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6화. 맞선임을 보내다 (3) >
제86화 맞선임을 보내다 (3)
서일주를 보낸 뒤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온 이강진은 1생활관을 쭉 훑었다.
'한 명 사라진 건데, 생활관이 이렇게 휑해 보이다니.'
이전에 전역한 선임들에 비해서 서일주의 존재감은 그리 크 지 않았다. 특히 말년 시기에 돌입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 존재 감이 옅어졌다.
그가 떠나고 난 다음에서야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남은 사람들끼리 잘해 봐야지.'
서일주의 관물대 안쪽을 슬쩍 훔쳐보는 이강진.
아직 안에 짱 박혀 있는 보급품들이 몇 개 보였다.
"운상아, 이거 버려야 할 것들이야?"
"예, 그렇습니다."
A급 전투화나 전투복, 혹은 수요가 높은 깔깔이 바지 같은 경 우에는 짬 처리가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하나 낡은 전투복이나 보급품 같은 것들은 수요가 없다. 그러 다 보니 이런 식으로 뒷처리가 필요한 물품들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강진은 기운상과 같이 서일주의 흔적들을 챙겨 들었다.
"보급계한테 넘기면 되는 거지?"
"예 고성빈 상병이 처분해야 할 보급품 있으면 자기한테 가 져와 달라고 했습니다."
"성빈이 어디 있는데?"
"행정반에 있습니다."
"오케이, 가자."
기운상과 함께 행정반으로 향했다.
"성빈아! 이거 받아라."
"상병 고성빈, 이강진 병장님이 직접 가져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왜? 가져오면 안 돼?"
"후임들 시키실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강진은 웃음을 흘렸다.
"손 비는 사람이 하는 거지, 뭐. 이것들 어디다 두면 되냐?"
"그냥 행정반에 두고 가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김철병장이 이강진 병장님 찾았습니다. 지금 휴게실에 계실 겁니다."
"휴게실에? 왜?"
고성빈은 남들에게, 특히 간부들에게 들릴까 조심하면서 말 했다.
"간부들 피해서 짱 박혀 계십니다."
"철이도 말년 다 됐네."
"이강진 병장님이 특이하신 겁니다. 다른 동기분들은 행보관 님 피해서 여기저기 숨어 다니시는데, 이강진 병장님만 마이웨 이를 고집하시니……. 말년 되어도 전 이강진 병장님처럼 부지런 하진 못할 거 같습니다."
이강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부지런해서 그런 게 아니다.
초록색 견장을 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부지런한 척하고 있 는 것이다.
분대장이라도 뗀 상태였다면 이강진도 김철처럼 짱 박히는 말 년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분대장이라는 족쇄 때문 에 그럴 수가 없었다. 뭐만 하면 분대장을 찾는데, 답이 없다.
포기하면 편하다. 이것이 이강진을 강제로 부지런하게 만드 는 비결이다.
김철이 몰래 짱 박혀 있다는 휴게실로 간 이강진. 그러나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철아! 김철!"
이강진이 부르는 소리가 휴게실을 가득 채우자, 코인 노래방 뒤쪽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만 빼꼼 내민 김철이 이강진을 보고서 활짝 웃었다.
"왔구나."
"어디 짱 박혀 있나 싶더니 거기에 있었냐?"
"내가 최근에 발견한 비밀 장소지. 어때? 여기라면 행보관님 한테 절대로 안 들키겠지?"
이강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100퍼센트 들킬 거 야."
그런 어설픈 숨기 실력으론 행보관에게 택도 없다. 이미 행보 관은 김철이 숨어 있는 비밀 공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강 진이 먼저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로 김철은 행보관에게 귓불을 잡혔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김철.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하나……"
"행보관님이 모르시는 장소는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거야. 그 리고 괜히 어설프게 숨으려고 하다간 오히려 괘씸죄가 붙어서 더 곤란해질 걸?"
"하아…… 군 생활 어렵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물론 그중에서도 특히 군 생활은 어려운 축에 속한다.
"근데 난 왜 불렀어?"
김철이 자신을 찾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번에 너 휴가 나가는 거, 1지망이 다음주 수요일이었잖아."
"어, 그런데 그날 휴가 출발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안 된다 며."
요즘 이강진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이 휴가다.
남아 있는 휴가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나갈 수 있 는 시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손 좀 써 주려고. 다음 주 화요일날에 내가 휴가를 갑자 기 나가게 되었거든. 화요일날에 나하고 같이 나갈래?"
수요일보다 하루 당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휴가가 뒤로 쭉 밀 리는 것보단 나았다.
이강진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
"나야 좋지. 근데 철이 너, 이번 달에 휴가 안 쓴다고 했잖아?"
"안 쓰려고 했지. 그랬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버렸어."
"안 좋은 일은 아니지?"
"그건 아니고. 웹툰 공모전 모집 요강 나와서, 이번에 신청하 려고."
군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손 그림으로 원고를 준비했던 김철.
휴가를 나갈 때마다 그것을 디지털 원고로 변환해 작업하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공모전에 대한 대비를 해 두고 있었다.
"프롤로그 포함해서 3화 분량까지 보내면 된다고 해서, 작업 해 둔 거 보내 보려고. 이게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도전은 한 번 해 봐야지."
"좋은 자세야."
성공을 하려면 우선 도전을 해야 한다.
도전 없인 성공도 없다.
같은 동기인 백우호도 전역하면 바로 오디션 볼 거라고 랩 연 습이 한창이었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대비하는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강 진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화요일날 나하고 같이 휴가 나가는 걸로 조정해 둘게."
"고맙다, 철아."
"서로 돕고 돕는 거지. 그리고 이건 아직 확인 안 된 건데......
김철이 목소리를 낮줬다.
"안 좋은 소문이 들리더라."
"무슨 소문인데?"
"혹한기 일정, 바뀔지도 모른데."
1월로 예정되어 있던 혹한기 일정이 바뀐다?
불안감이 밀려왔다.
"며칠로? 설마 12월은 아니겠지?"
"그건 잘 모르겠어. 일정이 바뀐다는 것도 아직 확실치 않아. 나도 중대장님이 통화하는 걸 얼핏 들은 거라서……."
이제 전역일만 얌전히 기다리면서 휴가만 주기적으로 나가면 될 줄 알았건만.
설마 이런 불안 요소가 생길 줄은 몰랐다.
'아니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직 훈련 일정이 앞당겨질 거 라는 보장이 없잖아?' 오히려 2월로 밀리게 될지도 모른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에 마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다.
그때 갑자기 방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행정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 각 분과 분대장들은 행보관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강진과 김철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혹한기 때문에 분대장들을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가 봐야겠다."
"가서 행보관님이 무슨 이야기하셨는지 나한테도 꼭 알려 줘 야 한다?"
"그래, 알았어."
혹한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사항이다.
과연 어떻게 될지.
이강진의 걸음이 무거워졌다.
* * *
행정반에 모여든 분대장들의 얼굴 표정에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오전에 분대장들을 소집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일 과 시간이 끝난 뒤에 모이곤 하는데 별일이었다.
그만큼 중대한 사항일지도 모른다.
'혹한기 일정 변경도 중요한 사항이지.'
분대장 수첩을 들고 있는 이강진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행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모였나."
"예."
"중요한 전파 사항 있으니까 새겨 듣도록 해라."
꿀꺽 침을 삼키는 이강진.
귀를 쫑긋 세우며 행보관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행보관은 이강진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 를 꺼냈다.
"10시에 분리수거 차량 온다고 하니까 병사들 데리고 분리수 거장으로 집합해라. 이번 기회에 재활용 쓰레기 다 치워 버리 게."
"예,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었다.
분대장들은 각 분과 분대원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곧장 행정 반을 나섰다.
하나 이강진은 다른 분대장들처럼 곧장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저기…… 행보관님?"
"응? 뭐냐, 아직도 안 나갔냐?"
행보관은 '왜 안 나가?' 하는 시선으로 이강진을 쭉 훑었다.
"오늘 전파 사항은 분리수거 자량 온다는 게 끝입니까?"
"오전에는 그게 끝이다. 왜, 더 듣고 싶은 게 있나?"
"아,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충성!"
황급히 행보관실에서 벗어났다.
'혹한기가 몇 월로 옮겨졌는지 궁금했는데.'
별말이 없는 걸 보면 그냥 그대로 가는 가려고 하는 게 아닐 까.
그런 기대감이 샘솟았다.
'그래, 바뀌어 봤자 며칠 미뤄졌거나 앞당겨졌거나 그러겠지.
크게 변동된 거 아니니까 말씀 안 하시는 거야.'
괜히 신경 쓸 거 없다. 그러면 이강진만 스트레스 받으니까.
때로는 긍정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본래 분리수거장 청소는 한 개 분과가 도맡아서 진행한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분리수거 처리 차량이 올 때가 있다. 이때에는한 달 분량 쌓였던 쓰레기들을 한꺼번에 옮 겨야 했기 때문에 전 병력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야만 했다.
말년 병장이라고 예외는 없다.
"백우호! 일 설렁설렁 하는 거, 다 보인다! 똑바로 안 하냐!"
"예, 알겠습니다!"
소대장의 지적에 백우호는 한숨을 몰래 삼키면서 답했다.
말년에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들과 씨름을 하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강진은 그냥 포기하고 얌전히 일하기로 했다. 괜히 건성건 성 했다가 행보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더 빡센 작업에 끌려갈 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오전 내내 분리수거장 정리가 이어졌다.
차량이 떠난 뒤에도 작업은 계속 되었다.
"근처에 널브러진 쓰레기들 다 치워라. 그리고 이강진."
"병장 이강진!"
"넌 애들 2명 데리고 창고로 가서 마대 가져와라. 기존에 쓰 던 거는 다 뜯어져서 못 쓸 거 같으니까 새 걸로 갈아 버리게."
"알겠습니다."
행보관의 명령에 따라 이강진은 곽분섭, 죄영고와 함께 창고 로 향했다.
곽분섭은 이강진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행보관님은 왜 저렁게 말년 병장분들을 괴롭히시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년들이 이등병 시절부터 행보관님 밑에서 작업을 눈으로 보고 배워 왔으니까. 사실 태도가 불성실해서 그렇지, 일하는 스킬이라든지 이런 건 말년 병장을 따라올 병사가 없잖아? 그래 서 말년들을 최대한 괴롭히는 거야."
행보관이 보기엔 아주 우수한 자원들이다. 그 자원들을 낭비 하는 꼴을 행보관은 절대로 두고 보지 않는다.
말년들이 조심해야 하는 건 떨어지는 낙엽이 아니다.
'행보관이지.'
주식 정보를 좀 더 바쳐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는 이강진 이었다.
오늘도 고된 작업이 끝났다.
저 녁 식사 준비만 남은 상황.
그전에 행정반에서 다시 한번 분대장들을 호출했다.
평소처럼 분대장 결산 회의가 진행되었다.
행보관은 집합한 분대장들에게 대뜸 행군 일정을 언급했다.
"2주 뒤에 올해 마지막 행군 진행한다고 하니까 미리 준비해 두도록 해라. 특히 신병들 신경 잘 쓰고."
"예, 알겠습니다!"
"그밖에 특이 사항 있는 분과, 손 들도록."
"없습니다!"
오전 집합 때처럼 무난하게 회의가 끝나는 분위기였다. 하나 중간에 소대장이 등장해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다.
"행보관님, 분대장들한테 알려 줄 거 있는데, 괜찮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행보관.
소대장은 분대장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내년으로 예정되었던 혹한기 훈련에 관한 거다. 일정이 앞당 겨져서 우리 부대는 12월 2주차에 받기로 했으니 그리 알아두 도록."
툭
소대장의 전달 사항이 끝나자마자 이강진은 분대장 수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망했다고.
< 제86화. 맞선임을 보내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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