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4화. 응원하러 가는 길 (2) >
제64화. 응원하러 가는 길 (2)
군종병으로서 예배 준비를 돕는 와중에도 이강진의 머릿속은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종한이 형이 설마 결승에 진출할 줄이야.'
솔직히 예상 못 한 일이었다.
16강에 든 것만 하더라도 정말 잘한 거였다. 군대에서 2년 동 안 거의 게임을 못 하다시피 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전역을 하더니 오히려 현역 때보다도 더 엄청 난 포스를 보이면서 파죽지세로 결승전까지 진출해 버렸다.
이건 이강진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던 와중에 목사가 이강진을 불렀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냥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그것 좀 생각하느 라 잠깐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세간에는 그런 걸 '고민'이라고 하네."
목사의 말이 옳다.
고민이 있다.
굉장히 심각한 고민이.
"나라도 괜찮다면 한번 털어놓아 보게. 고민이라는 게 혼자만 꿍해 있어 봤자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 은가? 내가 자네한테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줄 수도 있을지도."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것 또한 목사가 하는 일이다.
결국 이강진은 목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은
오종한이 결승전에 진출한 것을 포함해서 어떻게 해야 분대 원들 전원을 데리고 응원을 하러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사항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어느새 목사도 이강진과 같이 굳은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자네 머리가 복잡할 만하군."
"이것 때문에 엊그제하고 어제 제대로 잠이 안 왔습니다."
중대장에게 말해 봤자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신 나갔냐고, 분대장을 달고 있는 녀석이 생각 머리가 없냐 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행보관이다.
하지만 행보관도 이번만큼은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분대 단위가 단체로 휴가를 나갔던 적은 전례가 없으니까.
"오종한이라고 했나? 그 사람한테 전화해서 '다는 못 나갈 거 같고, 분대원들 몇 명만 해서 나갈 거 같은데 괜찮것!냐, 미안하 다.' 이런 식으로 말해 보면 어떨까?"
솔직함이 최고다.
목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해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종한이 그런 걸 전혀 이해 못 해 줄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이강진은 목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휴가 여유가 좀 되는 사람들만 몇 명 모아서 대표로 응원을 가면 되겠지.
이강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 * *
오종한이 전역하기 전에 줬던 스마트폰 번호를 찾았다.
번호를 외운 뒤에 이강진은 전화박스로 향했다.
매번 전화박스 하나를 마치 전세 낸 것처럼 차지하고 있었던 황지웅이 이제는 안 보이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황지웅이 없는 덕분에 전화박스 이용에 여유가 좀 생 겼다.
번호를 누른 뒤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피곤함에 찌든 오종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한이 형? 나, 강진이인데."
-어, 강진이니? 왜 이제야 전화했어. 안 그래도 네 연락 기다리고 있었는데.
"형 피곤할까 봐 일부러 전화 안 했지."
-에이, 피곤하고 자시고가 어디 있어? 이제 결승 무대 하나만 남았는데.
오종한은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면서 어찌저찌 결승전까지 올라서게 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인터넷에서는 이틀가량 오종한의 이름이 검색어 순위에 계속 랭크되어 있었다.
오종한에게 쏟아지는 이런 과도한 관심. 그는 이런 팬들의 관 심을 현역 때에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군대가 독이 라고 하지 만, 오종한에게는 오 히려 약이었다.
전역하고 나니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었다.
"결승전은 강남에서 한다고 했지?"
-어, 부대에서 얼마나 걸리더라?
"글쎄, 나야 모르지. 애초에 서울 사는 사람도 아니고, 여기서 강남까지 가 본 적도 없으니까."
이강진은 휴가를 나오면 바로 청주로 향했다. 굳이 강남으로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소요 시간이 얼마나 나오는지 잘 모른 다.
결승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강진은 슬슬 그 이야기를 꺼내 려고 했다.
"형, 미안한데……."
-맞다, 참…."
이강진의 말을 못 들은 모양인지 오종한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 번에 너희들 온다고 VIP 좌석으로 쫙 빼놓으라고 했어. 지 금 부대원이 몇 명이지?
"일곱 명인데……."
-그래? 그럼 일곱 좌석 빼 달라고 해야겠네.
"자, 잠깐만. 형! 그게 아니고……."
-너희들하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형이 진짜 미친 듯 이 노력했다. 꼴사나운 모습 보이기 싫어서 밤낮으로 연습했지. 그때만 생각하면…… 어휴! 그래도 결국 결승전까지 올랐다. 나, 약속 지켰다, 강진아.
오종한은 특별히 이강진에게 압박을 넣으려고 이런 말을 하 는 게 아니었다. 그냥 혼잣말 비슷한 거였다. 하나 왜 자꾸 이 말이 비수가 되어 이강진의 가슴을 찌르는 걸까.
이강진은 지금 당장 통화를 끊어 버리고 잠수를 타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오종한에게 실례되는 행동이다. 그리고 결승 무 대를 앞두고 있는 사람한테 괜한 행동을 보여서 멘탈에 금이 가 게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이건 오종한의 프로 게이머 인생이 걸린 문제다.
한창 신나 이야기를 하던 오종한이 문득 생각이 난 모양인지 이 런 질문을 해 왔다.
-강진아, 그런데 1개 분대 단위가한꺼번에 휴가 못 나오지 않 냐?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게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강진은 황급하게 말을 꾸며 냈다.
"아, 아니야! 중대장님이 최대한 배려해 주신다고 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진짜? 그럼 애들 다 오는 거야?
"그, 그러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형은 열심히 결승 경기 준비에만 집중해. 응원 가는 건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까."
-짜식! 역시 너다! 그래, 오래간만에 애들 얼굴이나 한번 보자!
"그, 그래…… 하하하……."
기뻐하는 오종한에게 자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이강진은 갑자기 자신의 뺨을 본인 손 으로 '짜악!' 하고 때렸다.
"이런 미친놈아, 솔직한 게 답이라고 목사님이 그토록 강조했 는데 거짓말을 하냐. 어휴!"
맞아도 싼 짓을 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우리, 종한이 형 결승 무대에 갈 거다."
분과별 간담회 시간에 갑자기 폭탄 발언을 하는 이강진.
분대원들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강진 상병님,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희가 다 간다고 하셨습니까?"
"야, 강진아. 헛소리 좀 그만 해. 우리가 어떻게 단체로 나가 냐? 휴가 규정이라는 게 있잖아. 나보다 군 생활 잘하는 네가 그 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안다. 너무나 잘 알아서 탈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나가게 해야 해. 그래야 종한이 형, 얼굴 볼 낯이 생기지."
나갈 수만 있다면야 좋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1분대원들 모두가 다 이강진처럼 휴가가 넘쳐 나는 것도 아니었다. 휴가도 부족하고, 분대원들이 한꺼번에 다 휴가를 나가 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고.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이강진에겐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리고 내가 하는 말, 절대 로 다른 사람들한테 흘리지 말고."
분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 중에 이강진은 행정반을 찾았다.
"충성 상병 이강진,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행정반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행보관 한 명밖에 없었다.
사실 행보관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온 것이다.
"무슨 일이냐?"
"1 분대 외박 날짜 결정했습니다."
"그래? 언제 나갈 거냐?"
"다음 주 토요일에 나가겠습니다."
"다음 주라……"
행보관은 수첩을 꺼내 일정표를 확인했다.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분과 외박을 사용하긴 해야 했다. 때 마침 다음 주엔 일정이 잡혀 있는 것도 없었다.
즉, 분과 외박 나가기 딱 좋은 날이다.
"그래, 알았다. 군종병은 어떻게 할 거냐?"
"3분대 최일형 일병에게 하루만 대타로 뛰어 달라고 해 뒀습니다."
"일형이 가 군종병에 대해서 좀 아나?"
"예, 사회에 있을 때 교회에 자주 나갔다고 합니다. 딱 보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행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대신해서 대타를 뛰어 줄 사람까지 미리 구해 놓으니, 행보관 입장에선 편했다.
"그래, 그럼 다음 주에 애들 데리고 외박 나가라. 오대기는 다른 분대한테 맡기고."
"예,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계획의 첫 단추를 무사히 잘 채웠다.
이제 다음 단추를 채우러 갈 차례다.
* * *
분과 외박의 날이 밝았다.
1분대원들은 A급 전투복을 입고 나란히 행정반으로 입성했 다.
이강진이 대표로 금일 당직사관인 통신반장에게 외박 신고를 했다.
통신반장은 이강진을 보면서 당부했다.
"외박 나가서 사고 치지 말고. 술 마시는 건 좋지만, 마시고 난 다음에 그냥 조용히 모텔로 들어가서 자라.
그리고 부대로 전화 꼭 주고. 이것만 잘 지키면 된다. 아, 근처에 헌병들이 순찰 다닐 지도 모르니까 복장도 똑바로 하고 다녀. 얼마 전에 어떤 병사 가 베레모도 안 쓰고 주머니에 손 넣고 다녔다가 헌병대한테 주 의받았다고 하더라. 그런 거 하나하나가 부대 분위기 엉망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거, 잊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통신반장답지 않게 오늘따라 말이 굉장히 길었다.
자기가 당직사관을 맡고 있을 때 행여나 사고라도 나는 건 아 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이었다.
"강진이, 네가 분대원들 책임지고 잘 통제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외박 나가 보겠습니다. 충성!"
"그래, 충성."
분대원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위 병소를 향해 나아갔다.
위병소를 벗어나자마자 병사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최영고와 곽분섭은 설렘마저 느꼈다.
"공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 맑은 공기…… 사회의 냄새! 크으, 최고입니다!"
"기뻐하긴 아직 일러. 일단 버스부터 타자. 어서 뛰어!"
버스 한 대 놓치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 일단 뛰어야 한다.
아슬아슬하게 버스에 탑승한 병사들.
이들의 목적지는 부대 근처에 있는 시내다.
외박을 나가면 대부분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1분대도 그럴 예정이었다.
하나 오늘은 달랐다.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작전 들어갈 테니까 준비 단단히 들 해라."
"예, 알겠습니다!"
모든 분대원들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버스에서 내림과 동시에 이강진은 분대원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옷부터 산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움직여!"
이강진이 예전에 한지윤과 만나기 전에 사복을 구입했던 그 옷가게로 향했다.
옷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
사이즈에 맞게 대충 옷을 고른 뒤, 이들은 가게 밖을 나섰다.
"시계탑으로 간다!"
"예!"
흡사 특수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시계탑에서 대기 중이던 차량 한 대가 '빵빵!' 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운전석 쪽 창문이 아래로 내려감과 동시에 익숙한 얼굴이 이들을 반겼다.
"오래간만이다, 애들아!"
라인혁이 이들을 반겼다.
< 제64화. 응원하러 가는 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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