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5화. FM 의 정석 (2) >
제65화. FM의 정석 (2)
소대장의 기습 순찰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새벽 4시 30분 그리고 새벽 5시 30분.
도합 3차례의 기습 순찰이 펼쳐졌다.
그때마다 이강진은 탄약고 초소 근무자들에게 미리 키를 넣었다. 이강진이 다가올 미래를 스포일러해 준 덕분에 탄약고 초 소 근무자들은 소대장에게 털리는 일 없이 무사히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새벽 6시.
근무 교대를 마친 백우호는 인솔자로 올라온 이강진과 함께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막사 쪽에서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백우호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아침 점호 시작했나 보네."
"소대장님이 주도하는 아침 점호니까 일찍 끝나진 않겠지."
이강진의 예상대로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FM으로 진행할 것이다.
아침 구보는?
무조건 할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반에 도착했을 무렵.
이들의 예상대로 밖에서 소대장의 우렁찬 명령이 떨어졌다.
"전체 상의 탈의한다! 실시!"
"실시!"
예상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소대장이 직접 인솔까지 할 모양인지 병사들과 같이 상의를 탈의했다.
소대장의 탄탄한 몸이 그대로 외부에 노줄되었다.
"전체 뛰어 가!
열정이 넘치는 소대장과 함께 오늘도 아침부터 대대 한 바퀴 를 실시하게 된 1중대 병사들.
이강진은 그 모습을 창밖 너머로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당직이어서 좋은 점이 있긴 하네.' 만약 당직이 아니었더라면, 이강진은 지금쯤 울상을 짓고 있 는 저 병사들과 함께 고래고래 군가를 외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강진과 진오역이 근무 휴식에 들어간 사이.
김철은 행정반에 남아 간부들이 시키는 행정 업무를 소화해 야만 했다.
통신반장이나 부소대장들이 이것 좀 부탁한다고 할 때, 유일 하게 자신의 일을 직접 해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대장이 었다.
하루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불구하고 행정 업무 까지 직접 본인의 손으로 소화하는 소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김철은 속으로 감탄했다.
'소대장님, 대단하시네.'
다른 병사들은 소대장의 FM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 면서 소대장을 기피하곤 했지만, 김철은 솔직히 소대장이 간부 들 중에서 제일 좋았다.
자신의 업무는 자신이 처리하는 게 FM이라면서 알아서 하는 데, 행정병 입장에선 이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마웠다.
결국 소대장은 잠 한 번 자지 않고 오후 6시까지 정상적으로 일과 시간을 마쳤다.
기지개를 쭉 켜는 소대장.
그제야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인지 스트레칭을 하면서 잠을 쫓 아내려고 노력했다.
김철은 그런 소대장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관사로 내려가셔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 것까지만 하고."
"양 얼마 안 되니까 제가 해 두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내 업무인데 내가 해야지. 이거 하라고 월급받고 있는데, 짬 처리하면 월급받을 자격이 없지. 하하."
대단한 사람이다.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소대장. 요즘 찾아보기 정말 힘든 타입 인 건 확실했다.
그래도 몰려오는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소대장.
그때 중대장이 행정반으로 들어오더 니 소대장에게 다가가 어 깨를 강하게 '툭!' 하고 터치했다.
"주, 중위 성태원!"
"그건 천천히 해도 되는 거 아니냐. 시간 충분히 줄 테니까 일 단 들어가서 잠부터 자고, 쉬었다가 내일부터 해라."
"아닙 니다! 오늘 내로 끝낼 수 있습니다!"
"어허."
소대장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그에게 아주 잘 먹혀드는 마법의 단어가 존재한다.
"자러 가라. 이건 명령이다."
"설마 명령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융통성이 없는 만큼 명령에도 착실하게 잘 복종한다.
소대장은 결국 중대장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관사로 내려갈 준비를 서두른 뒤에 행정반을 나섰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충성!"
"충성."
소대장을 떠나보내자마자 중대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 저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쓰겠나.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하려고 하니까 기특하긴 한데, 너무 성실하기만 하면 오히려 골치 아프지."
나중에 짬을 먹다 보면 성태원도 달라지겠지. 중대장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1075대대의 대대장, 오승진 중령은 오랜만에 같은 사단에서 근무하는 대대장들끼리의 모임에 참가하 게 되었다.
오직 대대장들만 모일 수 있는 술자리였다. 그래서일까 오승 진은 마음이 편했다.
"19사단을 위하여!"
"우리들의 승진을 위하여!"
"건배!"
짠!
기분 좋은 술잔의 마찰음이 이들의 알코올 욕구를 무럭무럭 샘솟게 만들었다.
꿀꺽, 꿀꺽, 꿀꺽!
소맥의 시원한 감촉이 오승진의 몸을 차갑게 식혔다.
안 그래도 요즘 술이 너무 땅겼는데 잘됐다.
"오늘은 미친 듯이 마시자고!"
"예, 알겠습니다!"
"오승진 중령님! 제가 한 잔 바치겠습니다!"
"오, 좋지!"
대대장의 기분이 한껏 업되었다.
군인들이 모였을 때 항상 등장하는 안주가 있다.
그 어떠한 안주보다도 맛있는 것.
바로 상사의 뒷담화다.
"그나저나 연대장님이 요즘 너무 빡세게 우리들 굴리려고 하 는 모습이 보여서 좀 불안합니다."
"아서라. 원래 연대장님은 부임했을 때부터 그랬잖아. 이제 와 서 새삼스럽게, 뭘."
연대장 때문에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대장은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연대장이 1075대대를 급습한 탓에 대대장은 술자리에 있다가 부랴부랴 부대로 들어가야만 했었다.
그 이후로도 그런 적이 꽤 많았다.
대대장의 맞은편에 앉은 후임 중령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중령님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뭐, 연대장님이 또 기습 순찰 돌까 봐?"
"예, 사단에서 최근에 지침 하나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북한 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경계 근무 제대로 서라고 했던 거 말입니다. 그 지침 사항 내려온 다음 날이었을 겁니다. 타 부대 연대장님이 직할 부대 몰래 순찰 돌아서 탈탈 털어 버렸다고 합 니다."
"그거, 우리 연대장님도 알고 있나?"
후임 중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연대장님하고 동기시니까 100퍼센트 알고 계실 겁니다."
"흐음……."
대대장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불안한 느낌이 대대장을 엄습하고 있었다.
'내일 부대로 들어가서 중대장들한테 단단히 일러 둬야겠군.' 언제, 어디서 연대장이 기습 순찰을 돌지 모르니 주의하라고.
북한군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바로 상급자다.
걱정과 우려 속에서 대대장은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워 나가 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소집한 후에 연대장이 기습 순 찰을 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중대장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으나…….
'믿을 수가 있어야지.'
괜히 믿고 방심했다가 뒤통수를 맞을 바에야, 차라리 대대장 이 직접 확인을 하는 게 더 좋아 보였다.
이것이 대대장의 스타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대대장은 결국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 개를 크게 끄덕였다.
* * *
오늘도 소대장이 당직사관을 서는 날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소대장과 두 번 연속으로 당직을 서게 된 이강진은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요즘 철이한테 뭐 나쁜 짓이라도 했나?'
당직 근무 로테이션을 짜는 것도 행정분과가 하는 일이다. 그 러다 보니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김철에게 밉상 보일 만한 행동을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연이겠지, 뭐.'
요즘 부쩍 소대장이 당직사관을 맡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이런 우연이 겹친 것일지도 몰랐다.
소대장과 함께 2연속으로 근무를 서게 된 사람은 이강진만이 아니었다.
진오역도 마찬가지였다.
"강진아, 혹시 말이야. 내가 행정분과에 뭐 찍힐 만한 짓 했 냐?"
"그냥 우연이지 말입니다."
김철은 뒷끝이 심한 남자가 아니었다.
별 뜻은 없으리라.
일과 시간이 끝나자마자 소대장은 당직들을 불렀다.
"오늘도 위생 검사 실시할 거니까 병사들한테 저녁 점호 전까 지 두발, 손톱, 관물대 정리 다 해 두라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절대로 이분을 건드려선 안 된다.
오늘과 내일을 조용히 넘기고 싶으면 소대장이 시키는 걸 얌 전히 따르는 게 최선이다.
진오역은 이강진을 불렀다.
"혹시 모르니까 근무 교대할 때에도 FM대로 하자."
"알겠습니다."
진오역이 말 안 해도 이강진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과연 오늘은 소대장이 몇 번의 순찰을 돌지 내심 궁금해졌다.
* * *
업무가 쌓여 있다는 이유를 들고서 오늘 하루 관사에 머물기 로 한 대대장.
그는 조용히 작전과장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대장님?"
사복 차림을 한 대대장은 작전과장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지금부터 각 중대들이 경계 근무를 제대로 서고 있는지 몰래 순찰을 돌 거다. 옷 갈아입고 나 따라와라."
작전과장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틈을 봐서 각 중대에게 몰래 연락을 돌리려고 했으나.
"자네가 나 몰래 중대장들한테 연락 돌렸다는 게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자네가 대표로 각오를 해야 할 게야."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다.
부하들의 안위를 위해 본인 스스로가 위험을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작전과장은 그런 의인은 아니었다.
상급자와 하급자, 두 부류를 놓고 비교한다면 단연 상급자 쪽 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군대는 더더욱 그렇다.
"……예, 알겠습니다."
결국 작전과장은 대대장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더불어 대대장에게 탈탈 털릴 예정인 중대장들의 명복을 빌 어 주기로 했다.
대대장이 고른 첫 번째 타깃은 바로 3중대였다.
대대장과 작전과장은 병사들이 방심하기 딱 좋은 시간인 자정 시간대를 골라 기습 순찰을 감행하기로 했다.
3중대가 담당하고 있는 외곽 초소로 향하는 대대장과 작전과 장.
이들은 초소 근처에서 몰래 잠복했다. 3중대의 근무 교대 과 정이 어떤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선임 근무자로 보이는 병장이 K-2 소좋을 오른쪽 어깨에 짊 어진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외곽 초소로 향했다.
"근무 교대 왔다. 나와라."
외곽 초소 문이 열렸다. 그러더 니 전 번 근무자들이 뒤늦게 방 탄모와 좋을 챙겨 들고 나왔다.
"야, 황운정. 근무 교대 빨리 좀 해 주면 안 되냐?"
"뭔 개소리야. 일찍 해줬잖아."
"일찍은 개뿔! 5분이나 늦었잖아!"
"아, 썅. 지랄 그만 떨고 후딱 내려가기나 해라. 그리고 불 있 냐?"
"왜, 담배 피려고?"
"엉, 몰래 챙겨 왔지, 크큭."
저들의 대화를 몰래 염탐하던 대대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작전과장은 그야말로 좌불 안석이었다.
근무 교대가 끝난 뒤.
대대장은 작전과장에게 손짓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군. 2중대로 간다."
"예, 알겠습니다."
아직 대대장의 기습 순찰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 제65화. FM 의 정석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