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보관이 이강진, 김철에게 이야기했던 분대장 교육대 파견 시기가 하루 전날로 다가왔다.
그전에 이강진은 4박 5일 동안 사용할 개인 짐을 챙기느라 여 념이 없었다.
'세면도구하고…… 깔깔이도 챙겨야지.'
짐을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우호야, 잠깐만."
"나? 왜? 내일 파견 가는데 필요한 거라도 있어?"
"있지. 아주 중요한 거야."
백우호는 이강진이 자신에게 뭔가를 빌려 달라고 할 줄 알았 었다.
하나 그 반대였다.
"자, 이거."
"이게 뭔데?"
"척 보면 모르냐. 분대장 수첩이잖아."
분대장을 차게 되면 가지게 되는 고유 아이 템이다.
이걸 왜 자신에게 넘기는 것인지. 백우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나보고 분대장 차라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라.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나 대신 애들 좀 관리해 달라는 뜻이야. 네가 부분대장이 잖아."
"아, 그랬지."
이강진이 워낙 혼자서 철저하게 다 관리해서 그런지 백우호는 가끔 자신이 부분대장이라는 걸 까먹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결산 회의 때 나오는 내용, 여기에 다 적으면 돼. 그리고 맨 앞에 있는 봉투에 분과 운영비 들어 있으니까 혹시 비품 구입해 야 한다 싶을 때에는 이거로 사용하고. 그리고……."
기타 인수인계 사항들을 백우호에게 전달했다.
가장 짬이 높은 서일주에게 차마 이런 걸 시킬 순 없었다.
그리고 백우호가 일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시키는 일은 충분 히 잘 해내는 동기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이강진은 주저 없이 백우호에게 자신의 빈자리를 맡기기로 했다.
"오케이, 알았어. 인수인계 완료!"
백우호는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벌써 다 깨달은 듯했다.
"그럼 너 믿고 난 간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할게. ……아니지 생각해 보 니까 못 하는구나."
그냥 서로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분대장 교육대로 파견 가는 당일날.
이강진은 김철과 함께 군장을 가지고 레토나 뒤에 실었다.
새롭게 레토나 운전병으로 등극하게 된 장선수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공간 부족하시면 의자 접으셔도 됩니다."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데?"
"19사단 신병 교육대로 가야 하니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럼 됐어. 그냥 탈게."
분대장 교육을 받기 위해 이들은 19사단 신병 교육대로 향할 예정이다.
그곳은 이강진이 훈련병 기간을 보냈던 장소다.
1년이 지난 이후에 다시 19사단 신병 교육대를 찾게 된 이강진.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계급장도 없었는데.'
이제는 당당하게 작대기 세 개 달고 다시 찾게 되었다.
김철과 함께 레토나 뒷좌석에 탑승한 채로 대기했다. 그사이 1부소대장이 선탑자 자리에 탑승했다.
"입소식 시작하기 전에 후딱 가자."
"예, 알겠습니다."
레토나에 시동이 걸렸다.
슬슬 출발할 때다.
완벽한 분대장이 되기 위해서.
* * *
근 1년 만에 보는 위병소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위병소를 통과하자, 김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와…… 강진아, 저쪽 작은 연병장, 기억 나냐? 우리 처음 여기 왔을 때 저곳에서 정렬했잖아."
"기억나지."
안날리가 없었다.
예전엔 그들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훈련병들이 연병장 에 나란히 모여 있었다.
이제 막 신병 교육대에 입소한 훈련병들이었다.
이강진과 김철이 레토나에서 내리자, 그들의 동공이 크게 흔 들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상병 아니야?"
"뭐지? 저런 사람들도 여기에 입소하나?"
"훈련병 아니겠지?"
그들 사이에서 온갖 추즉이 난무했다.
하기야 의아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과 같은 훈련병도 아니고. 멀쩡하게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는 두 사람이 군장을 들고 신병 교육대에 내렸으니 말이다.
이강진은 술렁이는 훈련병들을 스윽 바라봤다.
순간 훈련병들은 바짝 긴장한 모양인지 마른 침을 삼키며 이강진의 시선을 회피했다.
사실 타 부대 사람들끼리는 그냥 아저씨다. 그러나 이제 입대한 지 3일 차에 지나지 않는 저들이 그런 개념을 어찌 알겠나. 자신보다 계급이 높으면 무조건 선임 취급을 해 줘야 하는 것으 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강진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는 씨익 웃었다.
부대에 있을 때에는 언제 전역날이 오나 한숨만 푹푹 쉬었으 나, 저들을 보니 '그래도 난 좀 낫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은 거겠지.'
훈련병과 상병의 차이는 체감상 하늘과 땅, 그 이상이다.
신병 교육대에는 큰 강당이 있다.
이강진과 김철 그리고 이곳에 없는 백우호가 처음 19사단 신 병 교육대에 들어와서 입소식을 가졌던 바로 그 장소다.
원래는 분대장 교육대 입소식도 그곳에서 진행되어야 했지만, 방금 막 신병 교육대에 입소한 기수들 때문에 장소를 양보해야 만 했다.
분대장 교육대에 입소한 인원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50여 명 정도. 소규모다 보니 작은 장소라 할지라도 입 소식을 진행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입소식 절차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입소 신고를 하고, 애국 가를 제창하고,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게 다였다.
입소식 순번이 모두 끝난 뒤, 교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단상에 올라섰다.
"조교들의 통제에 따라 각 생활관으로 이동한다. 실시!"
"실시!"
다들 최소 상병 이상의 계급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다 보니 표정에 한결 여유가 느껴졌다.
이강진과 김철은 2생활관으로 배정되었다.
생활관에 들어서자마자 김철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게 대체 뭐야……?"
기다랗게 늘어선 생활관 마룻바닥과 녹이 슬어 있는 구식 관 물대.
심지어 벽지 곳곳엔 곰팡이도 보였다.
이들이 사용할 곳은 구식 막사였다. 훈련병 시절 때 사용했던 신식 막사를 기대하고 온 김철은 구식 막사의 모습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 사람 사는 곳 맞지?"
"맞아. 신막사 이전에는 다들 이런 곳에서 생활했었으니까."
이강진도 구막사에서 생활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분대장 교 육대라든지 혹은 아직도 구막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타 부대로 파견 나가는 일이 아닌 이상, 웬만하면 다 신막사에서 지냈다.
어차피 4박 5일만 버티면 된다. 평생 이곳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느 자리가 가장 좋을지. 이강진은 빠르게 눈으로 구막사의 내부를 스캔했다.
'어디 보자……. 저 자리가 좋겠군.'
뒷문을 기준으로 다섯 번째 자리. 저곳이 탐이 났다.
이강진의 옆자리는 자연스럽게 김철의 차지가 되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붙어 있는 게 훨씬 편하지 않은가.
이강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신교대 때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조교들은 거의 다 전역했을 터.
하나 간부는 다를 것이다.
'탄약반장, 아직 남아 있으려나?'
이강진에게 주식 정보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이문청 중사가 떠올랐다.
그가 훈련소에서 주기적으로 이강진에게 신문을 제공해 준 덕분에 이강진은 주식에 대한 소식을 꾸준히 접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힘들다 싶으면 웬만한 건 탄약반장이 다 커버를 쳐 줬다.
그때의 일이 아직도 새록새록 했다.
'지금도 여기에 있으려나 모르겠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설령 여기에서 계속근무하고 있다 해 도 현무중대에 있을 텐데, 마주칠 접점이 없다.
그냥 추억 속의 인물로 묻어 두기로 했다.
* * *
짐을 정리할 때, 조교가 와서 교육생들에게 작은 수첩 하나를 분배했다.
"조교가 방금 나눠 준 수첩은 상벌점 수첩입니다. 상점이 가장 높은 교육생을 선정해서 최우수, 우수 분대장 상장을 수여할 예정이니,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가해서 최우수 분대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교육생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최우수 분대장이 되면 혜택 같은 게 있습니까?"
"예, 최우수 분대장에게는 3박 4일의 포상 휴가가, 우수 분대 장에게는 2박 3일의 포상 휴가가 수여됩 니다."
최우수 분대장은 딱 한 명만 선정한다.
우수 분대장은 총 3명으로, 최우수 분대장에 비해서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분대장 교육대에 참가하게 된 교육생들의 숫자는 총 53명.
이 중 4등 안에만 들면 된다.
분대장감으로 인정받은 병사들과의 경쟁은 생각만큼 호락호 락하지 않다. 부대에서 나름 인정받은 사람들 아닌가. 이들을 제 치고 4등 안에 들어야 하는데, 과연 쉬운 일일까?
천만에.
이강진은 단언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야.'
그래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괜히 이강진이 포상 휴가 사냥꾼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기왕 포상 휴가를 노릴 거, 목표를 크게 잡기로 했다.
'1 등을 노려 보자!'
* * *
입소 첫날에는 큰 훈련 같은 건 없었다.
분대장으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지. 이런 것에 관 련된 정신교육만 받다가 하루가 끝났다.
저녁 식사 집합은 분대장 교육대에 입소한 교육생들 전원이 모여서 한꺼번에 이동했다.
식당은 훈련병들이 사용하는 식당과 같은 곳을 사용했다.
상, 병장 들이 단체로 식당에 들어서자, 훈련병들이 바짝 긴 장한 표정으로 이들을 쳐다봤다.
김철은 미리 와서 식사를 하고 있던 훈련병들을 보면서 나름 의 추즉을 펼쳤다.
"쟤들은 한 3주 차 정도 된 거 같은데?"
"3주 차면…… 사격하고 수류탄 훈련은 다 끝냈겠네."
만약 김철의 말이 맞는다면, 저들은 야간 행군과 각개전투를 앞두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드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김철은 몰래 혀를 찼다.
"불쌍한 녀석들, 쯧쯧쯧."
이래서 군대는 먼저 온 사람이 승리자다.
군 복무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먼저 왔다가 먼저 전역한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배식을 받은 후에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 이강진과 김철.
맛은 여전히 없었다.
'대대 짬밥이 그리워질 줄이야.'
살다 보니 참 별일이 다 있다.
더 먹어 보려고 했으나, 더 이상 입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김철도 마찬가지였다.
"강진아, PX나 갈래?"
"그러자."
차라리 PX에 가서 배를 채우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분대장 교육대에 참가한 교육생과 훈련병들의 차이는 계급만 이 아니었다.
PX를 자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여기에서도 차이 가 갈렸다.
전화 이용도 마찬가지였다. 교육생들은 신병 교육대 전화박스 사용이 가능하지 만, 훈련병들은 그렇지 못했다.
구막사로 돌아오자마자 이강진과 김철은 지갑을 챙겼다.
신병 교육대 PX로 향하는 두 사람. 김철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는 한 번이라도 이곳에 들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막상 오 니까 덧없다, 덧없어."
"PX가 다 똑같지, 뭐."
1075대대 PX보다 약간 규모가 큰 정도였다. 그것 말고는 딱 히 큰 차이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누군가가 이강진에게 아는 척을 해 왔다.
"설마 너, 강진이냐?"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이강진은 반사적으 로 거수경례 자세를 취했다.
"충성!"
"강진이 맞네! 이야! 오랜만이다, 야!"
이강진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탄약반장님."
< 제60화. 분대장 교육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