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3화. 세팅 (1) >
제83화. 세팅 (1)
결국 군종병이 되기로 결심한 곽분섭.
원래는 PX병을 고를 생각이었으나, 최다연이 걸어온 전화 한 방으로 곽분섭은 그대로 녹다운당해 버렸다.
PX의 유혹보다 좋아하는 여자의 위력이 더 컸다.
물론 그 배경에는 이강진의 계략이 몰래 숨어 있었다.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엔 목사의 도움이 컸다.
곽분섭 이 최 다연에게 관심 이 있는 거 같은데, 좀 도와줄 수 없 겠냐고 솔직하게 부탁을 했다.
목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서로 취향이 잘 맞다 보니 최다연도 곽분섭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최다연은 부대로 먼저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강진이 두 사람을 한 번 이어 줬으니, 나머지는 그들 끼리 알아서 할 것이다.
대신 문제가 있었다.
"이강진 병장님,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잠깐 상담 요청해도 괜찮습니까?"
"상담?"
곽분섭이 느닷없이 이강진을 찾아온 것이다.
"예, 실은 제가 이강진 병장님한테 숨겨 왔던 게 하나 있습니다."
PX병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양심 고백인 셈이었다.
이강진은 곽분섭을 외부 휴게실로 데려갔다.
"말해 봐."
"사실은 말입니다……."
서공찬에게 차기 PX병을 넘겨받기로 했던 일들을 전부 다 털 어놓았다.
"가서 서공찬 병장님한테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 습니다."
서공찬이 적극적으로 밀어준 만큼, 미안함이 더 컸다.
이강진이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에둘러 말할 필요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이야기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군대에선 말이다. 어쭙잖게 선임을 속이려 드는 게 가장 안 좋은 행동이야. 넌 아마 모를 테지만, 선임의 눈에는 후임이 거짓말하려는 게 빤히 보이거든."
결국 이강진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솔직함이 제일이다.
서공찬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곽분섭이 그렇다고 갈굼받을 만 큼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 않은가. 원래 군종병을 하기로 했었고. 중간에 서공찬이 무리를 해서 자신의 뒤를 잇게끔 만들 려고 시도를 한 것뿐이지, 차기 PX병으로 아예 내정받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서공찬 병장님은 이런 거 가지고 화낼 사람이 아니 야. 물론 약간 실망스러워하겠지. 서공찬 병장님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너를 죽도록 미워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왠지 어디서 들어 봤던 설득 패턴이었다.
서공찬이 곽분섭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하던 그것과 상당히 흡 사한 화법이었다.
그런 사람 아니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번에도 곽분섭은 거기에 넘어가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솔직함이 정답이라는 말,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가급적이면 빨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야. 이런 건 시간 질질 끌어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나니까."
"바로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마무리 잘 짓고 와."
"예!"
이강진의 기독교 군종병 VS 서공찬의 PX병.
정상적으로 붙었더라면 PX병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어야 정상이지만, 이강진의 츠악략 덕분에 기독교 군종병이 최종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 *
"그렇구나. 결국 군종병으로 마음을 굳혔구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서공찬.
서운함이 전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태 껏 잘 지내 왔던 곽분섭과의 관계를 망치고 싶진 않았다.
비록 자신의 후임 PX병이 되지 못한 건 분명 아쉽지만, 그래 도 곽분섭만큼 그의 야구 이야기를 들어주는 후임은 없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나 도 더 이상 말은 안 할게. 애초에 PX병 맡아 볼 생각 없냐고 먼 저 찔렀던 건 나였으니까."
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건 서공찬의 난입이었다. 그가 불 만을 가질 입장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서공찬 병장님."
"괜찮아. 네가 사과할 일 아니 야. 그나저 나 PX병을 누굴 줘야 하나……. 이것 좀 고민해 봐야겠네."
"같은 분과 후임에게 물려주시려 던 거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이 녀석들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별로 주고 싶지 않아졌거든."
그것 때문에 일부러 곽분섭에게 PX병을 넘겨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분과에서 찾아봐야 하나. 이것도 은근히 일이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까 했던 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네 잘못 아니다. 언더 스 탠 드?"
"예, 알겠습니다!"
공석이 되어 버린 PX 후임병 자리.
머지않아 휴가에 굶주린 하이에나들이 이 자리를 노리기 위 해 달려들 것이다.
* * *
군대에서 퍼지는 소문은 굉장히 빠르다.
곽분섭이 PX병 자리를 거절했다는 말이 1중대 전체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대부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
그 아까운 걸 왜 거절했냐.
곽분섭은 이 질문을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들어야만 했다. 대 답하는 것도 참 애매했다. 최다연 때문에 PX병을 포기했다고 말 하면 좀 그렇고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내가 한 번 PX병에 도전해 볼까?
주로 일, 이등병 들이 PX병을 매우 탐내고 있었다.
PX병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도 편한 보직이라는 인식이 강 한 그런 작업병이다.
실제로 편한 점이 많다. 항상 편한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꿀을 빨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PX병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조은석.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PX병을 차지할 수 있을까.'
사실 조은석은 다른 동기들에 비해 군 생활이 여러모로 힘들었다.
체력적인 면도 있었지만, 정신적인 면이 가장 고달팠다.
군대에 워낙 늦게 입대해서 그런지 1중대에서 나이로 따지면 병사들 중에서 조은석이 가장 많았다. 심지어 젊은 부사관들과 비교해도 조은석이 나이가 많을 때가 있었다.
부소대장 라인 중에서 조은석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유일 하게 3부소대장밖에 없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서러운데, 자신보다 어린 선임한테 굽신거 려야 하니. 여기서 오는 스트레스가 꽤 컸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작업병 하나 맡아서 부대 사람들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이강진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은석아."
나뭇가지를 열심히 나르고 있는 조은석을 부르는 이강진.
"이병 조은석!"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다른 ?泳宕湧?잠시 쉬어도 좋다. 10 분간 쉬고 작업 다시 시작할 테니까 담배 피우고 싶은 사람들은 피우고,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들은 근처에서 볼일 보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쉬게 한 뒤에 이강진은 조은석과 따로 자리를 가졌
"군 생활은 좀 어때?"
"할 만합니다! 선임분들도 다들 잘해 주시고, 이강진 병장님 도 잘 챙겨 주신 덕분에 문제없이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온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사탕발림이 상 당히 능숙했다.
"나이 어린 선임들 뒤치다꺼리 하느라 힘들지?"
"아닙니다!"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분위기를 잡는 이강진 앞에서 조은석의 마음의 문이 살짝 열 렸다.
"사실은…… 가끔 좀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닙 니다. 어쩌다가 몇 번 그런 적이 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기자라는 것 때문에 이강진과 성태강에게 경계의 대 상이 되었던 조은석.
그러나 지난 민원 사건 당시, 조은석은 이강진에게 큰 도움을 줬었다.
은혜는 반드시 갚는다. 이것이 이강진의 철칙이었다.
"소문 들었지? 서공찬 병장의 뒤를 이을 PX병 자리가 비었다 는 거."
"예, 들었습니다. 원래 그거, 곽분섭 일병한테 제의 들어왔었 다고 하던데…… 그걸 거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강진이다.
하나 조은석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섭이도 무슨 생각이 있으니까 거절했겠지. 그 이야기를 하 려고 부른 건 아니고."
이강진은 곽분섭이 PX병을 거절하고 난 이후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생각해 뒀다.
"PX병을 우리 1분대로 가져올까 하는데."
작업병 3개를 가져오면, 이강진이 전역한 이후에도 후임들은 안정적으로 포상 휴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굳이 전역한 이후의 일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놈의 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조은석에겐 빚이 있다.
결국 이강진은 그를 위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강진이 PX병을 인수인계받겠다고 나설 순 없다. 그도 전역 한다고 기독교 군종병을 물려준 마당에, 이제 와서 새로운 작업 병을 받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이강진은 협력자를 구하기로 했다.
그 협력자는 바로…….
"내가 PX병 달게 해 줄까?"
조은석이었다.
예상치 못한 이강진의 제안에 조은석은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가, 가능한 일입니까?"
"당연하지.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강진이야."
넘치는 자신감.
조은석은 이미 거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강진과 협력할지 말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갑자기 이강진을 향한 충성심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 * *
병장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의 업무는 전혀 줄어들지 않 았다.
오히려 더 늘었다.
일을 맡아 줄 후임들이 없어서 김철에게 업무가 몰리는 게 아니었다.
중분히 있다. 이미 TO를 넘어 버릴 정도로 후임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간부들은 일, 이등병 들에게 자신의 중요 업무를 맡길수 없다는 이유로 계속 김철을 찾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김철은 오늘도 행정반에서 문서 작업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이강진이 불쑥 다가왔다.
"철아, 이거 마시면서 해."
1075대대 PX에서 구하기 어렵다고 소문 난 초코맛 우유였다.
"이거 나한테 줘도 괜찮은 거야? 엄청 희귀한 거잖아."
"너 주려고 사온 거 니까 마셔도 돼."
뇌물의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김철은 초코맛 우유 뚜껑을 뜯기 전에 이강진에게 먼저 물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뭔데?"
이런 청탁을 한두 번 받은 게 아니다.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강진은 진도를 빠르게 잡기로 했다.
"근무 시간표 좀 바꿔 줄 수 없을까 해서."
"당직? 아니면 외곽 근무? 너 어디로 편성되어 있는데?"
"내가 아니라......
이강진은 손으로 어느 한 병사의 이름을 가리켰다.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김철은 눈을 두세 차례 끔벅였다.
"조은석?"
"어, 은석이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서. 미안한데, 오 늘은 근무 그냥 빼 주고, 내일 야간 근무로 넣어 주면 안 될까."
"상관없긴 한데. 오늘 땜빵은 누가 채울 건데?"
"분섭이가 대신 채워 줄 거야. 대신에 내일 분섭이 근무 시간 에 은석이가 들어가면 돼."
곽분섭과 조은석이 서로 위치만 바꾸는 거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거 가지고 굳이 초코맛 우유까지 선물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알았어. 바꿔 줄게."
"땡 큐."
행정반을 떠나기 전에 이강진은 새롭게 바뀐 근무 편성표를 확인했다.
[23 : 00 병장 서공찬 /이 병 조은석]
PX병을 가져오기 위한 첫 무대가 갖춰졌다.
< 제83화. 세팅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