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8화. 움직이는 마음 (3) >
제88화. 움직이는 마음 (3)
이강진은 한지윤과의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를 보자마자 오호만이 슬쩍 물었다.
"누구한테서 온 거야? 지윤 씨?"
단번에 정답을 맞혀 버렸다. 이강진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 으론 아닌 척 연기를 했다.
"아니, 그냥 아는 사람. 나 휴가 나왔다고 하니까 얼굴이나 보 자고 하더라고."
"누군데?"
오늘의 오호만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반면 나두석은 조용했 다. 이강진과 통화했던 사람이 한지윤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 차린 것 같았다.
이강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핑곗거리를 떠올리기로 했다.
"용진이 형이라고 방송국에서 일하는 지인이 있는데, 그 형하고 이야기 나눌 게 있거든."
"백두원의 푸드기행에서 조연출 맡았다던 그분 맞지? 저번에 술 마시는 자리에서 네가 이야기했던 거 같은데."
"맞아, 그 형이야. 실은 그 형이 준비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 이 하나 있거든. 요식을 소재로 한 건데, 스타들이 나와서 직접 가게 운영하는 그런 콘셉트라고 하더라고. 그거를 우리 바라 식 당하고 어떻게 연계시킬 수 있을까 하고 상의해 보려고."
원래는 이 이야기를 나중에 들려주려고 했었다.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결정되고 난 다음에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오호만 이 한지윤과의 약속에 너무 과도하게 관심을 드러내는 거 같아 서 강진은 일부러 위장용으로 이 일을 꺼냈다.
"그럼 나도 방송 탈 수 있는 거야?"
잔뜩 기대감을 드러내는 오호만. 새로운 장난감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형, 방송 출연하는 거에 거부감 같은 건 없 어?"
"딱히. 오히려 한 번쯤은 출연하고 싶다는 쪽이지. 살면서 내 가 티비에 나올 일이 몇 번이나 있겠냐?"
"그렇긴 하지."
카메라 앞에 서는데 지장이 없다면, 이강진 입장에선 오히려 편해진다.
안 그래도 스타들에게 요리를 알려 주면서 멘토가 되어 줄 캐 릭터가 필요했는데, 오호만이 그 역할을 맡으면 딱일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용진이 형하고 이야기하다가 결정되는 거 있으 면 호만이 형한테도 바로 알려 줄게. 뭣하면 나중에 형도 같이 미팅에 참여해도 되고."
적당히 둘러대려고 꺼냈던 말이 이렇게까지 진행될 줄은 몰랐다.
뒷걸음치다가 얻어걸린 그런 느낌이었다.
나두석과 오호만을 먼저 청주로 내려보낸 후에 이강진은 신 림역 근처로 향했다.
'휴가 첫날에 군복을 입고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다녔던 적도 드문데.'
바로 집으로 돌아가면 이 망할 놈의 군복부터 벗어 재꼈던 이 강진이었으나, 오늘은 의도치 않게 계속해서 약속이 쌓이고 쌓 이는 중이었다.
한지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오후 4시.
저녁까지 먹고 난 다음에 헤어지고 싶었으나, 서로 워낙 바쁜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한지윤은 야간에 드라마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 서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다.
신림역 3번 출구로 나온 이강진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어느 한적해 보이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작은 카페였다.
군복을 입은 이강진이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40대 중년의 남성이 그를 유심히 바라봤다.
"혹시 이강진 씨?"
"아, 네. 그렇습니다만."
버스 전복 사건과 탈영병 사건 덕분에 가끔 이강진을 알아보 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남성은 그것 때문에 이강진의 존재를 알아차린 게 아니었다.
"지윤이한테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창가 쪽으로 가시죠. 저쪽 은 사람들의 시선이 덜 가는 곳이니, 지윤이하고 마음 편히 같이 시간을 보내셔도 됩 니다."
한지윤을 편하게 '지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봐선, 그녀와 아 는 사이인 듯했다.
"지윤 씨 랑 아는 관계인가요?"
"제 조카입니다, 하하!"
친척 관계일 줄은 몰랐다.
이강진은 당혹감을 애써 감줬다.
"그,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못 알아봤네요."
"보통은 잘 모르죠. 제가 지윤이랑 같이 티비에 나온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윤이는 조금 있다 온다고 하니 앉아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마실 건 뭐로 드릴까요?"
메뉴를 쭉 훑어봤다.
다양한 편은 아니었다. 마치 개인이 취미로 소소하게 운영하 는 그런 작은 카페 같았다.
이강진은 무난한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창가 쪽에 앉은 이강진은 밖의 풍경을 살폈다.
인적이 드문 거리. 강진은 신림역에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건 난 생처음 봤다.
'오히려 이런 곳이어야 부담 없이 지윤 씨를 만날 수 있지.'
한지윤이 장소를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사장이 말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윤이 가게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윤 씨, 여기입니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기에 이강진은 부담 없이 한지윤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이강진을 보자마자 한지윤의 얼굴에 웃음꽂이 활짝 피었다.
삼존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그녀는 이강진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했다.
방금 전까지 남친을 군대에 보낸 곰신 역할을 하다 와서 그럴 까, 군복을 입은 이강진의 모습이 오늘따라 한지윤에게 특별하 게 느껴졌다.
"아까 촬영장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요? 어떤 일인데요?"
이강진은 한지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상대 배역이 미필인데, 군복을 어떻게 착용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대는 걸 한지윤이 대신 알려 줬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강진은 입에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놀랐겠네요."
"아는 지인한테 배웠다고 대충 둘러댔어요."
그 지인이 이강진이라는 사실은 매니저인 이홍연만 아는 사 실이었다.
이강진은 아메리카노를 음미한 후에 그녀에게 물었다.
"실제로 곰신 입장이 된 적은 없었죠?"
"네, 사실은… … 연애 경험도 없어요."
수줍게 말하는 한지윤.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이 유독 귀 엽게 느껴졌다.
"연기하는 게 어렵진 않았나요? 군대 간 남친을 기다리는 입 장이 되어 본 적이 없다면, 머릿속으로 상상해서 연기해야 했을 텐데……."
"괜찮아요. 비슷한 기분은 느껴 봤으니까요."
"네?"
이강진이 되묻자, 한지윤은 순간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면서 말머리를 돌리느라 애를 썼다.
"가, 강진 씨, 이번에 나온 휴가는 기간이 어떻게 되나요?"
"7박 8일입 니다. 그래서 미리 이걸 준비했습니다."
갑자기 이강진이 작은 종이 백 하나를 올려 뒀다.
"이게…… 뭔가요?"
"한번 열어 보세요."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나무 상자 안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은색 목걸이.
"제가 지윤 씨에게 미리 드리는 생일 선물입니다."
휴가 복귀 후 바로 다음 날이 바로 한지윤의 생일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처럼 직접 한지윤의 얼굴을 보면서 그녀의 생일을 챙겨 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강진의 군대 문제도 있고, 한지윤의 방송 일정도 있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잊지 않게끔 이렇게 미리 그녀에게 생일 선물을 챙겨 주기로 했다.
한지윤은 최대한 신중하게 이강진이 선물한목걸이를 집어 들 고 직접 착용했다.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강진 씨. 근데 이거, 비싼 건 아니죠?"
"아닙니다. 안 비싸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사실 많이 비싸다.
금액으로 따지면 7백만 원 정도 하는 고가의 물품이었다.
그러나 이강진은 굳이 가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보너.
한지윤은 이강진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어 준 존재였다. 힘든 군 생활로 쌓인 피로도 그녀의 미소 한 번으로 눈 녹듯 사라졌 다.
이강진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그녀를 위해서라면 이런 선물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계속해서 목걸이를 바라보던 한지윤은 다시 한번 이강진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이른 생일 선물이었으나, 한지윤은 지금 이 순간 확신했다. 올해 받은 생일 선물 중 가장 기쁘고 값진 선물이 될 거라고.
* * *
목걸이로 확실하게 점수를 따 둔 이강진은 가벼운 발걸음으 로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해가 저물고 나서야 간신히 청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가 첫날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뻗어 버렸다.
둘째 날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사무실에 오랜만에 들른 뒤에 직원들과 회의 겸 저녁 식사를 했다.
그다음, 셋째 날 오전에는 마케팅 부서를 책임지게 될 최영혜 와 만나 언제쯤 사무실에 출근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했다.
최영혜와의 미팅을 끝낸 이강진은 이제 다음 일정 장소로 향했다.
"이쯤이었는데
바라 코리아 직원들 중 대부분은 서울 혹은 타 지방에서 살다 가 이강진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청주로 올라온 사람들이 었다.
그렇다 보니 거주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강진은 바라 코리아 사무실 바로 근처에 기숙사를 따로 마련했다.
매물로 나와 있는 4층짜리 빌라를 통째로 매입했다. 그것을 바라 코리아 전용 기숙사로 사용 중이었다.
회사 기숙사가 이강진의 다음 목적지였다.
402호에 새로 입주하게 된 인물과 만나기로 했다.
차를 주차시킨 뒤에 이강진은 계단을 올라 402호 현관문 옆 에 달린 초인좋을 눌렀다.
띵동!
"예, 누구세요!"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형."
"어? 강진이냐? 잠깐만!"
현관문이 열렸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깔린 라인혁이 이강진을 보면서 물었다.
"일찍 왔네? 좀 늦을 거 같다고 하더만."
"오전 미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거든. 짐 정리는 끝났어?"
"대충. 들어와. 커피라도 한잔 줄게."
"고마워."
아직 몇 개의 종이 박스들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다.
그래도 필요한 것들은 다 정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형, 내려온지 얼마나 됐지?"
"3일째지. 너 휴가 나왔을 때 난 막 이곳에서 짐 풀고 있었으 니까."
"타지 생활은 좀 어 때?"
라인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3일밖에 안 되다 보니 잘 모르겠어. 근데 전철이 없다는 건 좀 불편하긴 하네."
서울에서 살다가 지방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전철의 부재를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내버스도 서울처럼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 지 않는다.
교통은 서울에 비해서 확실히 불편하다.
"금방 익숙해질 거야. 아니면 차라도 한 대 뽑아 줄까?"
"아버지 차 받아 왔으니까 그거 타고 다니면 돼."
새 차를 뽑아 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인혁은 이강진 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부담스럽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도 이강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새 차가 필요하다 싶다면 언제든 말해. 안 그래도 회 사 차 따로 뽑으려고 했으니까."
"알았어. 그보다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을래? 근처에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혼자서 밥 먹어야 하는데, 외로워 죽겠더라."
"하하하, 알았어. 까짓것 식사 정도야……."
말을 이으려던 도중에 갑자기 이강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한 이강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소대장이 왜 전화를......?' 불현듯 스치는 불길한 기분.
"충성, 병장 이강진입니다."
-어, 강진아! 지금 어디냐?
"청주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다급함이 느껴지는 부소대장의 목소리에 이강진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북한 쪽에서 지금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고 부대 전체에 비 상 떨어졌다. 휴가자들한테도 지금 복귀 명령 떨어져서 너한테 전화한 거야.
부소대장의 말을 듣자마자 이강진은 손에서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런 씨발!"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 제88화. 움직이는 마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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