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4호 K 두 명의 신 병 (1) >
제84화. 두 명의 신 병 (1)
기독교 군종병 사건에 이어 PX병 사건까지.
작업병 대란을 겪은 이강진이었지만, 그래도 둘 다 그가 의도 했던 대로 일이 잘 풀렸다.
말년을 위한 세팅은 이것으로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딱 하나.
이강진의 눈에 거슬리는 게 남았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 분대장들은 행정반으로 집 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진아, 분대장 찾는다."
백우호와 함께 나란히 누워서 W를 보던 이 강진은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뭐만 하면 분대장, 분대장, 분대장.
이러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집합시키는지 모르겠네."
분대장 수첩을 챙기고 행정반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1분대부터 수송까지.
모든 분과 분대장들이 전부 행보관실에 모였다.
행보관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이에 이강진은 분대장들의 모습들을 쭉 훑었다.
"어쩌다가 나보다 짬 높은 분대장이 한 명도 없게 된 게斗."
죄다 이강진보다 후임이었다.
심지어 동기인 김철도 불과 저번 주에 분대장 교체식을 마쳤 다.
이제 이강진이 분대장들 중에서 최고 선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3분대 분대장이 동정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강진을 바라봤
"이강진 병장님은 왜 저번 주에 김철 병장하고 같이 분대장 교체식 안 하신 겁니까?"
"안 한 것처럼 보이냐. 못한 거지."
말은 하긴 했었다. 김철하고 같은 시기에 분대장을 달았는데, 뗄 때에도 같이 떼야 하는 거 아니 냐고.
그러나 간부들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분대장 좀 더 차라는 말만 돌아왔다.
결국 이강진은 분대장을 교체할 수 있는 황금 타이 밍을 놓치 고 말았다.
'운상이가 분대장 다는 게 그렇게 싫은가.'
유일하게 간부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병사가 기운상이긴 하 다.
늦게 분대장을 떼는 건 짜증이 날 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견장을 오래 차고 있는 만큼 받을 수 있는 휴가도 늘어나니까 그 냥 참기로 했다.
잠시 후 행보관이 제자리를 찾았다.
"다 모였나?"
"예, 그렇습니다."
신입 분대장들의 목소리에 패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유일하게 이강진만 음소거 상태였다.
"이번 주에 신병이 좀 들어올 예정이다. 사람 부족한 분과부 터 우선순위로 나눌 테니까 그리 알고 있어라."
신병이 온다는 소식은 선임들을 늘 설레게 만든다.
하나 이강진은 이 번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우리 분과에 신병이 오는 것도 아니니까.'
남의 신병은 관심 없다.
같은 분과 후임들 챙기기도 빡센 마당에, 남의 자식까지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혹한기 일정이 슬슬 윤곽이 잡힐 거 같다."
여태껏 분대장 회의에 의욕 없는 태도로 일관하던 이강진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번에 받을 혹한기는 이강진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로 손 꼽혔다.
왜냐하면…….
올해 12월에 받느냐, 내년 1월에 받느냐에 따라 이강진이 혹 한기에 참가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난 번 군 생활에선 재수가 없게도 12월에 일정이 짜인 탓에 전역을 코앞에 두고 혹한기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이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 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행보관님!"
이강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말해 봐라."
"혹한기 훈련, 12월에 받습니까? 아니면 내년 1월에 받습니까?"
윤곽이 나왔다고 하니, 어느 달에 받을지는 미리 알 수 있지 않을까.
저번과 마찬가지로 12월?
아니면 기적이 일어나서 1월로?
행보관의 대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느릿하게 들렸다.
"1 월 초다."
기적이 일어났다.
"오예!"
갑자기 환호를 지르는 이강진.
후임들은 이강진이 왜 이렇게 기뻐하는지 알 거 같았다.
전역이 1 월 1 일이라서 그런 거다. 그 말인즉슨.
1 월에 혹한기를 받는다고 한다면, 이강진은 훈련 전에 전역한 다는 뜻이 된다.
행보관은 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 녀석. 그렇게 좋냐?"
"예, 그렇습니 다!"
최근 들었던 소식 중에서 가장 기뻤다.
유격 훈련을 2번 받은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혹한기까지 2번 받고 전역할 순 없지 않은가.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것이다.
혹한기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이강진이 할 일은 하나 뿐이다.
'떨어지는 낙엽들 조심하면서 무사히 전역하기만 하면 된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혹한기가 내년 1 월로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백우 호와 김철은 이강진처럼…… 아니, 이강진 이상의 환호성을 내뿜 으면서 기쁨을 표줄했다.
혹한기 훈련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기로에 서 있던 세 명의 동기들은 아슬아슬하게 천국행 열차를 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좋은 소식을 들어서일까.
주간에 주특기 훈련을 받으면서도 이강진과 백우호의 얼굴은 굉장히 밝았다.
너무 환하게 웃고 있으니 오히려 훈련을 주관하는 부소대장 이 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거기 병장 둘, 그만 좀 웃어라. 훈련이 장난도 아니고."
"병장 이강진! 죄송합니다!"
"병장 백우호! 주의하겠습니다!"
혼나는 와중에도 이들의 입꼬리는 여전히 씰룩거렸다.
그리도 좋은 걸까. 부소대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한창 그렇게 사열대 앞에서 주특기 훈련을 진행하고 있을 때 였다.
김철이 부소대장을 찾았다.
"부소대장님! 행보관님이 전화 좀 받으라고 하십니다."
"전화? ……헉! 언제 하셨지?"
부재중 통화 기록만 다섯 번이 넘었다. 주특기 훈련 때문에 전 화가 온 줄도 몰랐다.
"충성! 죄송합니다, 행보관님! 아, 신병들 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 내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충성!"
어제 이야기가 나왔던 신병들이었다.
통화를 마친 부소대장은 두 명의 병사를 지목했다.
"이강진, 백우호."
"병장 이강진."
"병장 백우호."
"너희 둘이 가서 신병들 데리고 와라."
"저희가…… 말입니까?"
다른 병사들 놔두고 왜 하필이면 둘이란 말인가.
부소대장이 둘을 지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너희들은 주특기 훈련 받아도 이제 쓸 데가 없잖아. 혹한기 훈련도 안 받는데."
간부들한테도 슬슬 열외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기분 좋은 현상이었다.
후임들하고 같이 단독 군장 차림으로 주특기 훈련을 받느니, 차라리 인사과로 내려가서 신병들 인솔하고 오는 게 더 편했다. 두 사람은 곧장 알겠다고 답한 후에 행정반으로 향했다.
* * *
좋을 거치시켜 두고 인사과로 향하는 두 명의 병장.
오늘따라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이 더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강진아, 이 하늘을 볼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같구나."
"그러게."
감상에 젖어 들려고 할 무렵.
어느새 인사과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충성! 병장 이강진입 니다."
인사장교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라. 안 그래도 1중대는 언제 오나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들 바쁜가 보더라?"
"지금 주특기 훈련하고 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 뭐, 아무튼 그렇다 치고. 여기 있는 신병들이 다 1중대 로 갈 병사들이니까 데리고 가라."
총 8명으로 숫자가 꽤 됐다.
이중에 분대로 올 신병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아쉬웠다.
신병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이강진과 백우호의 눈치를 살 폈다.
"누가 인솔할래?"
"내가 할게."
이강진이 인솔자 위치에 섰다.
"전체 주목!"
"주, 주목!"
신병들이 이강진의 말에 복명복창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생활할 1075대대 1중대로 이동하겠다. 앞 으로- 갓!"
왼발, 왼발, 왼발, 왼발.
이강진의 구호에 맞춰서 앞을 향해 걸어가는 신병 대열.
8명의 신병 중에 이강진이 기억하는 얼굴이 있었다.
'우일음이 나랑 같은 부대였었지. 잊고 있었네.'
서로 다른 분과다 보니 처음에는 얼굴을 봐도 '걔가 걔 맞나?' 하는 의심부터 먼저 들었다.
우일음 말고도 몇몇이 더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인적 사항은 기억이 안 났다. 이러이러한 이미 지를 가지고 있던 신병이었다는 사실만 두루뭉술하게 떠올랐다.
1중대로 향하는 길.
신병들은 1075대대 전경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빠르게 살폈 다.
뒤따르던 백우호가 신병들에게 말을 붙였다.
"우리 부대 첫 이미지는 어떠냐?"
"멋진 부대 같습니다!"
"막상 지나다 보면 그런 생각은 없어질 거다, 크큭!"
같은 풍경을 2년 가까이 보면 지겨워진다.
사실 풍경이 바뀌긴 한다. 예를 들어서 눈이 왔을 때라든지, 아니면 풀이 무성하게 자랄 때라든지.
그럴 때마다 하는 작업들도 제설에서 제초, 제초에서 제설로 바뀐다.
1중대 막사 앞에선 신병들의 선임 되는 병사들이 주특기 훈 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강진은 부소대장을 찾았다.
"부소대장님, 신병들 데리고 왔습니다."
"곧 행보관님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행정반으로 데리고 가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 끝나면 너희들도 다시 단독 군장 차림으로 나와 라. 어디 짱 박힐 생각하지 말고."
이강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안 그래도 다시 부대로 복귀하면서 어디에 짱 박혀 있을까 궁 리하고 있었건만.
시도도 하기 전에 부소대장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각 신병들은 1분대를 포함한 몇몇 분대를 제외하고 적절하게 분배되었다.
개인 정비 시간에 이강진은 오늘의 당직이 누군지 확인했다.
'통신반장이라...... 오늘 점호는 통합 점호겠군.'
신병 전입과통신반장 당직, 두 가지 요소가합쳐지면 아주 높은 확률로 저녁에 통합 점호가 이루어진다.
'오늘 저녁에 신병들 장기 자랑 보게 생겼네.'
앞으로 신병들의 장기 자랑을 몇 번만 보면 전역이다.
'어디 보자. 그전에 서일주 병장이 먼저 전역해야 하는데…… 다다음 주가 전역이었나?'
시간 참 빠르다.
매번 보던 얼굴이었는데,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마음 편히 말년 휴가를 즐기고 있을 서일주.
이강진이 탈영병을 잡고 받은 4박 5일 포상 휴가를 양도한 덕분에 서일주는 10박 11일이라는 긴 휴가를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선임이 생활관에 안 보이니까 좋긴 좋다.
'휴가 계획이나 짜러 가 볼까.'
휴가를 나갈수록 해야 할 일이 점점 쌓이는 이강진.
전역한 뒤에는 더욱 바빠질 것이다.
* * *
이강진의 예상대로 금일 저녁 점호는 통합 점호로 대체되었 다.
"오늘 들어온 신병들, 전부 기상!"
통신반장의 명령에 따라 8명의 신병들이 관등성명을 외치면 서 벌떡 일어섰다.
"너희한테 워 큰 걸 기대하는 건 아니고. 그냥 짧게 자기소개 한 다음에 장기 자랑 한 번 하고 가자. 오케이?"
"예, 알겠습니다!"
"그럼 행정부터!"
행정분과에 새로 전입 온 병사 정재원 이병.
"사회에 있을 때 대학 다니면서 타로 카드 공부하다가 입대했 습니다. 혹시 타로점 보고 싶으신 선임 분들 계시면 제가 책임 지고 점 봐 드리겠습니다!"
"오, 타로점!"
"좋지, 좋아!"
"내가 첫 타! 자기 전에 카드 들고 나한테 와라, 신병!"
다음은 이강진이 기억하는 얼굴이기도 했던 통신분과 소속 우 일음 이병의 차례다.
"아카튜브에서 인터넷 개인 방송 콘텐츠 만들다 왔습니다! 혹 시 괜찮으시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람 설정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재치 넘치는 우일음의 자기소개에 선임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번에는 재미있는 신병들이 많이 들어온 것 같다.
< 제84화. 두 명의 신 병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