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5화. 뒤바뀐 입장 (3) >
제85화. 뒤바뀐 입장 (3)
드디어 오호만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불이 꺼지고, 사회자의 진행 멘트가 이어졌다.
"신랑 입장."
음악과 함께 말끔하게 결혼식 예복을 차려 입은 오호만이 먼 저 식장에 들어섰다.
이강진과 함께 전우였던 이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그 모습을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호만아, 축하한다!"
"우리 중대의 영원한 취사병, 오호만!"
"잘생겼다, 우리 호만이!"
사람들의 죽복을 받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가는 오호만. 이제 결혼식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었다.
"신부 입장."
웨 딩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오호만의 여자가 느린 걸음으 로 카펫을 밟았다.
사적인 자리에서 이미 한 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던 이강진은 세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이 저렇게 아름다우셨나.'
여자에게 있어서 결혼식은 굉장히 특별한 날이다.
이날만큼은 신부보다도 아름다운 여성은 없을 것이다.
오호만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반겼다.
앞쪽을 향해 동시에 등을 돌린 두 사람.
그들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오호만 부부를 보면서 이강진은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결혼.
좋아하는 사람과 치루는 평생의 언약.
이강진의 곁에 서 있을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지윤 씨라면 정말 좋겠는데.'
그녀가 이강진의 옆에 나란히 서서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많 은 힘을 얻을 것이다.
하나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다.
이강진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호만 부부에게 주인공의 자 리를 양보하기로 했다.
몇 가지 식순이 진행된 뒤. 대망의 주례가 시작되었다.
"어흠!"
대본을 가지고 온 황민수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봤다. 수차례 보고, 수차례 읽었던 대본.
그러나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신랑, 신부,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신 분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갑자기 예시 대본을 들어 올렸다.
"너무 형식적인 것들만 적혀 있어서 이 대본 말고, 그냥 제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놀란 눈을 했다.
하나 이강진 혼자만이 유일하게 미소를 띠었다.
"신랑 오호만 군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제 밑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이만한 청년, 솔직히 어디 가서 찾기 힘듭니다. 오호만 군이라면…… 아니, 내 제자라면, 결혼 생활도 식당 일처럼 문제없이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식에 당부의 말, 조언 그리고 중고 따윈 필 요 없다.
그저 잘 해낼 거라는 믿음만 보내 주면 된다.
오호만은 어렸을 때부터 불우한 삶을 살아왔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그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삶의 목적도, 살아가는 이유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요리라는 걸 접하게 되었고, 스승인 황민수를 알 게 되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를 이어 준 사람, 이강진과 만났다.
오호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황민수로부터 요리만 전수받은 게 아니었다.
사람을 믿는 법을 배웠다.
붉어지는 눈시울을 애써 참으면서 그는 있는 힘껏 외쳤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저희, 잘 살겠습니다!"
이제 곧 서울로 상경해 새로운 바라 식당 분점을 책임져야 할 오호만.
그전에 오호만은 황민수로부터 소중한 가르침을 다시금 받게 되었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에 이강진은 나두석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이강진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앉자. 안 그래도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1075대대 출신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는 테이블이 보였다.
이강진은 이들에게 나두석을 소개시켜 줬다.
"나하고 같이 일하는 동생이야. 두석아, 인사해라."
"형님…… 아니, 이강진 대표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나두석이 라고 합니다. 평소에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대표님이 좋은 분 들을 만나서 군 생활 힘들지 않게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나두석의 말 때문일까. 이들은 괜히 어깨를 한 차례 으쓱였다.
"저희가 잘한 건 없고요. 그냥 강진이가 잘한 거죠."
"두석 씨라고 했죠? 강진이보다 동생인 거 보면, 곧 입대하셔 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벌써 전역했나?"
군대는 먼저 갔다 온 사람이 승리자다.
그러나 이들은 나두석을 상대로 승리자가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신의 아들이라 불리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저, 면제입니다."
갑자기 분위기 가 착 가라앉았다.
나두석에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려고 했던 이들은 반대로 나두석이 부 러워졌다.
자기소개 시간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도록 하고, 이강진이 나 두석에게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라인혁을 가리켰다.
"이 형이 조만간 우리 회사에 와서 면접 보실 분이다. 잘 기억 해둬."
소개를 받자마자 라인혁이 먼저 살갑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면접 보러 갈 테니까 잘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근데 면접은 언제 보러 오실 생각인가요?"
그러고 보니 그걸 정하지 않았다.
"강진아, 나, 언제 면접 보러 가면 돼?"
"형 집 서울이지?"
"뭐, 그렇지."
"당분간 청주에서 일해야 할 텐데. 괜찮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 사는 곳 계약이 슬슬 만료될 시기거 드 "그러면 당장 이사해도 문제될 건 없어 보였다.
"결혼식 끝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갈 거야?"
"뭐…… 그렇지 않을까? 그냥 내가 다시 날 잡고 청주로 내려 올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나, 조만간 다시 부대로 복귀해야 되 고. 그렇게 되면 서로 일정 맞추기 어려울 테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하지."
"한다고? 뭘?"
갑자기 들고 있던 포크와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강진.
싱긋 웃은 뒤에 대뜸 라인혁에게 폭탄 발언을 꺼냈다.
"지금부터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굳이 따지고 보면 면접까지 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이강진은 이등병, 일병 시절 때 라인혁이 어떤 사람인지 다 봤었다. 무의미한 면접이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고 면접 도 없이 무턱대고 그냥 데려오는 건 좋은 입사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면접을 본 것이다.
면접을 보면서 이강진은 라인혁에게 이러이러한 일을 맡기고 싶은데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다.
라인혁의 대답은 심플했다.
"수십 개의 지점을 왔다 갔다 한 적도 있었는데, 3개 매장 관 리하는 것 정도는 껌이지."
"나중에 오픈할 카페도 추가하면 4개가 될 거야."
"그 카페, 서울 지점 바로 옆에 붙어서 오픈할 거라며? 그럼 나야 편하지."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라인혁.
말도 잘하고, 매장 관리에 대한 일도 이미 몇 번 해 봤고.
괜찮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이강진이 라인혁을 높게 평가하 는 가장 큰 이유는 어디 가서 뒤통수 칠 만한 타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황민수가 오호만에게 보였던 믿음. 이강진 또한 그것을 실천 하고 싶었다.
현재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나오면, 이강진의 회사에서 일하기로 서로 합의를 봤다. 옆에서 실시간으로 남의 회사 면접을 지 켜보고 있던 고필중은 기가 막힌 듯 웃었다.
"하하! 인혁이 형, 이제 강진이가 형 직장 상사네?"
옆에서 황지웅도 몇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 부대에 있을 때에는 선임, 후임 관계더만. 이제는 회 사 대표, 사원 관계네. 세상 일 참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시끄럽다, 이 녀석들아. 옛 후임이었든 뭐든 무슨 상관이야. 돈 주는 사람이 최고지. 그렇지, 강진아?"
"형, 벌써부터 아부 떨려고 해도 뭐 안 떨어져."
"쳇."
예나 지금이나 라인혁은 여전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 * *
부대 복귀날이 다가왔다.
원래대로라면 시외버스를 타고 부대로 가야 했으나, 오늘은 달랐다.
"형님, 타세요."
집 앞에서 대기 중이던 나두석이 이강진을 불렀다.
나두석이 이강진을 부대까지 바래다주기로 한 것이다.
군복을 입은 이강진은 행복이를 안고 있는 어머 니와 짧은 작 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엄마."
"조심해서 들어가렴."
"네, 행복아, 너도 잘 있어."
왈왈 짖어 대는 행복이. 군복만 입으면 이강진을 웬수 취급하 는 행복이의 행동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두석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가는데 얼마나 걸려?"
"편도로 3시간은 걸린다고 나오네요."
"왕복이면 6시간인가. 아니지, 돌아올 때쯤이면 차가 막힐 테 니까 더 걸릴지도 모르네. 운전 오래해야 하는데 정말로 괜찮겠 어?"
나두석은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 서울 한 번 올라가 봐야 돼요. 오 늘 원홍 씨 만나기로 했고, 그리고 바라 식당 서울 지점 인테리 어 공사 잘 되어 가고 있나 눈으로 확인도 해야 되고. 온 김에 친구들 얼굴도 좀 보고 가려고요."
"오늘 사무실로 출근하는 건 글렀네."
"하루 정도는 괜찮죠, 뭐. 그렇죠, 대표님?"
일부러 형님이 아닌 대표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말하는 나 두석.
이강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알아서 해라. 내가 그런 거 가지고 심하게 터치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알아서 잘하는 나두석에게 이래라저래라 말하면서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사원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행동 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그런 쓴소리가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이강진은 라인혁에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꺼 냈다.
"인혁이 형한테 어제 전화 왔더라. 이직 자리도 결정되고 해 서 예정보다 빨리 퇴사하고 청주로 내려가도 되겠냐고."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빨리 와 준다면 저야 좋죠. 혼자서 서 울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 말동무라도 있는 게 더 편하니까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강진이 전역하기 전까지 최소한의 틀은 다 마련되어 있어 야 한다. 그래야 좀 더 빠르게 일을 추진할 수 있을 테니까.
오후 2시 30분.
이강진은 비교적 이른 시간에 위병소에 도착했다.
앞에 차를 정차시킨 나두석이 이강진에게 재;자 물었다.
"정말로 바로 들어가셔도 됩니까? 5시 이전까지 들어가면 되 는 거 아닌가요?"
"오늘 부대에서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 그거 미리 준비하 려면 일찍 가는 게 나아. 그리고 휴가를 하도 많이 나오니까 복 귀 시간까지 아슬아슬하게 즐기다가 들어가는 것에 이젠 미련 이 없어."
어차피 이강진은 3주 뒤에 다시 휴가를 나올 것이다.
몇 시간 가지고 구차하게 얽매이는 그런 단계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나저나 형님 덕분에 군부대도 다 오고, 이 런 경험을 다해 보네요."
면제인 나두석이 올 일이 없는 장소다.
그래서인지 부대가 그저 신기하게 보였다.
"더 늦어지기 전에 가 봐라."
"네, 알겠습니다. 저녁에 연락 주세요, 형님."
"그래, 안전 운전하고."
"예!"
나두석이 운전하는 차가 멀어질 때까지 이강진은 위병소에 서 서 그를 배웅했다.
이내 차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이강진은 걸음을 옮 겼다.
오늘은 이강진이 말한 대로 아주 특별한 날이다.
'서일주 병장을 부대에서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네.'
바로 내일.
이강진의 맞선임이 전역한다.
< 제85화. 뒤바뀐 입장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