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7화. 괴도 X (2) >
제77화. 괴도 X (2)
이강진은 이제 막 휴가에서 복귀했기 때문에 사실 휴가 제한 이 걸려도 크게 타격은 없었다.
어차피 한 달의 여유 기간을 두고 휴가를 나가야 했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곤란해하는 후임들을 보고 나몰라라 할 순 없었다.
"건조대에서 다 털렸다고 했지?"
이강진의 물음에 답한 것은 지금 이 사건이 해결되기만을 간 절히 바라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인 기운상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일단 가 보자. 그곳에 증거 같은 게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니 까."
"알겠습니다. 분섭아, 너도 같이 가자."
"예!"
휴가를 나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와 이미 휴가를 나갔다 온 자가 함께 팀을 이루었다.
건조대로 향한 이강진은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1075대대 건조대는 막사 뒤쪽에 위치해 있다. 형태는 비닐하 우스와 동일하다. 비닐을 몇 겹을 겹쳐 천장과 벽을 만들고, 안 에 기다란 철심을 박아 건조대로 만들었다.
바닥은 평범한 흙바닥이다. 그래서 가끔 병사들이 마른 빨랫 감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면 흙먼지가 묻어서 심히 짜증을 내곤 했다.
흙바닥 덕분에 발자국이 많이 남아 있긴 했지만, 사실상 의미 가 없었다.
'어차피 이 발자국들의 주인은 한 명이 아니니까.'
빨래를 걷으러 온 병사들의 것들도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딱히 보이는 건 없는데.'
애초에 증거가 아직도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욕심이었다. 이강진은 사건이 벌어지고 하루가 지난 뒤에 이 곳을 방문했다. 이미 그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들러 범인이 남긴 증거가 있나 없다 샅샅이 찾아봤을 터.
수사의 방향을 다르게 잡을 필요가 있었다.
"건조대에 널었던 빨랫감이 다 털렸다는 걸 처음 발견한 사람 이 누구야?"
"이영순 상병입니다."
"영순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1분대가 아닌 2분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모를 수밖에 없었다.
"가서 영순이부터 만나 보자."
"예!"
기운상과 곽분섭은 이강진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해결사라 불리는 남자, 이강진이 이번에도 뭔가를 해 줄 거라 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강진은 이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꼈다.
'나는 그냥 가볍게 범인을 쫓아 보려고 하는 건데.'
후임들의 기대 어린 시선에 이강진은 괜히 헛기침만 남발했 다.
* * *
"영순이 있냐?"
누워서 걸그룹 무대 영상을 보고 있던 이영순 상병은 이강진 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화들짝 놀랐다.
"상병 이영순. 무슨 일이십니까, 이강진 병장님?"
이강진이 그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접점이 딱히 없었기 때 문이었다.
"뭣 좀 물어 보고 싶어서."
"지금…… 말씀이십니까?"
"어."
이강진은 단호했다.
티비에 걸그룹이 나오든 뭐가 나오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은 걸그룹보다 휴가, 외줄, 외박 통제를 푸는 게 우선이다.
선임이 보자고 하는데 계속 걸그룹에 시선을 빼앗길 순 없었 다. 게다가 상대는 이강진.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후임은 1 중대에 없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열대로 이영순을 데리고 나 왔다.
"건조대 사건, 들었다. 네가 최초 목격자라며?"
"예, 그렇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어땠어?"
현장 보존이 니 뭐니 하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갔다. 그래서 이 강진은 아쉬운 대로 이영순에게 목격담이나마 들어 보려고 했아직도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한 모양인지 이영순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양말 한 짝, 팬티 하나 남김없이 싸그리 다 사라진 상태였었 습니다. 심지어 바닥에 떨어진 것조차 없었습니다. 이강진 병장 님도 아시겠지만, 건조대에 빨래가 단 한 개도 없었던 적은 훈련 때 말고 없지 않습니까? 전 처음에 그 광경을 보자마자 제가 모르는 훈련이라도 시작한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였어?"
"예, 그리고 이건 제 생각이지만, 누군가가 아예 작정하고 털 어 버릴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이영순의 말대로 이건 미친 짓이었다.
훔쳐 가려면 티 안 나게 하나만 훔쳐갈 것이지. 왜 이런 욕심을 부려서 부대가 뒤집어지게 만들었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
이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훔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지금처럼 부대를 뒤집어 버리는 게 범인의 목적인가?'
행보관이 당직일 때 보급품을 훔쳐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고, 휴가 등의 통제를 유도한 게 전부 계산된 행동이라면?
'싫어하는 선임이나 동기, 후임한테 휴가 못 나가게 해서 복 수라도 할 생각인가.'
그래도 여전히 범행의 동기가 무엇인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결국 본인도 피해를 보는 셈이 아닌가.
'모르겠네.'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럴 때에는 좀 더 증언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세탁물들 싹 털린 거 말고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어?"
"없었습니다. 그때는 야간이기도 해서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제가 제대로 못 봤을 겁니다."
"그렇군, 흠……."이번 사건은 알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
고민에 빠진 이강진에게 이영순이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아까 형덕이도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던데. 보니까 형덕이 는 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많이 물어 보고 다닌 거 같았습니다. 좀 더 많은 자료를 원하신다면, 형덕이를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형덕이? 민형덕 말하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1중대 1분대에만 괴짜들이 모이는 게 아니다.
다른 분대에도 괴짜라고 불릴 만한 병사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민형덕 일병이다.
추리소설 마니아 겸 작가이기도 한 그는 미스터리한 일을 굉 장히 좋아한다.
이번 사건이 그의 흥미를 이끌어 낸 듯했다.
그러나 이강진은 이영순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형덕이랑 이야기하면 피곤한데."
"하하하! 저도 그건 공감합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다. 오죽하면 그와 같이 외곽 근무를 선 선임 근무자들이 행정병을 찾아가서 민형덕하고 같이 근무 세우지 말 라고 말할 정도겠나.
쉬지 않고 계속 수다를 떤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그래도 들을 만하겠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흥미가 없는 소재를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그것을 한 시간 내내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귀에 딱지가 생길 것이다.
'웬만하면 형덕이하고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그가 자료 수집을 다 해 놨을 테니, 분명 도움은 될 것 이다.
그리고 범인을 찾긴 찾아야 한다. 행보관의 휴가 통제 명령이 이강진의 휴가 일정에 영향을 미칠 만큼 장기화되면 안 되기 때 문이다.
'이번엔 어쩔 수 없군.'
이강진이 민형덕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 * *
같이 범인을 쫓아보자.
이강진이 먼저 이 제안을 해 왔을 때, 민형덕의 눈빛은 심히 반짝였다.
"안 그래도 제가 자료들을 모아 뒀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 면 언제든 말씀만 해 주시면 됩 니다!"
"그, 그래. 고맙다."
민형덕의 눈에 불이 붙었다.
열의가 너무 넘친다. 오히려 이강진은 이 반응이 더 부담스러 웠 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이상한 표 같은 거였다.
"이게 뭐냐?"
"세탁물들이 전부 사라진 날에 건조대에 들렀던 병사들의 관 등성명과 시간대를 정리해 둔 겁니다."
"오, 그래?"
보기 편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양말, 속옷 들이 사라진 시간대는 저 녁 8시 35분. 그때가 이영 순이 최초로 현장을 목격한 때다.
이영순보다 먼저 건조대에 들렀던 사람은 조훈수 병장이었다. 시간대는 저녁 8시 11분.
'이영순이 건조대에 온 시간까지 24분의 여유가 있었단 거로 군……."
세탁물들을 전부 훔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조훈수 병장을 범인 후보로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 다.
왜냐하면…….
'이번 달 말에 전역하는 말년 병장이 뭐 하러 보급품들을 훔 치겠어?'
오히려 짬 처리한답시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급품들을 나 눠 주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그가 보급품을 훔쳤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조훈수 병장을 제외한다면
그다음으로 먼저 온 병사는 서일주였다.
서일주도 조훈수 병장과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역을 앞두고 있는 병장들은 보급품에 욕심이 없다. 서일주 도 자연스럽게 용의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러면 점점 후보가 없어지는데.'
모를 땐 물어보면 된다.
"형덕아, 넌 범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냐?"
이강진이 휴가를 나간 사이에 민형 덕은 많은 조사를 했을 게 분명하다.
건조대 줄입자 명단이 표로 잘 정리되어 있는 것만 봐도 민형 덕이 열심히 두 발로 여기저기 뛰어다녔음을 알 수 있었다.
민형덕은 이강진의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저는 말입니다……."
그가 말을 이으려고 할 때였다.
같은 2분대 후임이 민형덕을 찾았다.
"민형덕 일병님!"
"어, 왜?"
다급하게 뛰어오는 후임병.
그는 뒤늦게 이강진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게…… 그러니까……."
말을 더듬는 후임병을 보고서 이강진은 바로 알아차렸다.
"왜? 누가 집합이라도 걸었어?"
"……예, 그렇습니다."
이강진의 감은 정확했다.
* * *
집합을 건 인물은 이강진의 맞후임 군번인 진태웅 상병이었그는 자신의 밑으로 싸그리 다 집합하라는 명령을 돌렸다. 막사 뒤로 모인 후임병들.
진태웅은 시작하자마자 이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누구냐? 누가 보급품 훔쳤어!"
침묵이 이어졌다.
보통은 이강진과 민형덕처럼 증거와 증언을 하나하나 수집해 가면서 범인이 누구일지 추리하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이것보다 편한 방법이 있다.
바로 집합이다.
이런 상황이 걸렸는데, 집합이 안 걸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자백해라. 계속 안 나오고 버티고 있 다가 나중에 나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그놈은 나 전역할 때 까지 군 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어 줄 거다."
꿀꺽!
후임급들은 크게 침을 삼켰다.
미친개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진태웅. 그에게 한 번 물리면 끝 이다. 그걸 이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셋 셀 때까지 기회 준다. 셋! 둘!"
병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나."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어쭈, 안 나온다 이거지? 엎드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빠른 속도로 엎드렸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더 준다.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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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막차다.
하나 막차에 올라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태웅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어디 한 번 해보자!"
근처에 놓여 있던 기다란 막대 걸레를 들어 올린 진태웅.
양손으로 그것을 들고서 가장 앞에 엎드려 있는 후임병을 내 려치려고 했다.
하나 절묘한 타이 밍에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진태웅."
근처에서 집합 현장을 몰래 염탐하고 있던 이강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기, 쌍팔년도 군대 아니다. 폭력은 쓰지 마라."
"……죄송합니다."
이강진의 쓴소리에 곧장 막대 걸레를 내려놓았다.
만약 이강진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도난 사건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 제77화. 괴도 X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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