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6화. 작은 식구 (1) >
제56화. 작은 식구 (1)
1월 중순경에 신청했던 이강진의 휴가가 정식으로 통과되었 다.
이번 휴가는 기운상과 함께 나가기로 했다.
성태강과 같이 나가는 것보다 기운상과 나가는 게 그나마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강진.
하지만 그건 아주 크나큰 오산이었다.
휴가를 떠나기 하루 전날.
가족들과 통화를 마친 기운상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 했다.
-아버지가 저 픽업하러 오시겠답니다.
이강진만 난리 난 게 아니었다.
부대 전체가 난리가 났다.
사단장이 왔다간 지 얼마나 됐다고 투 스타가 또 1075대대를 방문한단 말인가!
물론 부대 순찰이 목적이 아닌, 그저 아들을 데리러 오는 것 에 지 나지 않은 방문이 지 만, 그래도 투 스타가 온다는 사실은 변 함이 없었다.
근처 부대에서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르게 된 김에 자신의 아 들도 같이 픽업해 데려가겠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연대장이 1075대대를 찾았다.
"대대장 내 복장, 어떤가!"
"말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 그래?"
소장이 온다는데 어찌 연대장이 가만히 있겠나.
이들은 서로의 복장을 점검하면서 기운상의 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덩달아 이강진도 이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기운상과 같이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는 것.
단지 이것밖에 없었다.
기운상을 픽업하러 오는 김에 이강진을 시내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강진은 속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태강이랑 같이 휴가 나가는 게 더 좋았을지도…….'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마음이 한없이 불편했다. 몸이 편하다는 장점을 씹어 먹고도 남을 정도로 크나큰 단점이었다.
머지않아 한 대의 민간 차량이 위병소 앞에 등장했다.
투 스타가 다시 한번 1075대대에 강림했다.
"추우웅! 서어엉!"
우렁찬 경례 구호를 들려주는 연대장.
기운상의 아버지, 기정수 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대 순찰 나온 것도 아닌데 뭐 하러 다들 나와 있나."
"소장님께서 오신다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보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았습니까?"
본인이 직접 운전을 해서 먼 거리를 달려왔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그러나 기정수 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번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내 일이니까."
오전에 다른 부대에 들렀다가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일찍 퇴 근할 예정이었다.
그 말인즉슨.
기운상도 그의 아버지와 같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게 다시금 떠오른 모양인지 기운상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 다.
그래도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게 버스, 전철을 번갈 아 타고 가는 것보다 빨리 도착한다.
아버지와 불편한 관계지만, 그 불편함만 참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모양인지 기운상은 얌전히 기정수 소장 과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충성!"
이강진도 기정수 소장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는 이강진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봤다.
"그간 잘 지냈나."
"상병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자네 처음 봤을 때에는 이등병이었는데. 못 본 사이에 작대 기가 더 늘었군. 유명 인사가 되기도 했고 말이야."
이강진이 육군본부에 왔을 때, 기정수 소장은 그와 짧게 이 야 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기정수 소장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우리 아들이 폐 끼치는 건 없나?"
"예, 없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군 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슬슬 출발할 테니까 운상이하고 같이 타게. 자네부터 시내에 바래다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이강진은 기운상과 먼저 차에 올라탔다.
그동안 기정수 소장은 연대장, 대대장과 짧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기운상의 한숨은 더욱 짙어졌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버스 타고 간다고 할 걸 그 랬습니다."
"왜 ?"
"괜히 아버지가 부대로 올 때마다 부담스럽습니다. 오늘만 봐 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던 연대장님까지 아침에 헐레벌 떡 오시고……. 민폐 끼치는 거 같아서 그저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하나 이강진은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 죄책감 가지지 마. 연대장님이나 대대장님이나 널 원 망할 그럴 분들이 아니니까."
기운상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강진은 오히려 지금이 좋았다.
왜냐하면 대대장이 기운상이라는 병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주 간혹 상식 밖의 일을 시키는 지휘관이 있다. 병사들의 안 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승진을 위해서 무조건 병사들을 굴리고 또 굴리는 그런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물론 1075대대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기운상이 라는 제어장치가 있어서 그런지 병사들을 무리하게 굴리거나 하 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결국 1075대대 병사들은 기운상 덕분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 해야 하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그래도 기운상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편한 건 변함이 없었다.
* * *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그 어떤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정수 소장이 말을 걸어도 기운상은 '네, 아니오.'라고 단답 형으로 답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이강진은 속으로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시내에 도착할 수 있기를!
이강진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걸까.
시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를 정차시킨 뒤.
이강진은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차에서 내렸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네. 그보다 정말 여기서 내려줘도 괜찮나? 전철역까지 바래다줄 수 있으니 괜찮다면 같이 가도록 하지."
"아, 아닙니다! 전 원래 버스 타고 갑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 다! 충성!"
혹여나 기정수 소장이 또다시 붙잡을까 봐 이강진은 빠르게 자에서 멀어졌다.
사실 시외버스 터미널역까지는 전철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아주 가끔 버스를 이용하곤 하지만, 버스보단 전철이 더 빠르고 정확했다.
하나 그렇게 말한 순간, 분명 어떻게든 이강진을 태우고 가려 고 할 게 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가시방석에 계속 앉은 듯한 느낌은 더 이상 사양하고 싶었다.
* * *
새로운 한 해가 밝은 후에 처음으로 고향인 청주를 찾은 이강진.
휴가를 워낙 자주 나와서 그런지 해가 바뀌었어도 청주는 여 전히 이강진이 알고 있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으로 들린 뒤에 사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연 순간, 갑자기 정체불명의 작은 생 명체 하나가 이강진을 보더니 막 짖어 대기 시작했다.
왈 왈 왈
개였다.
이강진을 향해 계속 짖어 댔지만, 겁이 많은 성격인지 이강진 에게 섣불리 접근하진 못했다.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늦게 이강진의 어머니가 모습을 보였다.
"강진이 왔구나."
"엄마, 이 개는 뭐예요?"
"이거? 엄마 아는 친구가 개 키우는데, 저번 년도 중순쯤인가 새끼를 많이 낳았거든. 근데 애들이 점점 커질수록 키우는 게 감 당이 안 된다고 해서 엄마가 공짜로 분양 받아 왔어. 마침 개도 키워 보고 싶었고. 어때, 귀엽지 않니?"
이강진의 어머니 품에 꼭 안겨서 혀를 내민 채 헥헥거리는 강 아지.
좋은 말티즈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강아지였다.
반려견 등록도 따로 한 모양인지 목걸이까지 착용하고 있었 다.
순간 이강진은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나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 혼자서 이 넓은 집에 있어야 하니까. 반려견 한 마리 있으면 외롭지 않고 좋겠지.'
그리고 이강진은 딱히 개를 싫어하거나 하는 타입이 아니었 다.
오히려 좋아한다.
단 키워 본 적이 없을 뿐.
"이름은 뭐라고 지었어요?"
"행복이."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이름이네요."
여태껏 불행한 삶을 살아왔던 이강진 모자.
하나 앞으로 새로 살게 된 작은 식구의 이름처럼 이제는 행복 함만 가득하기를.
이것이 이강진의 새해 소원이다.
이강진의 어머니가 바라 식당으로 일을 하러 나간 동안, 이강진은 행복이와 함께 집을 지키기로 했다.
장이 열리자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은 이강진.
휴가를 나올 때마다 항상 하는 습관…… 아니, 일거리가 있다.
바로 단타다.
얼마 전 오종한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만들어 주는데 큰 도움을 줬던 통신반장에게 종목 하나를 추천한 적이 있었다.
사이버 지식 정보방에 갈 때마다 매번 눈여겨봤던 종목들의 기사를 찾아보곤 하는 이강진에게 최근에 관심을 받기 시작한 종목이 하나 있었다.
바로 풍일제지다.
이 종목은 이강진이 몰랐던 종목이다. 하지만 요즘 오르는 게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는데, 그세 또 올랐다.
"이거로 재미 좀 볼까."
오늘의 전장은 풍일제지로 결정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때.
이질적인 감촉이 이강진의 오른쪽 발등에서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행복이가 이강진의 발등을 핥고 있었다.
"요 녀석."
어제는 이강진을 처음 봐서 그런지 그렇게 짖어 대더니, 오늘 은 먼저 와서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행복이도 사람이 그리울 것이다. 이강진의 어머니는 일 때문 에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자리를 비워야 하니, 그동안 행 복이 혼자서 집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을 터.
행복이를 번쩍 들어 올린 이강진이 말했다.
"오냐. 휴가 동안만이라도 내가 같이 있어 주마."
이강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모양인지 행복이는 헥헥거리 면서 이강진의 볼을 핥아 줬다.
어서 군대에서 나와서 행복이와 같이 자주 놀아주고 싶다.
전역해야 하는 목표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행복이와 함께 대학교 근처를 돌아다니기로 한 이강진은 반 려견을 산책시키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가방에 넣어 뒀다.
목표는 집 근처에 있는 국립 대학교.
학교 안이 꽤 넓어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기 딱 좋았다.
이강진도 평소에 이어폰을 끼고 대학교 안을 돌아다니 면서 자주 조깅을 하곤 했었다.
그 코스를 따라 행복이와 함께 산책길을 나서기로 했다.
방학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아리 활동 때문에 왔거나, 아니면 계절학기 수업을 듣기 위 해 온 학생들이 었다.
행복이를 본 몇몇 학생들은 대부분 귀엽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여자들에게 인기였다.
'그러고 보니 지윤 씨도 개를 좋아할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걸 핑계로 지금 메신저라도 보내 볼까 하던 찰나였다.
"어머, 혹시 강진 씨 아니에요?"
들어 본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이강진을 반겼다.
어디서 들어 봤나 했더니…….
"영고 넷째 누나 분 아니십니까?"
"네, 맞아요!"
작년 말일, 면회실에서 봤던 최영고의 세 명의 누나들.
그중에서 가족들에 의해 이강진 같은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강 제로 취향이 밝혀진 여성이 있었다.
최영혜.
설마 그녀와 여기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 제56화. 작은 식구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