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9화. 건드리 면 안 되는 남자 (2) >
이번 달도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었다.
이강진은 행정반에 있는 각 분과의 칭찬, 경고 카드 현황판을 살폈다.
1분대는 딱 중간 순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분섭이가 경고 카드 받아 온 게 컸지.'
휴가를 나간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야 구 경기 보고 친구들이랑 뒷풀이를 하느라 저녁에 전화하는 걸 깜빡 잊었다고 한다. 마침 당직이 소대장이었을 때 그런 실수를 범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얄짤없이 경고 카드를 세 장이나 받게 되었다.
'칭찬 카드 들어온 것도 거의 없고……."
경고 카드의 존재감을 지울 만큼 칭찬 카드를 많이 받아 뒀다 면 크게 문제될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달에는 칭찬 카드 소득이 굉장히 미비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곽분섭이 받은 3장 의 경고 카드가 유독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래도 중위권이면 분리수거장, 식청은 무조건 피하겠네.'
어느 분과가 노골적으로 이강진과 1분대에게 경고 카드를 몰 아주려고 하지 않는 이상, 최악의 경우는 없을 것이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 이강진은 같이 당직 근무를 서게 된 류성익을 찾았다.
"성 익아!"
"상병 류성익!"
행정반 문 밖에서 동기와 잠시 수다를 떨고 있던 류성익이 이 강진의 부름에 바로 응답했다.
이강진은 행정반 반대쪽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행정반 좀 지키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당직 중 한 명은 무조건 행정반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류성익에게 잠시 행정반을 맡긴 뒤에 화장실로 빠르게 향했다.
'급하다, 급해!'
생리 현상은 쉽게 통제할 수 없다.
신호가 왔을 때 바로바로 해결해 주는 게 좋다.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음?'
한정렬과 정일송이 1생활관 근처를 서성였다.
'뭐야? 왜들 저러고 있지?'
서로 수상한 눈빛을 교환하더니, 갑자기 1생활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에이, 썅! 가 봐야겠네.'
어쩌면 생리 현상보다 더 급한 일이 발생한 것일지도 몰랐다.
* * *
한정렬과 정일송이 예고도 없이 1생활관을 급습했다.
1생활관에는 엊그제 전입한 신병들이 옹기총기 모여 있었다.
"추, 충성!"
신병들은 갑자기 등장한 두 명의 병장들을 보며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어, 그래. 너희가 신병들이구나."
말 속에 숨겨진 감정은 호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적의에 가까웠다.
이들은 당황해하는 신병들을 상대로 짓궂은 장난을 부렸다.
"내 이름이 뭐게?"
한정렬은 자신의 주기표를 손으로 가렸다. 컨닝하는 걸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자대로 전입온지 2일 차에 불과한 이들이 한정렬을 알 리가 없었다.
"뭐야,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중대에서 넘버 10 안에 드는, 고참 중에서도 고참인데? 거기 너."
"이, 이병 허인강!"
의도적으로 허인강을 지목한 한정렬.
"셋 셀 때까지 내 이름 말 못 하면 경고 카드 줄 거다."
말도 안 되는 처사다.
허인강은 설마 이런 일로 경고 카드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병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아는 사람 있으면 몰래 귀띔 좀 달라는 애원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한정렬의 이름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셋, 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는 허인강이었 지만, 총체적 난국이었다.
'차라리 찍을까?' 객관식 문제도 아니고. 주관식을 찍어서 맞준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시도조차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허인강이 입을 여는 순간.
"한정렬 병장님."
뒤에서 이강진이 한정렬을 불렀다.
더 이상 장난 못 치게 일부러 한정렬의 관등성명에 힘을 주면 서 언급했다.
정일송도 예외는 없었다.
"정일송 병장님도 같이 계셨습니까. 신병들한테 무슨 볼일이 십니까?"
이강진은 이들이 신병들을 데리고 장난치려고 한다는 걸 이 미 눈치챘다.
짧게 혀를 찬 한정렬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 였다.
"그냥. 신병들이 고참들 관등성명 잘 숙지하고 있나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거야."
"아까 경고 카드 이야기가 나온 거 같은데.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말입니다?"
대기 기간의 신병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이건 1075대대 전체 에 적용되는 암묵적인 룰이다.
물론 칭찬, 경고 카드도 마찬가지다.
하나 한정 렬은 그 룰을 깨려고 하고 있었다.
"신병은 우리 중대 소속 아니냐? 우리 중대면 중대원들 관등 성명 정도는 다외우고 있어야지. 전쟁 나도 대기 기간이라고 총 못 들게 할 거야? 아니지?"
대기 기간이니 뭐니 그런 걸 일체 따지지 않겠다.
모르면 맞아야 한다는 격투 게임의 명언처럼, 군대에서도 모 르면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
설령 전입 온지 일주일도 안 된 신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한정렬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이로써 이강진은 한정렬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아차렸다.
'우리 분대한테 경고 카드 몰아줘서 꼴찌로 만들 생각인가 보 군.'
이렇게 되면 1분대가 불리해진다. 한정렬의 수송분과와 정일 송의 2분대에는 신병이 없다. 그래서 서로 난타전으로 간다면 허인강이 있는 1분대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마음만 먹으면 허인강에게 경고 카드를 몰아줄 수 있기 때문 이었다.
'게다가 두 분과가 서로 연합도 맺은 거 같은데.'
분대장이 줄 수 있는 칭찬, 경고 카드는 개수 제한이 있다.
각각 10장씩 줄 수 있다. 두 개 분과한테 각각 경고 카드를 10 장씩만 받아도 20장이다. 3장만 받아도 겨우 중위권을 유지할 까 말까인데, 20장이 면 무조건 꼴찌 확정이다. 주식으로 따지 면 상장폐지 각이다.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밀고 나오는 두 선임.
이강진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더 이상 왈가왈부 안 하겠습니다."
대놓고 1분대와 싸우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 설득이라는 게 통할 리가 없었다.
타협의 여지 따윈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전쟁이다!'
얌전히 당하고만 있을 이강진이 아니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이강진은 받은 만큼의 5배 이상을 돌려줄 셈이다.
* * *
저녁 점호 시작 전에 이강진은 1생활관을 찾았다.
"집합."
"집합!"
이강진의 한마디에 1분대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지금부터 우린 수송분과, 2분대와 전쟁을 시작할 거다."
"전쟁?"
뜬금없는 단어 선택에 백우호는 눈을 꿈뻑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거기 두 분과하고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먼저 싸움을 걸어 왔어."
"어떻게?"
이강진은 낮에 있었던 일들을 분대원들에게 전부 공유해줬 다.
한정렬과 정일송이 1분대에게 어떻게든 경고 카드를 줄 빌미 를 마련해서 꼴찌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는 것까지 싸그리 다 알려 줬다.
이야기를 들은 백우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리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한정 렬 병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
백우호는 몰랐을 테지만, 이강진은 한정렬의 사람됨이 부족 하다는 것을 회귀하기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수송과의 접족을 최대한 피해 온 것이다.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 온 이상 어쩔 수 없게 되 었다.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지, 태강아."
"상병 성태강."
"네가 분섭이하고 영고랑 같이 인강이 내일 안으로 내무생활 에 관한 거, 전부 다 알려 줘라. 선임들 관등성명도 싸그리 다 외 우게 해."
"하루 만에 다 숙지하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당사자인 허인강도 소심하게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위아 래로 끄덕이 면서 무의식적으로 성태강의 말에 찬성한다는 의사 를 드러냈다.
하지만.
상황은 급박하게 변했다.
"군대에서 불가능은 없다.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만들어. 그 것이 네 임무다."
무대포식 군인 정신은 이럴 때 필요하다.
허인강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거, 이강진도 잘 안 그러나 안 할 수가 없다. 아까처럼 대기 기간이라고 방심하면, 언제 경고 카드가 무더기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들, 다음 달에 분리수거장 청소하고 싶냐?"
"아닙니다!"
"식청 하고 싶냐? 남들 점심시간에 잠 푹 자고, 저녁 시간에 휴게실에서 늘 때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싶어?"
"아닙니다!"
"그럼 인강이 교육시켜. 그것만이 너희가 살아날 수 있는 유 일한 방법이다."
비장미가 넘쳐 흘렸다.
이렇게 된 이상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가야 한다.
성태강의 눈빛이 달라졌다.
"인 강아."
"이, 이병 허인강!"
"넌 족구도 잘하고, 노가다도 잘해. 그렇지?"
"에, 그,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무생활도 하루 만에 다 숙지할 수 있을 거다."
그거와 이게 무슨 연관이 있을까.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허인강이었지만, 분위기 상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해, 해 보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가 아니라 '하겠습니다.'다. 알겠나."
"예! 하겠습니다!"
"좋아!"
자대로 전입하자마자 허 인강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시 밭길을 걷게 되었다.
* * *
수송분과와 2분대가 눈을 부릅뜨고 언제 1분대가 발을 헛딛 을까 지켜보고 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기 상황.
1분대는 이 번 달이 넘어갈 때까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계 속 이어 나가야만 했다.
7일만 버티면 될 거 같은데…….
매달 1일부터 시작해서 말일까지 들어온 칭찬, 경고 카드만 점수 계산에 포함된다.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다.
달이 바뀌기 전까지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강진은 달력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방어만 해 봤자 이길 순 없어.'
이기려면 공격도 해야 한다.
전쟁에 심판은 없다. 아군과 적군만 있을 뿐.
살아남는 자가 곧 승리자가 된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선 결국 공격해서 적군을 쓰러뜨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공격이 잘 먹히도록 하기 위해선 우리도 동등한 전력을 갖출 필요가 있겠지.'
취침 소등 시간 전에 이강진은 행정분과가 있는 곳으로 향했 다.
행정병들이 잠을 청하기 위해 침낭을 펼치고 있었다.
"철이 있어?"
"충성! 화장실에서 양치하고 계십니다."
"그래? 땡큐."
화장실로 향한 이강진.
행정병들이 말한 대로 김철은 세면대에서 열심히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철아."
".
입안을 헹구던 물을 뱉어 낸 김철이 이강진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왜?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설마 행보관님이 나 찾으시는 건 아니지?"
자기 전에 파일 하나만 만들고 자라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 이 엄습했다.
이강진은 먼저 김철의 불안감을 해소시켜 줬다.
"그것 때문에 너 찾아온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씨익 미소를 날린 이강진.
"동맹을 제안하러 왔지."
< 제79화. 건드리 면 안 되는 남자 (2) > 끝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