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2화. 큰 산을 넘다 (3) >
제72화. 큰 산을 넘다 (3)
한두 시간 걷다 보니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이젠 유격장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게 된 병사들. 이들은 그 저 앞만 보면서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컨디션 자체는 확실히 입소 행군 때보다 복귀 행군 때가 더 안 좋다. 4박 5일 동안 유격 훈련을 받느라 고생했기 때문에 몸 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만큼은 가볍고 편했다.
복귀 행군만 마치면 모든 유격 훈련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병사들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하나 이건 복귀 행군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당시의 상태였다.
마지막이 라고 해도 행군은 행군이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계속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니 병사들은 몸뿐만 아니라 가벼 웠던 마음도 어느새 등에 짊어진 완전군장처럼 무거워지기 시 작했다.
행군 4시간째.
1분대에서 체력이 가장 약한 조은석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흐억. 히…"
쉬는 시간 동안 조은석은 전투화를 벗어서 발을 말리는 것조 자 잊어버릴 정도로 계속 거친 숨만 토해 내고 있었다.
바로 근처에 있던 백우호가 이강진을 대신해서 조은석의 상 태를 면밀히 살폈다.
"은석아, 괜찮냐?"
"이, 이 병 조은…… 석……. 괘, 괜찮습니 다!"
말만 그렇지, 전혀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는 건 백우호가 봐도 알 것 같았다.
"발은? 물집 잡힌 곳 있어?"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전투화 벗어 봐 내가 확인해 줄게."
"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체력적으로 문제가 되는 조은석인데, 발에 물집까 지 잡혀 버리면 행군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진 물집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해선 안 된다.
"혹시 모르니까 양말은 갈아 신어."
"여분의 양말이 없습니다만……."
유격 훈련을 받느라 양말을 전부 소모해 버렸다.
더러워진 양말이라도 다시 꺼낼까 했으나, 그전에 백우호가 먼저 도움을 줬다.
"잠깐만 기다려. 내 건 깨끗하니까."
완전군장 안에서 양말 한 켤레를 꺼낸 백우호. 그는 자신의 양말을 지체 없이 후임에게 건넸다.
"백우호 상병 님, 감사합니다!"
"나중에 마음의 편지 쓸 일 있으면 백우호 상병님이 이러이러 한 선행을 했다고 꼭 써라, 크큭!"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백우호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았다.
힘들수록 웃어야 한다. 이것이 군 생활을 통해 터득한 백우호 의 신념이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병사들의 어깨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아래로 축 처지기 시 작했다. 그럴 때마다 중대장은 군인답게 어깨 당당히 펴라고 말을 했지만, 사실 말이야 쉽지, 그게 자기 생각대로 되겠나.
이강진도 점점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큰일이네.'
아직 부대에 도착하려면 3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한다.
나름 행군에 익숙한 이강진조차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다른 분대원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쳐 가는 이들에게 야식 타임이 주어졌다.
지난번 유격 복귀 행군 때 들렀던 타 부대에 발을 들이게 된 부대원들.
이곳의 대대 식당에서 부대원들은 컵라면과 음료로 배를 채 웠 다.
조은석은 눈앞에 있는 라면을 바라보면서 감격에 겨운 소감을 내비쳤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라면을 먹어 보는 건 처음입니다! 진짜 꿀맛입 니다!"
그건 다른 병사들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컵라면과 음료에 잔뜩 취해 있으면 곤란하 다.
지금 당장은 좋지만, 나중에 가면 이것 때문에 어마어마한 후 폭풍이 병사들을 덮치게 될 것이다.
그 후폭풍의 이름은 바로 '졸음'이다.
군인들의 취침 시간은 저녁 10시다. 현재 시간은 새벽 1시에 가까운 시간이다. 취침 시간을 훌쩍 넘은 데다가 배까지 부르니, 잠이 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강진은 이게 걱정이었다.
"꿀맛도 좋지만, 이거 먹으면 분명 졸릴 테니까 조심해."
그러나 조은석은 이강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계속 걸을 텐데, 졸릴 틈이 있겠습니까?"
"있지."
처음에는 이강진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야간 행군을 하다 보면, 사람이 졸면서 걷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만간 조은석도 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 * *
이강진의 말대로 행군이 시작된 지 30분 만에 조은석에게 졸 음의 요정이 찾아왔다.
꾸벅, 꾸벅, 꾸벅.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머리가 병든 닭 머리처럼 아래 로 향했다.
이강진은 뒤를 힐끗 바라봤다.
바로 뒤에서 이강진을 따라오는 조은석의 상태가 어떤지 한 눈에 바로 보였다.
"은석아, 졸려?"
"이, 이병 조은석! 아, 안 졸립니다!"
언행불일치였다.
얼굴에는 졸음이 한가득이었다. 이강진은 그를 보면서 팁을 줬다.
"너무 졸리면 머릿속으로 야한 생각을 봐. 그러면 조금이 나마 잠이 달아날 거야."
"야한 생각……."
군대에 오면 젊은 여자들과 접점이 거의 없어진다. 망상만 잔 뜩 늘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 망상의 힘을 발휘해야 할 때다.
조은석은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웃긴 이야기지만, 이강진의 조언대로 도움이 어느 정도 되긴했다.
하지만 졸린 건 여전했다.
졸음의 요정이 조은석만 편애하진 않았다. 다른 병사들에게 도 공평하게 졸음 가루를 뿌리고 다녔다.
그 탓에 몇 명의 병사들이 앞을 보지 못하고 선두의 완전군장 과 중돌하는 사소한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되었다.
이 정도는 큰 사고 축에도 못 든다.
중요한 건 이다음이다.
앞서 걸어가던 중대장이 병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산만 넘으면 된다! 경사가 심하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 도록!"
"예, 알겠습니 다!"
산에서 떨어지면 찰과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게다가 야간 산행이라 그런지 시야 확보도 어 렵다. 이 럴 때일 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강진이 뒤를 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주의를 줬다.
"앞에 진흙 바닥이니까 조심해서 따라오니 발 미끄럽다!"
"예!"
"진흙 바닥 조심!"
"진흙 바닥 조심!"
복명복창하면서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미리 경고를 했다. 이런 식으로 서로 협력을 해야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다. 산을 넘고 나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보이는 밝은 불빛.
병사들이 유격 훈련을 받는 동안, 그토록 그리워하던 1075대 대 위병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병소 모습 보인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아!"
"1 중대, 파이 팅!"
"마지막이다! 진짜로 마지막이다!"
선두로 출발한 본부중대 병사들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위병소 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집이다!"
"집 왔다!"
막사를 집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곳이 그리웠다.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
대대장은 그들을 자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들 사고 없이, 그리고 열외 없이 복귀 행군을 마쳐 줘서 고 맙다! 다들, 서로에게 박수!"
환호성과 동시에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동이 트기 전에 대대장은 병사들을 막사로 올려 보냈다.
막사로 돌아온 병사들.
1 생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분대원들은 완전군장을 그대로 침 대에 던져 버렸다.
"드디어 끝났다!"
"유격! 끝!"
"씨발, 겨우 끝났네!"
감동의 시간도 잠시.
행정반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아아,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 온수 틀었으니 전 병력은 한 명도 빠짐없이 샤워하러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차례는 1분대부터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먼저래!"
"서일주 병장님, 샤워하러 가시지 말입니다!"
"샴푸 어 딨냐? 내 머리 위에 좀 뿌려 줘라!"
분대원들은 지금 당장에라도 샤워실로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 다.
가장 빠른 병사는 역시 이강진이었다.
쏴아아아아!
온수의 따스함이 이강진의 온몸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천국에 온 기분이네!'
이강진의 마지막 유격이 끝났다.
회귀 트럭에 또 치이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이강진의 인 생에 더 이상 유격 훈련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이 이강진에게 크나큰 안도감을 심어 줬다.
* * *
눈을 붙였다가 다시 떴을 때.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온몸이 다 뻐근하네.'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우두둑!' 하 는소리가들렸다.
다른 병사들은 아직도 한창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었 다.
이강진이 1분대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뜬 셈이었다.
'이런 거 빨라 봤자 좋을 거 없는데.'
기상 시간이 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그동안 다시 잠을 청할까 했지만, 한 번 눈을 뜨고 나니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화장실이나 가야지.'
소변을 보고 난 다음에 막사 밖으로 나와 바깥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이강진처럼 일찍 일어난 후임병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
"충성 이강진 상병님, 일어나셨습니까."
"어, 총구야. 너도 일찍 일어났네?"
"제가 원래 잠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기왕 일어난 김에 전화 나 할까 해서 휴게실 가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
이강진도 휴가 나가기 전에 만날 사람들한테 전화 좀 돌릴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역할 시기가 다가 오니 슬슬 만나야 할 사람들의 숫자도 많 아졌다.
이강진은 전역하자마자 바로 주식 투자와 더불어 외식 사업 에 발을 들일 예정이었다.
최대한 많은 돈을 끌어모은 뒤, 시프 코인으로 대박을 터트린 다.
이것이 이강진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선 역시 인맥 관리가 필수다.
이종구와 함께 전화박스로 향한 이강진.
마침 딱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강진은 가장 구석에 있는 전화박스를 차지했다.
'여기도 짬 안 되면 못 오는 곳이었는데.'
휴가를 나갔다가 복귀하면, 이강진은 바로 병장 진급 시험을 보게 된다.
진급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면…….
'나도 이제 병장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눈치 볼 사람도 없어지게 된다.
국방부 시계가 좀 더 빠르게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이강진은 전화 카드를 꺼냈다.
가장 먼저 전화를 걸 사람은 바로 이용진이었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용진이 형?"
-혹시 강진이니?
"어, 나야."
오랜만에 통화를 나누는데도 불구하고 이용진은 이강진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렸다.
-이야! 오랜만이다, 강진아. 아직 부대냐?
"어제 막 유격 훈련 끝났어."
-유격……. 어휴! 끔찍하다, 끔찍해 이 날씨에 유격 받느라 고 생 많았어. 아직도 PT 체조 받고 그래?
"PT 체조가 빠지면 유격이 아니지. 형도 알잖아?"
-하긴 그렇지. 유격이라……. 나 때는 말이야, 유격이 어땠냐면 여기서 갑자기 라떼를 찾기 시작하는 이용진.
더 말이 길어지기 전에 이강진은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리 기로 했다.
"용진이 형, 나 다음 주에 휴가 나가는데, 얼굴 볼 수 있어? 내 가 형 있는 곳으로 찾아갈게."
-서울로? 청주에서 멀잖아?
"휴가 나와서 청주로 내려가기 전에 서울 들러서 형 얼굴 보 고 내려가면 돼."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그래, 그렇게 하자. 안 그래도 요즘 한가하니까.
방송 업계 쪽에 든든한 인맥이 심어져 있다.
이 인맥을 잘만활용하면, 나중에 이강진에게 큰도움이 될 것 이다.
< 제72화. 큰 산을 넘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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