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6화. 군인들이 헤어지는 방법 (3) >
제66화. 군인들이 헤어지는 방법 (3)
곽분섭이 중대장과 상의하는 동안, 이강진은 분대원들과 함 께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서일주가 행정반이 있는 방향을 슬쩍 바라봤다.
"분섭이 녀석, 멘탈이 걱정되네. 무조건 잘 될 거라고, 이건 100퍼센트 고백 성공이라고 호언장담하던데."
그건 이강진도 잘 안다.
곽분섭은 여태껏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었소위 말해서 모태솔로다.
그런 곽분섭에게 처음으로 첫사랑의 존재가 다가온 것이다. 그것도 군대에서 한창 고달픈 시기를 겪고 있을 때 말이다.
그녀는 이 지옥 같은 군 생활에서 곽분섭에게 희망의 빛이요, 유일한 구원자였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으니, 얼마나 상심이 클 까.
물론 문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곽분섭의 착각이 한몫 했다. 아니, 곽분섭의 오해에서 비롯되어 오해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래서 착각이 무서운 건데.'
이강진은 작게 혀를 찼다.
이러다가 곽분섭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 었다.
백우호도 그게 두려운 모양인지 지레 겁을 먹었다.
"분섭이, 괜찮겠지? 옆 부대처럼 막 탈영한다느니 뭐 한다느 니 난리 안 피우겠지?"
"모르겠어."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게 바로 군 생활 아닌가.
기운상이 자신의 의견을 들려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일단 분섭이를 관심 병사로 올려 두고 천 천히 지켜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좀 더 두고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하기로 했어."
이미 행보관과 말이 끝난 상태였다.
의외로 금세 회복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걸로 관 심 병사가 되면, 곽분섭이 오히려 싫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강진은 '보류'라는 선택지를 고르게 되었다.
"일단 분섭이가 멘탈 단단히 챙길 수 있도록 우리가 힘 좀 내 보자. 서일주 병장님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내 후임인데 나 몰라라 할 순 없으니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이럴 때야말로 1분대가 똘똘 뭉쳐야 한다.
중대장과 개인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곽분섭.
그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이강진은 백우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리모 컨을 낚아챈 백우호가 빠른 손놀림으로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 다.
곽분섭이 좋아하는 야구 채널로 돌렸다.
"분섭아, 너, 안와 이글스 팬이지? 지금 명경기들 모아 놓은 하 이라이트 방송 중인데, 와서 봐 보너. 이야! 어느 선수인지 몰라도 홈런 시원하게 때리네!"
1분대에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곽분섭 말고 아무도 없었 다. 그래서 생활관에 야구 관련 방송이 틀어진 적은 거의 없었 다.
하나 이 번에는 달랐다.
곽분섭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1분대원들은 일부러 야구 채널만 골라서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아……."
곽분섭의 한숨 소리는 여전했다.
'야구가 해답이 아닌가.' 작전이 통하지 않음을 확인한 이강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 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 * *
이강진은 3분대를 찾았다.
"오월정 병장님 계십니까."
"응? 강진이잖아?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배를 벅벅 긁어 대면서 매트리스에서 뒹굴거리던 오월정이 이 강진을 힐끗 바라봤다.
"오월정 병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도움이 왜 필요한데? 아, 설마 당직 근무 바꿔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다시 돌아가. 너 이번에도 소대장님하고 같이 당직 선다는 거, 다 아니까."
"그게 아닙니다."
물론 바꿔 준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그건 기대도 안 했다.
누가 미쳤다고 FM의 화신, 소대장과 근무를 서고 싶어 하겠 나.
이강진이 오월정을 찾아온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오월정 병장님이 조언해 주셨으면 하는 병사가 있어서 그렇 습니다."
"무슨 조언?"
"연애에 대해서입니다."
"……설마 분섭이 때문이냐?"
이강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푹 내쉰 오월정은 그제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여자 친구 생긴다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설레발 칠 때부터 알아봤어. 자고로 김칫국은 먼저 마시는 법이 아니라고 했거늘. 아주 입천장이 대일 때까지 마셔 댔나 보구 먼?"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짜로 부탁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귀한 몸이신데, 강의료는 당연히 지불해야 하지 않겠습니 까."
이강진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세 개를 쫙 피면서 이렇게 말했다.
"PX 이용권, 3회. 어떻습니까?"
"3회는 너무 적소. 5회로 합시다."
"그건 좀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럼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고, 4회."
"PX 이용권, 4회. 그게 내 제안이다."
모 드라마에서 나왔던 4딸라 협상법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 었다.
이강진은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일반 병사였다면 '오케이! 땡큐!'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오월정이다.
군대에 첫 입대했을 당시, 그의 몸무게는 95kg였다. 그러다가 훈련소에서 거의 Wkg 가까이를 감량하더니, 일병을 달았을 때 에는 75kg라는 준수한 몸무게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상꺽이 되더니, 그의 몸무게는 다시 원상 복귀되었다. 병장을 달고 나서는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몸이 불어났다. 지금 오월정의 현 몸무게가 어떻게 되는지, 이강진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뱃살로 봐선 최소 90kg 이상은 넘을 것으 로 예상된다.
먹는 양도 장난이 아니다.
'그러니까 살이 찌지.'
많은 비용이 깨질 터.
그래도 후임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돈이 아쉽겠나. 지금은 곽분섭의 멘탈 회복이 먼저 다.
"알겠습니다. 그럼 4회로 타협하시는 겁니다?"
"물론!"
오월정의 입꼬리가 위로 상승했다.
"불쌍한 중생을 위해서 오래간만에 내가 입 좀 털어 줘야겠군."
과연 이게 올바른 투자가 될지.
아니면 그냥 돈만 날리는 꼴이 될지.
그것은 지켜봐야 알 것 같다.
이강진은 곽분섭과 함께 PX로 향했다.
"기분이 꿀꿀할 땐 뱃속을 채우는 게 그나마 도움이 많이 된 다고 하더라. 내가 살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껏 골라 라."
괜찮다고 말하려던 곽분섭이었으나, 이강진의 등 떠밀기 때 문에 어쩔 수 없이 먹을 것들을 골라야만 했다.
휴게실로 온 이강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5분 뒤.
"어? 강진이하고 분섭이 아니냐?"
오월정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충성! 오월정 병장님, 혼자 오셨으면 저희랑 같이 드시지 말입니다?"
"좋지!"
오월정의 합류.
여기까지는 각본대로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다.
그전에 오월정은 물만두 세 개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거의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켰다.
역시 1중대 청소기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이강진이 빠르게 손짓을 했다.
그만 먹고 본론을 꺼 내라고.
아쉬운 눈빛을 한 오월정은 마지못해 음식에서 손을 뗐다.
"분섭아, 이야기 들었다. 고백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짜식. 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원래 남자는 여자한테 차이는 게 일상인 존재야.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것보다 남자가 먼 저 고백하는 게 훨씬 더 빈도가 높잖아.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내가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마."
오월정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강진이 왜 하필이면 오월정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났다.
"나, 여자들한테만 28번 차였던 남자다. 이 런 나도 멀쩡히 잘 살아 있잖아. 안 그래?"
"그렇게나 많이 고백하셨습니까?"
"어, 그렇지."
"세상에…… 많이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그다음부터는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 더라. 너도 많이 들었을 거야. 세상에 여자가 반이라고. 이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내 인연 한 명이 없을까? 그 인연을 찾을 때 까지 계속 두드려 보는 거지, 뭐."
이름하야 차임 전문가, 오월정.
그의 화려한 과거 전적을 들으니 어느 순간 곽분섭은 그의 이 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힘들 때에는 이러이 러한 방법으로 극복하면 된다는 노하우를 많이 알려 줬다.
우울하기만 하던 곽분섭의 표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게 보였다.
이강진은 내심 흐뭇했다.
'역시 오월정 병장에게 맡기길 잘했군.'
비록 PX4회 이용이라는 비싼 값을 지불하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였다.
그때.
곽분섭이 날카로운 질문을 꺼냈다.
"그럼 혹시 고백해서 성공하는 방법도 알고 계십니까?"
"서, 성공?"
"예!"
"성공은……."
오월정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순간 이강진은 이런 단어가 떠올랐다.
갑분싸.
갑자가 분위기가 싸해졌다.
* * *
일요일 오전.
종교 행사를 위해 미리 교회로 내려온 이강진 앞에 낯선 인물 들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20대의 젊은 여성 셋이 이강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 온 것이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누구세요?"
"목사님 도와주러 온 성가대 일원들이에요. 오늘 하루, 잘 부탁드려요, 호호!"
"아,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소에는 한지윤이 교회 일을 도왔지만, 워낙 연예계 쪽 일이 바쁘다 보니 목사가 따로 그녀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듯했다.
종교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바쁘게 준비를 서두르는 이강 진과 군종병들.
드디어 각 중대에서 내려온 병사들이 천천히 교회 안에 입성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유독 이강진의 눈에 띄는 병사가 있었다.
바로 곽분섭이 었다.
얼굴이 너무 우울해 보였다. 오월정 병장에게 맡긴 것까진 좋 았으나, 마무리가 안 좋았다. 해피 엔딩으로 끝났어야 했는데, 세드 엔딩으로 끝나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목사님한테 따로 상담 요청을 해 보든가 해야겠네.'
상담은 목사의 전문 분야다. 이강진도 가끔 군 생활이 힘들다 고 느껴질 때면 목사에게 좋은 말들을 듣고 기운을 차리곤 했다.
물론 그것보다 한지윤을 보고 기운을 차렸던 적이 압도적으로, 훨씬 더 많았지만 말이다.
* * *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강진은 예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곽분섭 때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곽분섭 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저 녀석, 왜 저래?'
예배가 거의 다 끝나갈 때쯤 그의 얼굴엔 우울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목사님 말씀이 효과가 있었나?'
모든 종교 행사가 끝나자마자 이강진은 곽분섭의 상태부터 먼 저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분섭아,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어?"
슬쩍 그를 떠봤다.
곽분섭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강진 상병님, 저 찾은 거 같습니다."
"뭐를?"
"새로운 사랑입니다!"
이 녀석이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었다.
아니 면 아예 멘탈이 나가 버린 걸까?
그것도 아니었다.
때마침 성가대 사람들이 교회 문 밖으로 나와 병사들에게 일 일이 인사를 건넸다.
"다음 주에도 또 교회 나와 주세요!"
"네, 물론이죠! 반드시 나오겠습니다!"
설레는 표정으로 성가대 여성에게 말을 붙이는 곽분섭.
그제야 이강진은 깨달았다.
'이 녀석이…… 차인 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여자한테 눈을 돌리나.'
사랑으로 얻은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한다.
그 덕분에 곽분섭의 우울증이 사라졌으니 이거면 된 게 아닐 까.
이강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제66화. 군인들이 헤어지는 방법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