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6화. 군인들이 헤어지는 방법 (2) >
제66호[. 군인들이 헤어지는 방법 (2)
저녁 점호를 마친 뒤에 곧장 취침 준비를 서두르는 병사들.
그 와중에 곽분섭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초롱초롱한 눈동자. 아직 잠에 빠져들려 면 한참 먼 것 같았다.
이강진은 곽분섭의 그런 설렘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분섭아, 너 오늘 근무 없냐?"
"일병 곽분섭! 예, 없습니다!"
휴가 복귀자는 당일날엔 근무가 없다.
이강진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복귀하고 첫 날인데, 미리 자둬. 이제 다시 내무 생활에 적응 해야지."
"예! 근데 내일 대답 들을 생각을 하니까 잠이 안 옵니다."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의 마음.
이강진은 그 심정을 아주 잘 안다.
왜냐하면 이강진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 었다.
'대부분은 잘 안 됐었지.'
연애도 실패했고, 주식도 실패했고.
실패뿐인 인생이었다.
하나 이 번 생은 달랐다.
'나도 나중에 타이밍 봐서 지윤 씨한테 고백하든가 해야 할 텐 데.'
전역하는 기념비적인 날에 고백을 할까?
'아니, 그건 좀 그렇고.'
나중의 일이니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곽분섭의 고백 결과가 중요했다.
이강진은 슬쩍 관물대를 쳐다봤다.
관물대 안에 꽂혀 있는 분대장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내일은 저걸 꺼낼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 * *
아침 해가 밝았다.
일어 나자마자 구보를 마친 병사들은 생활관으로 돌아와 씻을 준비를 서둘렀다.
여름이라 그런 걸까. 구보 한 번 뛴 것만으로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게으른 성격의 서일주조차도 안 씻고 못 배길 정도였다.
흠뻑 젖은 전투복 상의를 벗어젖힌 병사들은 빠른 속도로 화 장실로 향했다.
이미 많은 병사들이 자리를 잡은 채 씻고 있었다.
그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는 데에 성공한 이강진은 1분대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씻는 걸 마치고 복귀했다.
군대에서는 빠른 자가 왕이다.
먼저 온 특권으로 아침 식사 집합 전까지 매트리스에 누워 편 하게 휴식을 만끽하는 이강진.
행정반에서 아침 식사 집합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슬슬 집합하자."
"이강진 상병님."
기운상이 난색을 표했다.
"아직 분섭이가 안 왔습니다."
"어디 갔는데?"
"화장실에 있습니다."
"배라도 아프대?"
"아닙니다. 아직 씻고 있습니다."
가장 늦게 세면하러 간 사람도 이미 한참 전에 끝내고 돌아온 상태였다.
그런데 곽분섭은 아직도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뒤늦게 생활관으로 복귀한 곽분섭.
그를 보자마자 분대원들은 입을 떡 벌렸다.
"너…… 그게 뭐냐?"
"아, 이거 말입니까?"
곽분섭은 빛나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오늘 중요한 날이지 않습니까?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싶어서 신경 좀 썼습니다."
깔끔해도 지나치게 깔끔했다.
그냥 세안제 하나면 끝날 것을.
곽분섭은 거기에 더해서 뭔가를 덕지덕지 바르고 온 듯했다.
이런 미용은 대부분 성태강이 알려 준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연예인식 메이크업에 관심을 보였던 병사들이었으 나, 이내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다들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곽분섭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오늘의 곽분섭은 기합과 의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오늘, 제 첫 여자 친구가 생기는 날이니 저녁 때 제가 PX 거하게 쏘겠습니다!"
"오, 좋지!"
"곽분섭 곽분섭! 곽분섭!"
분대원들은 곽분섭의 이름을 연호했다.
하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점점 커지는 불안감에 이강진은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 * *
드디어 일과 시간이 끝났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바로 막사로 올라온 곽분섭은 이강진을 찾았다.
"이강진 상병님, 저 혜연이한테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대학 후배 이름이 혜연이야?"
"예, 그렇습니 다!"
곽분섭의 눈에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혜연이라는 사람이 먼저 같이 야구장 데이트를 제안할 정도니 곽분섭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리라. 곽분섭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가서 전화 하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전화 하러 떠 난 곽분섭.
이강진은 그의 뒤를 몰래 밟기로 했다.
통화 결과를 몰래 엿듣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아무리 후임이라 할지라도 개인 사생활에 많은 간섭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강진은 분대장 으로서 곽분섭의 어찌 될지 모르는 연애사에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야, 강진아. 나도 가자."
백우호가 이강진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 으나, 백우호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둘이서 몰래 전화박스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화박스는 휴게실 벽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귀를 벽에 붙 이고 있으면, 통화 내용이 아주 작게나마 들리곤 한다.
회귀하기 전에 이강진이 군복무를 하던 중에 알아냈던 꿀 팁이었다.
곽분섭이 들어간 전화박스는 셋 중 가운데였다.
이강진은 전화박스가 위치한 곳의 벽면에 귀를 붙였다.
백우호도 이강진을 따라 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 다 묘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휴게실로 FIFA를 하러 온 후임병들은 둘을 의아하게 바라봤
"이강진 상병님, 백우호 상병님,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쉿! 조용히 해라. 안 들리잖아."
"그냥 너희들 하던 거나 해라."
괜히 물어봤다가 쓴소리만 들었다.
병사들은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얌전히 비디오 게임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다시 벽 너머로 모든 신경을 기울이는 두 동기.
"여보세요, 혜연이니? 오빠야."
목소리를 쫙 깔고 말하는 곽분섭.
백우호는 순간 저 목소리를 듣고 헛구역질이 올라올 뻔했다.
"짜식, 멋있는 척하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늘 멋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법 아닌가.
이강진은 백우호를 조용히 시키면서 다시 귀를 기울였다.
"어제 내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대답을 듣고 싶어서 전화 했는데……."
긴장되는 순간.
대답은 간단하다.
좋아요 or 친한 오빠, 동생으로 지내요.
그녀의 대답은 과연?
"......어?"
곽분섭이 보여 준 첫 반응은 당혹감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이강진은 직감했다.
'안 됐네.'
대화의 흐름은 이강진의 예상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치, 친한 오빠, 동생 관계로 있고 싶다고? 그, 그렇구나, 하, 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계속 이어졌다.
통화가 끝난 뒤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적막이 찾아왔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
백우호와 이강진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린 라이트인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레드 라이트였다.
어제, 아니 오늘 해가 떨어지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분이 상당히 좋았던 곽분섭이었으나.
전화 한 통으로 인해 그 기분은 순식간에 다운되고 말았다.
축 처진 어깨.
갈 곳을 잃은 눈동자의 초점이 괜히 이강진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뒤늦게 생활관으로 복귀한 최영고와 성태강은 곽 분섭을 보자마자 그에게 다가갔다.
"곽분섭 일병님!"
"어떻게 됐어? 네가 예상했던 대로 그린 라이트였어?"
곽분섭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성 태강은 바로 감을 잡았다.
'아, 망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최영고는 생각보다 눈치가 없었다.
"곽분섭 일병님, 오늘부터 1일 차 되신 겁니까? 그런 겁니까? 우리 곽분섭 일병님, 사랑꾼이시지 말입니다!"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이강진은 성태강에게 눈빛을 보냈다.
저 눈치 더럽게 없는 녀석,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성태강은 이강진과 한 번 시선을 교환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철썩같이 알아들었다.
역시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온 톱 아이돌다웠다.
"영고야, 전투화나 손질하러 가자."
"아직 곽분섭 일병님하고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성태강이 최영고보다 체격이 훨씬 좋다. 거의 강제로 끌려가 다시피 하는 최영고. 그는 성태강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곽분 섭의 연애사에 관심을 가졌다.
생활관에는 이제 이강진과 곽분섭, 둘만 남게 되었다.
"분섭아."
이강진이 곽분섭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일병 곽분섭."
세상에 이 렇게까지 처량하게 들리는 관등성명도 없을 것이다.
이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다 보면 여자한테 차이는 경우도 있고 그런 거야, 짜식아. 그런 걸로 기죽고 그러지 마. 그리고 세상에 반은 여자라고 하잖아? 찾다 보면 언젠간 -이 여자가 내 여자다!'라고 느낌이 오 는 사람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실망하지 마라."
"이, 이강진 상병님……!"
갑자기 곽분섭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국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곽분섭은 강제로 이강진에게 안았다.
이강진은 뒤로 슬금슬금 피했으나, 마지못해 곽분섭을 안아 줬다.
"이강진 상병님, 감사합니다……! 으아아아앙!"
"그, 그래. 사나이답게 울어. 오늘만큼은 우는 걸 허락하마."
전투복 상의 한 곳이 벌써부터 죽죽하게 젖어 들어갔다.
곽분섭의 등을 토닥여 주면서 이강진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 었다.
'이 녀석, 당분간 관심 병사로 올려 두는 게 좋겠지?'
보아 하니 그 대학교 여자 후배한테 꽤 마음을 많이 준 듯했이강진 또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울고 싶다, 인마.'
당분간 곽분섭은 특별 관리 대상이다.
* * *
곽분섭이 여자에게 차였다!
이 소문이 1075대대 전체에 쭉 돌기 시작했다.
물론 간부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차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중대장은 바로 곽분섭을 호출했다.
"자, 분섭아. 이거 마셔라."
"이게…… 뭡니까?"
"행보관님의 친구 분이 외국 여행 갔다가 구해 주신 차다. 이 거 마시면 마음이 차분해지 더구나, 하하하."
고달픈 훈련보다도, 산처럼 쌓인 업무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바로 갑자기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병사다.
최근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유로 탈영을 시도했던 일병 이 한 명 있었다.
중대장은 불현듯 그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곽분섭이 좋아 하던 여자에게 차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를 중대장실로 불렀다.
"상심이 크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풀 죽을 필요 없다. 네가 좋아했던 그 대학 후배보다도 더 좋은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아무런 생각하지 말고 무사히, 몸 건강히 전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라. 부모님을 생각해 서라도 말이다."
제발 그렇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야 중대장도 큰 사건 없이 무사히 진급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잔소리부터 날렸을 중대장이 오늘따라 굉장히 온순했다. 곽분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대장님…… 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워, 뭐를?"
"자다가도 자꾸 혜연이가 꿈에서 나오고 그럽니다. 전 혜연이 밖에 없었는데…… 흐윽……!"
결국 눈물을 보이는 곽분섭.
중대장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 제66화. 군인들이 헤어지는 방법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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