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7화. 혹한기 (6) >
제57화. 혹한기 (6)
설마 한중훈이 스카우트 제의를 해 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실제로 이강진을 자신의 밑으로 데려가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훈은 이강진을 어떻게든 데려오고 싶어 했다.
이강진의 대답은 무엇일까.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1075대대가 편하고 좋습니다."
이미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굳이 타 부대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이강진이 전투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서 한중훈을 두 번이나 연달아 잡은 게 아니었다.
정보력의 힘이다.
한중훈의 침투 루트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 이었다.
하나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한중훈은 그저 아쉬움에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너랑 같이 다니면 어떤 부대든 다 털고 다닐 수 있을 거 같은 데. 아쉽네."
"죄송합니다."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네 선택이니까. 대신 다음에는 반드시 내가 이길 거다."
승부욕을 불태우는 한중훈 중사.
과연 3번째 대결의 기회가 있을까?
기억이 흐릿한 이강진이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한중훈 중사와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마주치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 *
혹한기 훈련 5일 차의 아침이 밝았다.
이제 병사들은 추위 속에서 잠을 청하는 게 익숙해졌다. 굳은 근육을 스트레칭으로 풀면서 아침을 맞이하는 병사들. 아침 점호를 간단하게 마치고 바로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오전에는 간단한 병기본 훈련만 소화했다. 이후에 점심식사 를 한 뒤, 오침 시간이 주어졌다.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행보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병사들의 단잠을 깨웠다.
"일어나 텐트 걷어라! 언제까지 퍼 잘 거냐!"
기상나팔 소리보다도 더 우렁찬 행보관의 외침에 병사들은 하나둘씩 눈을 떴다.
그동안 정들었던 텐트를 철거한 후에 이들은 완전군장을 맸다.
오후 6시까지 한 곳에 집합해야 한다.
그전에 이강진은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서 이도훈 부대가 있는 곳을 찾았다.
포병 부대도 때마침 모든 훈련을 마치고 이동 준비를 서두르던 찰나였다.
"충성!"
이강진의 목소리에 이도훈이 뒤를 돌아봤다.
"어, 강진이구나."
"어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말을 전하러 왔다.
이도훈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너한테 은혜를 갚은 것뿐이니까. 가만 상병 달았으니까 이제 전역 때까지 1 년도 안 남았겠네?"
"예, 그렇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박스카로 간 이도훈은 잠시 후, 작은 종이 한 장을 이강진에게 건넸다.
"이거, 내 폰 번호야. 나중에 전역하고 나면 연락해. 내가 밥이라도 사줄게."
"감사합니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충성!"
"충성."
이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 * *
혹한기 훈련의 마지막 시련.
야간 복귀 행군.
1일 차 행군 때 이용했던 코스를 똑같이 걸으면 된다.
행군이 시작되자마자 고필증의 입에서 짜증 섞인 말이 튀어 나왔다.
"이놈의 물집은 5일이나 지났는데도 안 없어지네! 아파 죽겠 다, 진짜!"
뒤에서 걷던 서일주가 어제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항군 잡을 때에는 잘 뛰어다니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포상 휴가가 걸려 있었으니까. 물집이 뭐가 대수겠냐.
안 그래?"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포상 휴가가 눈앞에서 방방 뛰어다니는데, 어찌 가만히 있으 랴.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있든 말든 일단 뛰고 봐야 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1분대 전체가 2박 3일 포상 휴가를 하나씩 받게 되었다.
황지웅과 고필중의 말년 휴가가 더 길어진 셈이었다.
이들 입장에선 땡큐였다.
혹한기 훈련 끝나고 말년 휴가 나가서 무엇을 할지. 행복한 고 민으로 행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내려고 했다.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복귀 행군이라 마음만큼은 편했다.
왜냐하면 이것만 끝내면 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머리 위로 밤하늘이 짙게 깔 려 있었다.
행군이 시작된 지 4시간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하늘에서 백색 가루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황지웅은 눈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왜 안 오나 했다."
혹한기 훈련을 받는 동안 하도 눈을 많이 봐 온 탓에 이제는 안 보이면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눈발은 꽤 약했다.
쌓일 만한 눈은 아니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떨어지는 눈들을 보면서 이강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한기 훈련에 딱 어울리는 날씨네.'
이만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 * *
도로를 지나쳐 산길에 접어든 병사들.
입구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했다.
그동안 1분대원들은 이강진의 충고에 따라 전투화를 벗고 발을 말렸다.
이강진은 완전군장을 내려놓고 1분대원들에게 외쳤다.
"물집 환자 있나?"
"이병 곽분섭!"
"이 병 최영고!"
1분대 막내 두 명의 발바닥에 엄지만 한 크기의 물집이 나란 히 잡혀 있었다.
"양말 마른 걸로 꺼내서 갈아 신어라. 반창고 붙여 두는 것도 잊지 말고. 그리고 전투화 끈 꽉 조여 매, 최대한 꽉. 알았지?"
"예!"
할 수 있는 모든 조지를 동원하기로 했다.
기운상도 물집이 생겼지만, 그래도 이등병 둘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았다.
고필중은 이강진이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분대원들은 아직 멀쩡했다.
"우호야, 네가 나랑 같이 뒤에 가면서 애들 챙기자."
"오케이."
백우호는 이강진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또다시 고단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눈을 맞으며 걷고 또 걷다 보니 방탄모와 완전군장 위에 눈이 살짝 쌓여 있었다.
이강진은 뒤에서 걸으면서 후임들의 완전군장에 쌓인 눈들을 털어 줬다.
"조금만 힘내자. 거의 다 왔어!"
참고로 이 이야기는 2시간 전에도 했었다.
7시간이 남았든, 5시간이 남았든, 30분이 남았든. 거의 다 왔다는 말로 후임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줬다 행군이 시작된 지 7시간째.
이제는 정신력과의 싸움이다.
슬슬 말년들의 불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말년에 혹한기 행군이라니! 젠장! 재수도 없지!"
"그러게 말이다, 에휴."
이강진은 저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말년 때 훈련받는 일만큼 짜증 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게 혹한기 훈련이라고 한다면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훈련은 다 받았다.
새벽 3시 30분쯤 되었을 때였다.
위병소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익숙한 불빛.
그리고 익숙한 건물들.
"대대다!"
"진짜로 거의 다 왔다, 애들아! 힘내자!"
"파이팅!"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냈다.
위병소를 통과하는 순간, 병사들은 '해냈다!'라는 쾌감을 느꼈다.
이번에도 1중대는 열외자 없이 전원 행군을 마쳤다.
대대 연병장에 모인 1075대대 병사들은 대대장의 훈시가 빨리 끝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병사들과 단체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걸까.
대대장은 말을 짧게 줄였다.
"다들 혹한기 훈련받느라 고생 많았다! 막사로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라! 이상!"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병사들은 날아갈 것만 같은 기쁨을 느꼈다.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생활관도 마찬가지였다.
서일주 병장이 매트리스에 몸을 날리면서 외쳤다.
"집 왔다!"
막사가 이렇게 아늑하고 포근한 곳일 줄이야.
그러나 아직 훈련이 끝난 건 아니다.
씻고, 정리를 마치고 그리고 잠에 들기 위해 누웠을 때.
그제야 비로소 모든 훈련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강진은 후임들을 다독였다.
"사람들 몰리기 전에 샤워부터 먼저 해라. 짐은 그다음에 정 리해."
"예, 알겠습니다!"
후임들이 샤워를 하러 간 동안, 이강진은 행정반으로 향했다.
"충성 상병 이강진,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어, 강진아. 무슨 일이야?"
통신반장이 피곤한 표정으로 이강진을 바라봤다.
"환자 현황 보고하러 왔습니다. 물집 환자 총 4명. 심한 환자 는 없습니다."
"역시 1 분대가 빠르네. 오케이, 알았어. 혹시 모르니까 물집 환 자들은 의무실에 들러서 치료받고 자라고 하고. 취침 준비 끝나면 와서 보고하고 바로 자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보고를 마치고 다시 1생활관으로 돌아가는 이강진.
통신반장은 이강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 었다.
"짜식, 이제 선임 티가 확 나네."
* * *
한참 잠에 빠져 있던 이강진은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킨 이강진은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아직 기상하려면 10분 정도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전에 눈을 뜬 병사들은 짧게나마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었 다.
이강진도 기왕 눈을 뜨게 된 거, 화장실이나 다녀와야겠다는 심산으로 생활관을 나섰다.
화장실엔 이강진보다 먼저 온 손님이 볼일을 보고 있었다.
동기인 김철이 이강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잘 잤어?"
"온몸이 다 뻐근해 죽겠어."
"피곤할 만도 하지."
"년 언제 일어났어?"
"나? 1시간 전에."
꽤 일찍 일어났다.
김철은 원래 잠이 별로 없었다. 입대하기 전부터 자주 밤샘 작업을 한 덕분에 이런 체질이 되어 버렸다.
대신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걸 굉장히 힘들어 했다.
신병 훈련소 때에도 그랬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너한테 이야기해 줄 거 있었는데."
김철의 말에 절로 귀를 기울였다.
"뭔데?"
"아까 너한테 전화 왔었거든. 지금 잔다고 하니까 나중에 다 시 건다고 했어. 점심 먹기 10분 전쯤에 연락 준다고 했으니까 …… 슬슬 을때 됐네."
"누구한테서 온 건데?"
"놀라지 마라. 누구냐 하면……."
김철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행정반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아, 강진이 일어나 있으면 행정반으로 와라.
통신반장의 목소리였다.
급하게 볼일을 마무리 지은 이강진은 김철에게 먼저 가 보겠 다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행정반으로 향했다.
"충성!"
"어디 있었어? 1생활관에 가니까 없더만."
"화장실에서 소변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아무튼 전화 왔으니까 한 번 받아 봐라."
"예, 알겠습니다."
부대로 전화를 걸 만한 사람은 세 명밖에 없었다.
이강진의 어머니, 황민수 그리고…….
한지윤.
'혹시 지윤 씨 가?'
기대감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힘든 훈련을 마친 뒤에 듣는 한지윤의 목소리는 이강진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힐링이었다.
"어흠!"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한지윤의 고운 음성이 들려올 거라고 기대했지만.
-강진이냐? 재수 없게 왜 목소리를 깔고 그래?
남자의 목소리였다.
실망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누구십니까?"
-뭐야, 나 누군지 몰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서 들은 목소리인 거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01 녀석, 그동안 형 안 봤다고 목소리도 까먹었냐? 너무하네.
이 어조, 이 목소리 톤!
이제야 이강진은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마등이 형!"
< 제57화. 혹한기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