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4화. 두 명의 신병 (2) >
제84화. 두 명의 신병 (2)
이강진은 예전에 자신의 분과 후임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군대에선 너무 열심히할 필요 없다.
적당히가 최고다.
그리고 선임, 간부 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된다.
하나 이 금기를 어긴 신병이 두 명 존재했다.
타로 카드를 공부하다가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정재원.
그리고 개인 방송을 하다가 입대했다고 말했던 우일음.
두 사람은 벌써부터 선임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2주간의 대기 기간을 가지게 된 8명의 신병들은 같은 생활관에 모이게 되었다.
정재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나, 잘못한 거 같아."
"뭘 ?"
"타로 카드 볼 줄 안다고 자기소개 했던 거."
어제 일을 떠올리는 정재원.
점호가 끝나자마자 선임들이 그를 찾았다.
용무는 간단했다.
자기 전에 자기 타로점 좀 봐 달라는 거였다.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이 그런 부탁을 한꺼번에 해 오니, 정재 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행정분과 최고 선임인 김철이 그만 하고 자라고 중재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재원은 밤새도록 선임들의 타로점을 봐 줘야 했 을지도 몰랐다.
"입대할 때 타로 카드 놓고 왔다고 하지 않았어?"
"신교대에서 카드 만들었잖아."
"아, 그랬었지."
신교대에 있을 때에도 동기들이 타로 점 좀 봐달라고 자주 찾아왔었다. 그때는 할 것도 없고 해서 정재원이 직접 타로 카드 를 만들고 동기들의 점을 봐줬었다.
"괜히 타로 점 볼 줄 안다고 해가지고……. 내가 멍청한 놈이 지, 에휴!"
카드가 없었으면 핑계라도 댈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 게 되었다.
정재원만 어제 밤에 선임들한테 시달렸던 건 아니었다.
"나도 어제 장난 아니었어."
우일음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어제 선임들이 나한테 개인 방송 때처럼 연기해 보라 고 막 시키더라. 취침 소등할 때에도 '구독, 좋아요, 취침 소등 부탁드리겠습니다!' 하고 꺼야 한다니까? 미치겠다, 진짜."
웃기지만 슬픈 그런 일화였다.
만약 이들이 이강진의 후임으로 들어왔더라면, 이러한 일은 덜 겪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선 중간만 가는 게 최고다. 자기가 이거 잘한다고 괜히 나섰다간 전역하기 전까지 평생 그걸로 이리저리 불려 다닐지 도 모른다.
그림 좀 그릴 줄 안다고 자랑했다가 피를 보게 된 김철처럼 말이다.
힘들다고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 순간 군 생활 꼬이는 소리를 최고 음질로 듣게 될 것이다.
첫 자대 전입 소감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는 신병들.
그때 복도에서 전투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 온다!"
신병들은 곧장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생활관의 문이 열렸다.
오늘 당직 근무를 서게 된 이강진이 이들 앞에 등장했다.
"오전에 중대장님하고 한 명씩 개인 면담 실시한 다음, 오후 에 대대장님 단체 면담 받으면 된다. 일단…… 우일음."
"이 병 우일음!"
"너부터 먼저 행정반으로 와라."
"예, 알겠습니다!"
우일음이 첫 타를 맡게 되었다.
행정반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강진은 우일음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아카튜브 하다가 왔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지금 구독자 수가 얼마나 되는데?"
"3만 정도 됩 니 다!"
지금은 비록 3만 구독자에 불과하지만, 훗날 우일음은 인터넷 개인 방송의 대표 주자로 우뚝 성장하게 될 것이다.
구독자 수만 하더라도 500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주 콘텐츠가 게임이지?"
"예, 그렇습니다."
"나중에 먹방 쪽 콘텐츠도 한 번 꾸며 보는 건 어때?"
슬쩍 흘리듯 조언을 주는 이강진.
우일음을 일약 스타덤으로 발돋움하게 만들어 준 콘텐츠가 바로 '먹방'이다.
먹방으로 뜬 아카튜버에게 이런 말을 한 것 자체가 거의 천기 누설급이었다.
그러나 우일음은 이강진의 조언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전역하고 나서 한 번 도전해 보겠다고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그래. 군 생활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와서 상담하고. 중대장실로 들어가 봐."
"예, 감사합니다! 충성!"
우일음과 일찌감치 친분을 쌓아 두는 편이 좋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장사할 음식들을 일음이가 확실하게 홍 보해 줄 테니까.'
이것 또한 미래를 위한 투자의 일종이다.
중대장 개인 면담을 마친 신병들은 이강진과 함께 병사 식당으로 내려와 식사를 진행했다.
같은 분과 선임들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이들이 모르는 얼굴 들뿐이었다.
당직이어서 오늘 거의 하루 종일 붙여 다녔던 이강진이 오히 려 분과 선임들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강진은 신병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으면 거의 다 말을 해줬 다. 이강진의 이런 상냥함 덕분에 신병들은 그에겐 벌써 걸어 잠 갔던 마음의 문을 열어 두었다.
우일음이 밥을 다 먹은 후에 이강진 병장에게 물었다.
"이강진 병장님! 아까 오후에 저희, 대대장님 면담 잡혀 있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디서 면담을 진행하는 겁니까?"
"대대장실이라고, 어제 너희가 들렀던 인사과 건물 기억하지?"
"예."
"그 옆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대대장실이 있거든. 거기서 면 담 진행할 거야. 신병이 많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중대의 신병 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단체 면담을 진행하는데, 이번에는 숫자 가 좀 많다 보니 중대별로 따로 면담 시간을 가질 거라고 하더 라."
어느새 신병들의 눈과 귀는 이강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강진은 꿀팁을 하나 알려 주기로 했다.
"대대장님이 1075대대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건 다 아니 까 말해 주는 건데, 대대장님한테 잘 보이면 가끔 포상 휴가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 그러니까 면담 때 최대한 목소리 크게 하 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계속 보이도록 해."
포상 휴가라는 말을 들은 순간, 신병들의 눈에 이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휴가 좋아하는 건 이제 막 자대로 전입 온신병이나 말년 병 장이나 다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
오후 2시에 이강진은 소대장과 함께 신병들을 이끌고 대대장 실로 향했다.
대대장실 밖에서 대기 중이 던 인사장교가 신병들의 복장을 점 검했다.
"전투복…… 깔끔하고. 전투화…… 좀 애매하네. 진솔아! 구두약 하고 구둣솔 좀 가져와라!"
"상병 허진솔.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을 만나는데, 최대한 단정한 모습으로 신병들을 보내 야 하지 않겠나.
인사장교의 통과 사인을 받고 나서야 신병들은 대대장실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대대장의 시선이 문 밖에 있는 이강진에게 고정되었다.
"강진이도 같이 왔군."
"병장 이강진. 예, 그렇습니다!"
"여 기 신 병들 중에서 제2의, 제3의 이강진이 마구마구 나와 준다면 참 좋을 텐데, 허허!"
이강진을 볼 때마다 대대장은 연신 미소를 지었다.
대대장 입장에서 이강진은 복덩이 그 자체다. 이강진 덕분에 득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1075대대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칭찬을 독식한 이강진.
신병들의 마음속에 이강진이라는 종목의 주가가 한없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이강진의 휴가일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원홍 씨도 만나 봐야 하고, 영혜 씨도 만나기로 했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두석이 없었더라면 더 바빴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나두석이 밖에서 미리미리 일을 처리해 두고 있었기 에 천만다행이었다.
'또 뭘해야 하나......
한쪽에는 분대장 수첩이, 다른 한쪽에는 이강진의 사업 계획 안을 적은 수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바나나 우유를 쪽쪽 빨면서 TV를 보던 백우호가 이강진을 불 렀 다.
"강진아, 안 바쁘면 점이나 보러 갈래?"
"뜬금없이 무슨 점이냐?"
"행정분과 신병 있잖아. 타로점 볼 줄 안다고 해서 한번 봐 볼 까 하거든."
"괜히 쉬고 있는 신병 괴롭히지 말고 그냥 얌전히 TV나 보두."
"왜, 재미로 보면 되잖아."
"우리는 재미지만, 재원이한테는 일이야."
안 그래도 정재원은 개인 정비 시간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선 임들의 타로점을 봐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만 오는 게 아니었다.
간부들도 한 번씩 봐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강진을 설득하기 위한 백우호의 노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
"신병이 봐준 점, 은근히 잘 맞대. 2분대 조면식 병장 있잖아? 연애 운 봐 달라고 했는데, 여자 쪽에 뭔가가 있다고 한번 확인 해 보라고 해서 그날 여자 친구 지인들한테 전화 돌렸다고 하더 라. 근데 뭐라고 했는지 아냐? 알고 보니까 여친이 고무신 거꾸 로 신었더라고!"
그 일화 덕분에 정재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었다.
이강진은 회귀 이전까진 그런 비과학적인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회귀 이후, 이제는 누구보다도 그런 걸 잘 믿게 되었본인이 직접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었기에 그렇
"……그렇게 잘 맞아?"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하는 이강진.
백우호는 이때다 싶었는지 바로 쐐기를 박았다.
"너 사업 운도 한 번 봐달라고 하면 어때?"
이강진은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하긴, 재원이가 신기가 있는지 점이 잘 맞아 떨어지긴 했었 지.'
어렴풋이 그런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재미 삼아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래, 가자."
대신 공짜로 점을 봐 달라고 하긴 미안했다.
그래서 이강진은 PX에 갔을 때 미리 사둔 라면 봉지 몇 개를 챙겼다.
하나 백우호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다 주게?"
"원래 점은 공짜로 보면 안 되는 거야."
짧은 순간, 백우호는 이강진의 말을 통해 또래한테서 느끼지 못할 연륜을 느꼈다.
* * *
행정분과를 찾은 이강진과 백우호.
김철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왜 왔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너희도 점 보러 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어, 신병이 점을 기가 막히게 잘 본다고 해서 왔지."
"그럴 줄 알았어. 너무 우리 신병 막 굴리진 말고. 그냥 짧게만 하고 가."
김철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럴 예정이었다.
두 병장은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면서 정재원에게 접근 했다.
"엇, 이강진 병장님!"
정재원은 안 그래도 이강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예, 이강진 병장님이 도움 되는 군 생활 팁을 많이 알려 주셔 서 어떻게 보답을 드릴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점 보러 오신 거라면 제가 성심성의껏 봐 드리겠습니다!"
해 줄 수 있는 게 타로점밖에 없다.
많은 선임들의 점을 봐 준 정재원이었지만, 이렇게 환하게 미 소를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평소 행실이 좋으면 이런 식으로 좋은 대접을 받게 되는 법이 이강진은 백우호보다 먼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정재원이 능숙한 솜씨로 타로 카드들을 셔플하면서 물었다.
"어떤 것들 볼 수 있어?"
"연애 운, 금전 운, 건강 운 등등등 원하시는 거 말씀해 주시 면 다 봐 드리겠습니다."
원래 정재원은 많이 봐줘 봤자 한두 개 정도만 보고 끝냈었 다.
하나 이강진은 달랐다.
"그럼…… 일단 금전 운부터."
"예, 알겠습니 다!"
일렬로 카드들을 쫙 펼쳤다.
"세 장만 고르시 면 됩 니다."
"알았어."
이강진이 고른 세 장을 나란히 배열했다.
정재원이 주로 사용하는 기본적인 스프레드였다.
"그럼 카드 뒤집겠습니다."
앞면을 확인한 순간.
정재원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 제84화. 두 명의 신 병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