2중대원들을 만나고 싶다면, 전역 이후에 오종한이 따로 이곳을 찾아오면 된다.
하나 시간을 내서 부대로 찾아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오종한 의 후임들도 언젠가는 다 전역할 터. 그러면 찾아오려고 해도 찾아올 이유가 사라진다.
그리고 집에서 부대까지 거리가 꽤 멀다 보니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면서 오종한은 생각에 잠겼다.
군 생활 참 다이내믹하게 보냈다.
스스로 그렇게 평가를 내리고 싶었다.
선임하고 쌈박질도 해보고, 영창도 다녀오기도 하고.
피식 웃은 오종한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전역하고 친구들 앞에서 썰 풀 거는 많겠네."
벌써부터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 * *
오종한과 김철이 복귀했다.
당직사관인 통신반장이 둘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반입 금지 물품은 안 가져왔지?"
"예!"
"없습니다!"
검사는 어차피 조장실에서 충분히 했을 터. 통신반장은 들어가서 쉬어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아, 그렇지. 철아, 너는 옷 갈아입고 바로 행정반으로 와라."
"상병 김철, 무슨 일이십니까?"
"너 휴가 간 동안 업무가 장난 아니게 많이 쌓여서 그래."
"애들한테 인수인계 다 해 놓고 갔습니다만……."
"시컥도 너무 답답하더라. 보면서 속이 터질 뻔 한 적이 몇 번 이나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야. 너는 빨?리 처리할 수 있잖 아? 부탁 좀 하마."
김철의 입에서 아주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
김철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 다.
왜냐하면 이전 선임들도 똑같은 꼴을 당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미안하다, 철아. 대신 이 형이 조금 있다가 PX 가서 맛있는 거 사 주마."
맛있는 거보다는 휴식이 필요했다.
하나 이걸 통신반장이 알 리가 없었다.
오종한은 그런 김철에게 힘내라는 응원밖에 하지 못했다.
?
* * *
"나 왔다, 애들아!"
1생활관으로 복귀한 오종한은 도중에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응? 한 명이 더 늘었네?"
"이 병 최영고!"
"아, 신병이구나."
신병은 딱 보면 바로 신병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묘하게 어색한 거수경례, 바짝 긴장한 표정 그리고 선임을 볼 때 인정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 이것만 봐도 눈치챌 수 있
"나한테는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어차피 내일 전역하거든. 그 냥 편하게 종한이 형이라고 불러."
"아, 아닙니다!"
최영고는 오종한이 자신을 떠보려고 하는 건 줄로 착각했다. 하나 오종한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황지웅도 오종한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옆에서 어필해줬다.
"종한이 형 말이 맞아. 그냥 편하게 불러도 돼. 그렇지?"
"너한테는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죄송합니다, 오종한 병장님!"
"하하하! 농담이야."
1분대원으로서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농담 따먹기 같은 것도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종한이 형."
고필중이 그를 불렀다.
"저녁 때 전역 파티할 거니까 밥 조금만 먹어. 알았지?"
"라임 좋네, 저녁 때 전역 파티. 래퍼인 줄 알았다."
"래퍼는 우호고, 아무튼 진수성찬을 차려 줄 테니까 짬밥 너무 많이 먹지 마."
"그래, 알았다."
그래도 오종한은 축복받은 편이었다.
보통 전역을 앞두고 전출을 당하면, 분대원들이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챙겨 주진 않는다.
이게 다 이강진 덕분이다.
그가 먼저 다가와주지 않았더라면, 오종한은 아직도 겉도는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강진이는?"
이강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운상이 대신 답했다.
"행정반에 잠깐 일 있다고 하고 나갔습니다."
"그래? 길이 엇갈렸나 보네."
"이강진 상병한테 볼일 있으시다면, 제가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그냥 놔둬."
아직 전역하려면 몇 시간이 남아 있다.
그동안 이강진에게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터.
오종한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충성. 상병 이강진,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오, 강진아. 잘 왔다."
통신반장이 이강진을 따로 호출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예, 알겠습니다."
어투 그리고 눈빛으로 보아 하니…….
'주식 이야기군.'
딱 보면 안다.
행보관실로 들어선 이강진. 문을 닫자마자 통신반장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강진아, 요즘 나, 너무 힘들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손을 대는 족족 폭락하고 있는데, 안 힘들 리가 있을까.
주식에 손을 댄 이후로 벌써 3천만 원 가까이를 날려 버린 통 신반장.
그중에서 이강진의 말을 안 듣고 더 욕심을 부렸다가 날려먹 은 돈만 2천만 원이었다.
이강진은 그런 통신반장을 보면서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 제 말 들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아, 그러게 말이다. 근데 사람 욕심이라는 게 어쩔 수 없는 거 같더라. 막상 주가가 올라가는 거 보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버티고 있더라. 네 말대로 이때다 싶을 때 바로 팔아 치웠어야 했는데……. 내가 미쳤지, 미쳤어!"
이제는 자책하는 단계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이강진도 통신반장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예전에 이강진도 그런 식으로 거액의 돈을 잃었던 적이 있으 니까.
"강진아, 딱 한 번만 나 살려주면 안 되겠니? 이렇게 부탁하 마!"
간절하게 애원하는 통신반장.
사정은 딱했으나, 이강진은 아무런 이득 없이 정보를 흘려주고 싶진 않았다.
행보관처럼 오고가는 게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면, 통신반장 에게도 정보를 슬쩍 흘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통신반장은 그게 없었다. 그래서 이강진은 여태껏 통 신반장을 등한시했던 것이다.
'대충 둘러대야겠군.'
슬슬 귀찮아지 려고 했다.
"지금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일단 장 상황을 좀 보시 면서 때를 기다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 '때'라는 게 언제쯤 올까?"
"저도 잘 모릅니다."
만약 알면, 그는 신일 것이다.
미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강진조차 계속해서 주식 정보를 확인하는 중이다. 언제, 어떻게 주가 흐름이 또 바뀔지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는 데에 성공한 이강진.
행보관실을 나왔을 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김철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철아, 너, 오늘 휴가 복귀한 거 아니냐?"
"어, 심지어 방금 복귀했지."
"근데 웬 업무야?"
"몰라. 간부들이 나 아니면 안 된다나 어쨌다나……. 이놈의 행정병, 빨리 때려 치고 싶다, 진짜."
처음에는 행정병이 되었을 때 기뻤던 마음도 있었다. 몸 쓰는 일은 안 되지만, 컴퓨터 다루는 일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행정병은 최악의 보직이다. 김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철이 왔다는 건, 오종한도 휴가 복귀를 했다는 뜻이 된다.
"오종한 병장님하고 같이 복귀했지?"
"어, 아마 너희 생활관에 계실 거야."
키보드를 두드리 던 걸 잠시 멈춘 김철은 택시를 타고 오면서 오종한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종한 병장님, 전역하기 전에 2중대원 쪽 사람들하고 만나 고 싶으셨나 봐. 나하고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 전에 2중대 아저씨들이 매번 모이던 곳으로 찾아갔었다고 하더라."
"……그래?"
이강진도 가끔 오종한이 2중대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말을 흘 리는 걸 자주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2중대 사람들을 내일 아침 이곳으로 불러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어도 이강진에겐 그런 힘과 영향력이 없었다.
이것이 병사의 한계다.
오종한은 그동안 1분대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최칠 완 사건에서 대활약을 해줬다. 그가 아니었다면, 죄칠완은 아 직도 부대에 남아서 병사들을 계속 괴롭혔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이강진의 머릿속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오종한 병장한테 AS 서비스, 제대로 해 줘야겠군.'
< 제52화. 특별한 전역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