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3화. 세팅 (2) >
제83화. 세팅 (2)
서공찬은 일부러 자신의 근무 파트너를 곽분섭으로 세우게끔 미리 작업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조은석이 어제 컨디션이 안 좋다는 이유 때문에 곽분섭과 서 로 근무를 바꿔야만 했었다.
하루 정도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너무 곽분섭하고만 외곽 근무를 서려고 하니까 간부들 에게 약간 눈치가 보이는 것도 있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편이었다.
22시 50분.
짧은 수면을 취한 서공찬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행정반에 들어 섰다.
후임 근무자로 나선 조은석이 이미 모든 세 팅을 끝내 놓은 상 황이었다.
서공찬은 총기 보관함에서 자신의 종만 꺼내서 나가면 된다.
인솔을 맡은 백우호가 먼저 앞장서 면서 말을 걸었다.
"서공찬 병장님, 은석이하고 외곽 근무 서시는 거 이번이 처 음 아닙니까?"
"그렇지."
"우리 은석이가 사회에서 기자하다 와서 그런지 재미있는 이 야기 많이 알고 있습니다.1 시간 동안 심심할 틈은 없을 겁니다."
"그래?"
일부러 백우호가 밑밥을 깔았다.
그의 역할은 바람잡이다.
최대한 조은석을 좋게 포장하라. 이것이 이강진에게 받은 명령이었다.
서공찬은 말 많은 후임을 좋아한다. 곽분섭을 아끼는 것도 이 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흥미 있는 분야는 따로 있는데."
야구가 대표적인 분야였다.
하나 조은석이 누구인가.
그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일관했다.
"오늘 서공찬 병장님하고 근무 선다고 해서 제가 준비 많이 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기본 자세가 되어 있구먼."
첫 스타트가 나쁘지 않다.
하나 본격적인 테스트는 지금부터다.
백우호와 조은석은 서공찬 몰래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고개를 한 차례 크게 끄덕이는 두 사람.
* * *
백우호가 서공찬의 기대를 잔뜩 높이려고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크게 효과적인 건 아니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은석이 너, 정치하고 경제 쪽 담당 기자라며?"
서공찬이 흥미 없어 하는 분야였다.
"예, 그렇습니다."
"난 그런 거 잘 모르는 사람인데."
"정치, 경제 담당 이전에는 연예계 쪽에서 활동했었습니다. 혹 시 마음에 들어 하는 걸그룹 멤버 있습니까? 제가 엠바고로 썰 몇 개 풀어 드리겠습니다."
"아니, 걸그룹은 별로 안 좋아해."
군인이라고 무조건 걸그룹을 좋아하란 법은 없다.
서공찬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그래서 그와 말이 잘 통하는 후임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직감한 조은석.
하지만…….
'과연 이건 어떨까?'
조은석은 처음부터 필살기를 꺼내기로 했다.
"얼마 전에 도산 소속이었던 기문산 선수 있지 않습니까? 그 선수, 이적 발표 난 거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기사도 엄청 크게 났잖아?"
도산의 대표 투수였던 기문산이 갑자기 오랫동안 몸을 담았 던 친정팀을 버리고 다른 팀으로 이적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소식이 최근 프로야구계에서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었다.
"제가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뭐? 진짜?"
서공찬의 눈이 커졌다.
인 터뷰나 공식 기자 회견, 입장문 발표 등을 살펴봐도 찾아볼 수 없었던 기문산의 속사정.
조은석이 그것을 알아냈다고 하니, 프로야구 팬으로서 관심 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사실 감독하고 예전부터 쭉 트러블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그게 크게 터져서 팀 이적을 결심한 겁니다."
"감독하고 트러블? 아니, 팀에선 그런 말 일절 없었는데?"
"일부러 말 안 한 겁니다. 팀 분위기도 좋은데, 괜히 스스로 구 설수를 만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서공찬은 믿지 않았다.
도산 감독과 기문산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건 팬들 사이에서 도 유명한 일화다.
그런 두 사람이 알고 보니 비즈니스 관계였다니.
신빙성이 없다.
"찌라시 아니야?"
"이미 증거 자료까지 다 확보해 뒀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건 좀 부끄럽지만, 저희 회사 스포츠 담당 부서에서 일하 는 기자들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엘리트들입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스포츠 관련 분야만큼은 신뢰도 1위로 꼽힙 니다."
"그, 그래?"
"예, 못 믿으시겠다면 내일 지인분들에게 연락해서 물어보셔 도 됩니다."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조은석.
굳이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릴 필요도 없다. 딱 한 명. 서공찬 이 인정하는 야구 광팬, 곽분섭에게 물어보면 그만이다.
"분섭이는 뭐래? 걔한테도 이거 말해줬어?"
"예, 그렇습니다. 곽분섭 일병은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낸 스 포츠 기사면 믿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분섭이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란 소리인데……."
곽분섭이 서공찬보다 더 야구에 미쳐 있었다. 지식 또한 곽분 섭이 더 많았다. 그가 인정했으면 말 다한 셈이다.
갑자기 없던 신뢰도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아까 그 이적 이야기, 좀 더 자세히 해 봐라."
이강진의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어 가기 시작했다.
* * *
곽분섭이 서공찬에게 팬으로서의 공감대와 유대감을 형성하는 역할이었다면, 조은석은 서공찬에게 몰랐던 야구 세계의 뒷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역할을 소화했다.
어느 쪽이 듣는 재미가 더 있냐 친다면, 단연 조은석 쪽이었 다.
오늘도 조은석과 함께 외곽 근무를 나온 서공찬은 시간이 가 는 줄 모를 정도로 그의 말에 푹 빠져들었다.
1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죽하면 근무를 더 섰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겠나.
그렇게 서공찬의 마음을 계속 사들이고 사들인 끝에…….
드디어 엔딩의 순간이 찾아오게 되었다.
"은석아, 너 PX병 한 번 해볼 생각 없냐?"
"제가…… 말입니까?"
조은석은 놀란 척 연기했다.
이 제안이 들어올 줄은 사실 미리 알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서공찬에게 접근한 것이니까.
서공찬은 그것도 모르는 채 조은석을 자신의 후임병으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년 되면 너하고 PX에서 노가리나 까려고. 근무 시간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니까. 어떠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제가 서공찬 병장님의 말년을 책임지겠습니다!"
"너만 믿으마, 하하하!"
조은석이 정식으로 차기 PX병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강진의 작전 덕분에 1분대는 총 3개의 작업병을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백우호의 이발병은 최영고에게 할당되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최영고의 셋째 누나가 미용사라는 것. 이게 이유였다.
정작 본인은 바리깡 한 번 잡아 본 적 없었다. 하나 군대에선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된다. 이것이 군대식 방식이다.
휴가를 나가기 전, 이강진은 기독교 군종병이 아닌 평범한 종교 행사 참가자로서 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다.
종교 행사 집합을 위해 연병장으로 모인 이강진.
당직 병인 오일형 상병이 병장 중에서 유일한 종교 행사 참가 자인 이강진을 보고서 의아한 반응을 드러냈다.
"이강진 병장님, 종교 행사 참가하시는 겁니까?"
"어."
"굳이 참가 안 하셔도 되는데……."
병장들은 전부 다 짱 박혀서 TV를 보거나 휴게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중이었다.
작대기 네 개를 단 순간부터 종교 행사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강진은 자원해서 종교 행사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왜, 병장은 종교 행사 가면 안 된다는 군법이라도 있냐?"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이강진 병장님까지 명단에 넣어두 겠습니다."
이제 앞으로 교회에 가고 싶어도 자주 못 갈지도 모른다. 그 래서 이강진은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종교 행사에 참가할 예정 이었다.
한지윤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교회를 가려는 데에 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래의 장인 어른에게 잘 보여야지.'
이게 주된 목표였다.
교회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에선 종교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입장."
"입장!"
병사들이 교회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이강진이 가장 마지막에 들어섰다.
'이런 느낌이었군.'
이등병 시절 때가 떠올랐다.
앉아서 편안하게 종교 행사를 받으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나도 슬슬 전역할 때가 되긴 했나 보구나.'
이 런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 이 강진은 곧 부대를 떠 나야 할 시 기가 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 * *
종교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강진에게 조은석이 다가왔다.
"이강진 병장님, 저 PX 내려가 보겠습니다."
"아, 잠깐만."
조은석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유지한 채 뭔가를 속닥이는 이강진.
"부탁 좀 할게."
"알겠습니다. 챙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조은석을 먼저 보낸 뒤.
이강진은 백우호를 찾았다.
"우호야, PX 가자."
"PX? 곧 밥 안 먹어?"
"너 오늘 점심 메뉴 확인 안 했지?"
만약 점심 메뉴를 알고 있다면, 밥 먹으러 간다는 소리 따윈안할것이다.
뒤늦게 점심에 워가 나오는지 확인한 백우호는 기겁을 했다.
"조기 튀김에 똥국? 씨발, 오늘 메뉴 최악이네."
"거 봐. 라면이나 먹으러 가자."
짬 좀 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이런 거다.
식사 집합을 끝내자마자 이강진은 기운상에게 외쳤다.
"운상아! 나, 우호하고 PX 갈 테니까 너희들끼리 밥 먹고 와 라."
"예, 알겠습니다."
이제 분대장 교체식만 진행하면 완벽할 텐데.
하나 간부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강진에게 오랫동안 분대장을 채우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이강진이 워낙 유능한 분대장이라는 것도 있지만, 투 스타의 아들이 분대장을 차는 걸 최대한 미루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반 영되어 있었다.
오히려 간부들이 분대장 기운상의 눈치를 보게 될지도 모른 계급 역전 현상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강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병사가 간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PX로 향한 이강진과 백우호.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조은석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충성!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려? 뭘?"
백우호는 무슨 생뚱맞은 말을 하냐는 식으로 물었다.
"이강진 병장님, 여기 있습니다."
조은석은 하나둘씩 감춰 뒀던 먹거리들을 꺼냈다.
간짬뽕을 비롯해서 참치 크래커 그리고 PX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물품 중 하나인 라면에 뿌려먹는 치즈까지.
PX에 오기 전에 이강진은 조은석에게 물건이 다 나가기 전에 자기가 먹을 것들을 미리 챙겨 달라고 따로 부탁했었다.
후임이 PX병일 때 얻는 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고생했어, 은석아. 계산은 이걸로 해 줘."
"예, 알겠습니다!"
이강진은 편하게 계산만 하면 된다.
그제야 백우호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강진이 조은석을 강력하게 PX병으로 밀어붙인 이유를!
말년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세팅이다.
나중에 필요하다면 행보관의 감시망을 피해서 PX에 짱 박힐 수도 있다.
조은석에게 양해만 구하면 된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가능 해진다.
"너…… 이 머리 좋은 자식! 이러려고 은석이한테 PX병 차게 만 들었구나!"
"뭐, 그렇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백우호였지만, 이강진은 시큰둥하게 반 응했다.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는 건 이강진에겐 기본이었기 때문 이다.
< 제83화. 세팅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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