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화. 혹한기 (4) >
제57화. 혹한기 (4)
2일 차는 결국 하루 종일 제설 작업만 하다가 끝이 나고 말았다.
3일 차 오전도 마찬가지였다.
치웠다 싶으면 눈이 오고, 다 치웠다 싶으면 또 눈이 온다.
병사들은 슬슬 자신들이 혹한기 훈련을 받으려고 이곳에 온 건지, 아니면 제설 훈련을 하러 이곳에 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 했다.
그나마 오후에는 눈이 그쳤다.
그사이에 병사들은 재빨리 제설 작업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병사들이 바삐 움직일 때.
레토나 한 대가 8790진지에 진입했다.
다행스럽게도 연대장이 탄 차는 아니었다.
레토나에서 하차한 사람은 바로 8033대대에 소속되어 있는 한중훈 중사였다.
1중대가 중대 ATT훈련을 받을 당시, 대항군 역할을 소화했던 바로 그 남자다.
한중훈 중사는 곧바로 1075대대장을 찾았다.
"충성!"
"음?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대대장의 머릿속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대항군 훈련 때문에 미리 지형 조사 좀 하려고 나왔습니다."
그 혹시나가 역시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설마 연대장님이 자네에게 대항군 좀 맡아 달라고 부탁하셨 나?"
"예, 그렇습니다."
최악의 상황이다.
한중훈 중사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신출귀몰 플레이로 여태껏 수많은 부대들을 놓락했던 엘리트 대항군이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바로 '귀신 한중훈'이었다.
하나 이 귀신은 작년에 1075대대 1중대에게 한 번의 쓰디쓴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연대장이 1075대대 혹한기 훈련에서 대항군을 맡아 줄 수 있 겠냐는 부탁을 해 왔을 때, 한중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중대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8790진지는 한중훈 중사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이곳 8790진지에서의 승률은 100퍼센트.
무패 신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반면 대대장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한종훈이 8790진지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연대장님이 한 중사한테 대항군 역할을 맡긴 것일지도……."
한중훈 중사는 대대장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지형 상태 좀 보러 가 보겠습니다. 충성!"
"충성. 그리고 말일세."
"예, 대대장님."
"내일 살살 좀해 주게, 허허."
솔직히 대대장은 겁이 났다.
한중훈 중사에게 내일, 대대 전체가 탈탈 털릴까 봐.
그러나 한중훈 중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중훈 중사는 이번에 제대로 칼을 갈고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75대대 1중대는 반드시 털어 주겠다!'
저번에 당한 설욕을 이번 기회에 갚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확실한 전략이 필요하다.
한중훈 중사가 이곳 8790진지에서 100퍼센트 승률을 자랑할 수 있는 비결이 있었다.
바로 한중훈 중사만이 알고 있는 뒷길 루트 때문이었다.
8790진지는 공터로 보이지만, 사실 길이 하나 연결되어 있었즉, 입구 말고 다른 길이 존재한다.
한중훈 중사는 이 뒷길을 이용해서 몰래 부대로 잠입했다. 그 러곤 갑자기 튀어나와서 부대를 탈탈 털고 사라졌다.
이 8790진지 뒷길 때문에 한중훈 중사에게 귀신이라는 별명 이 붙게 된 것이다.
한중훈 중사는 혼자서 몰래 이 뒷길을 점검하기로 했다.
길은 상당히 좁다. 대신 주변에 수풀이 우거진 탓에 몸을 숨 긴 채 잠입하기 딱 좋은 길이었다.
눈이 와서 바닥이 좀 미끌거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양호하다.
'내일 오랜만에 써먹어 볼까.'
한중훈 중사는 벌써부터 자신의 승리를 점쳤다.
뒷길을 벗어나 다시 진지로 돌아오던 찰나였다.
낯선 이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이도훈 소위였다.
"충성."
"충성."
서로 인사처럼 거수경례를 했다.
"어느 부대에서 오셨습니까?"
이도훈이 먼저 한중훈에게 물었다.
"8033대대 입니다."
"아, 보병 사단 쪽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1075대대도 아니고, 8033대대 사람이 혼자서 여기를 왜?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더 의심을 받기 전에 한중훈은 빠르게 장소를 이탈했다.
때마침 포대장이 이도훈을 찾았다.
"전포대장,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방금 한중훈이라는 중사와 만났습니다."
"한중훈 중사? 아, 그 '귀신'이라 불리는 사람인가 보군. 또 어 느 부대를 털려고 하는지…… 설마 옆 부대인가?"
포대장은 한중훈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이도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포대장님,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수상한 냄새가 난다.
* * *
3일 차 훈련이 종료되고 난 뒤.
대대장은 다급하게 중대장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병사들은 씻을 준비를 서둘렀다.
오늘도 변함없이 냉수 샤워다.
고필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러다가 냉동인간 되겠네."
어쩔 수 없었다. 야외에서 온수 샤워에 욕심을 내는 건 너무 사치다.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게 어디란 말인가.
오늘도 추위와 함께 샤워에 임할 때.
백우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샤워를 마친 이강진은 후임들에게 백우호의 행방을 물었다.
"우호 어디 갔는지 아는 사람?"
"이 병 곽분섭! 아까 3일 만에 신호 왔다고 화장실 갔습니다."
"오래 걸리겠네."
야외 훈련을 나오면 유독 변을 못 보는 병사들이 있다.
백우호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동안 이강진은 텐트에 들어가서 취침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다.
텐트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두루마리 휴지를 든 백우호가 마침 텐트로 돌아왔다.
"어서 와라. 쾌변하고 왔냐?"
"쾌변은 무슨. 그보다 큰일 났다."
"뭔 일인데."
"아까 똥 싸면서 들었는데. 대대장님이……."
자신이 들은 정보를 이강진에게 알려 주기도 전에 1부소대장 의 외침이 훼방을 놓았다.
"전 병력, 지금 하던 거 중지하고 집합해라! 어서!"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강진은 빠른 속도로 전투복을 입었다.
이 시간에 갑자기 웬 집합이란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병사들 앞에 굳은 표정을 한 중대장 이 등장했다.
"다들 잘 들어라. 지금 비상사태다."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중대장의 목소리.
무엇이 대체 그를 이토록 겁에 질리게 만든 걸까.
그 정체가 머지않아 밝혀졌다.
"내일 대항군 역할을 맡기로 한 사람이…… 한중훈 중사라고 한다."
귀신이 다시 이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혹한기 훈련 4일 차.
오늘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텐트에서 나온 고필중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흘렸다.
"아니, 차라리 오늘 같은 날에 눈이 올 것이지. 이놈의 눈은 오 라고 할 땐 안 오고, 오지 말라고 할 땐 오고 그러네."
군대 날씨는 곧 과학이다.
정말 안 좋은 타이밍만 기가 막히게 맞춘다.
만약 눈이 내렸더라면, 어쩌면 대항군 훈련은 짬 처리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나 오늘 날씨는 너무나도 맑았다. '이렇게 맑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날씨가 괜찮아진 관계로 대항군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되기로 했다.
병사들은 벌써부터 걱정이 몰려왔다.
한중훈 중사가 이들을 잡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왔을 텐데. 이 번에도 과연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8790진지에서 단 한 번도 붙잡혔던 적이 없는 한중훈 중사를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아침 점호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론 중대장도 마찬가지 였다.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아…."
걱정을 떨쳐버리기 위함인지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질 러 댔다.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를 한 뒤에 아침 식사가 진행되었다.
배식을 맡게 된 오호만 병장은 아침부터 기운이 없는 병사들 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강진아."
"상병 이강진."
"다들 왜 이렇게 힘이 없냐? 혹한기 4일 차라서 그런가?"
피로가 누적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것보다 더 큰 요인은 바로 한중훈 중사였다.
어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 공유해 준 이강진.
"한중훈 중사라는 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셔?"
"예, 만만치 않은 분입니다. 오늘 연대장님도 대응 훈련 보러 오실 거 같은데, 만약 한중훈 중사한테 털리기라도 한다면……. 그다음은 오호만 병장님도 어떻게 되실지 잘 아실 겁니다."
"알다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내가 뭐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네."
그렇다고 취사병인 오호만 병장이 직접 좋을 들고 대응 훈련 에 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그렇게 해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건 누구보다도 오호만 병장 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힘내라."
응원뿐이다.
* * *
이강진은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생각했다.
분명 회귀하기 이전에도 한중훈 중사가혹한기 때 대항군 역 할을 맡았을 터.
하나 중대 ATT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한중훈 중사의 침투 루 트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지?'
큰일이다. 이대로 가면 무조건 한중훈 중사에게 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이 유리한 돌파구다.
하나 20여 년 전의 기억이라 그런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중대 ATT 때에는 바로 떠올랐는데.'
아무래도 혹한기는 머릿속에서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 1순 위여서 쉽게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아, 모르겠다.'
일단 화장실이나 갔다 오기로 했다.
이강진도 백우호처럼 오랜만에 신호가 왔기 때문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를 챙겨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운이 안 좋았다.
다들 이강진처럼 배 속 신호를 받은 모양인지 화장실을 두고 줄을 쫙 선 채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좆됐네.'
아직까진 그래도 참을 만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때 한 남자가 이강진을 찾았다.
"강진아."
"충성!"
이도훈 소위가 이강진에게 손짓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하필이면 이 때에…….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어, 너한테도 분명 도움되는 이야기일 거야."
"그치만 지금은 좀……."
두루마리 휴지를 겨드랑이 사이에 낀 채 화장실과 이도훈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강진.
그 모습에 이도훈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어쩔 수 없네."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이도훈.
원래는 이강진에게 하나의 정보만 알려 주려고 했으나, 서비 스로 하나 더 주기로 했다.
8790진지에는 화장실이 총 세 개가 있다.
하나는 1075대대가 있는 쪽에, 다른 하나는 이도훈의 부대가 있는 쪽에, 나머지 하나는 두 진영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이강진이 알고 있던 화장실은 1075대대에 있는 쪽 하나뿐이 었다.
세 개나 있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중간에 위치한 화장실이 마침 비어 있었다.
이도훈이 알려 준 덕분에 이강진은 아침에 편안하게 큰 일(?)을 치를 수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나온 이강진은 이도훈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전포대장님."
"네 얼굴을 보니까 너무 급해 보였거든. 사실 너한테 알려 주 려고 했던 게 화장실 위치는 아니고."
이도훈은 주변을 살폈다.
그런 뒤에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너한테 귀신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마."
< 제57화. 혹한기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